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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1901년 대원사에서 천지대도를 여신 후 이듬해 4월부터 1903년 무렵까지 하운동(夏雲洞)을 자주 왕래하시면서 천지공사를 행하셨다. 공사는 주로 상제님 최초의 종도인 김형렬(金亨烈, 1862~1932)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하운동은 상제님께서 이선경(李善慶)의 빙모(김형렬의 막내 여동생, 김성녀)에게 49일간 매일 성심으로 떡을 찌게 했던 일화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상제님의 천지공사 중에서 초기의 행적들을 찾아볼 수 있는 하운동을 답사하였다.
하운동은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에 속해 있으며, 금산사와 동곡마을 사이에 남북으로 뻗어있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주변은 대부분 해발 100~700m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쪽에는 모악산(793.5m)이, 서쪽에는 구성산(九城山, 487.6m)과 제비산(帝妃山, 308m)이 있다. 높은 산자락 아래 깊숙이 자리 잡은 입지 조건 때문에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아 여름처럼 무더울 뿐만 아니라 안개 같은 구름이 골짜기에서 일어나 마을을 감싼다고 하여 ‘하운(夏雲)’이란 지명을 갖게 되었다.01
우리가 하운동에서 찾아갈 장소는 김형렬이 살았던 집터가 있는 영사재(永思齋)와 이선경의 장모인 김성녀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집터이다. 김형렬 종도 집안의 안동 김씨 재실과 선산이 있는 영사재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제비창골에 있으며, 김성녀가 살았던 집터는 하운동의 마을경로당 인근에 있다. 두 곳 모두 하운동에 속하지만, 거리상으로는 2km 정도 떨어져 있다. 우리는 이 두 곳 가운데 상제님께서 주로 왕래하시며 공사를 행하셨던 김형렬의 집터가 있는 영사재에 먼저 가기로 했다.
영사재로 가려면 전주에서 금산사 방향으로 가는 712번 국도를 달리다가 금산가든 방향으로 들어서서 다시 산길을 따라 1km가량 더 가야 한다. 상제님 재세 시에는 이 길이 매우 좁고 험할 뿐만 아니라 수목이 우거져 있어 사람들이 다니기에 불편하였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는 김형렬의 집에 머무실 때 출타하시려면 언제나 글을 써서 신명에게 치도령(治道令)을 내리셨다. 그러면 여름에는 나무에 내린 이슬을 바람이 불어 떨어뜨리고 겨울에는 진흙 길이 얼어붙기도 하고 쌓인 눈이 녹기도 하였다.02 하지만 지금은 길이 잘 포장되어 차로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다. 금산가든에서 차로 5분 정도 가니 영사재가 나타났다.
▲ 영사재와 김형렬의 집터 추정지(촬영: 2019. 9. 20.)
마을과 조금 떨어진 제비창골에 마련된 영사재는 정면 5칸 측면 2칸 구조의 한옥 건물이다. 재실 뒤편은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재실 왼편에는 관리인이 사용하는 건물이 있다. 김형렬은 이곳으로 이사와 문중의 재실 관리를 맡으며 살았다. 그럼 당시 김형렬이 살았던 집은 어디였을까? 증언에 의하면, 과거에는 관리인이 기거하던 건물이 지금과는 달리 재실 오른편 마당에 있었다고 한다.03 그러므로 김형렬이 살았던 집도 마당 오른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형렬이 하운동 재실로 이사 오기 전에는 금평저수지에서 금산사로 가는 도중에 있는 금구 환평(環坪)에서 살았다. 그가 환평에서 살 때 있었던 일화로는 1894년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이 동학도를 모아 의병을 일으켜 시정에 반항하여 세상이 소란스러워지자 상제님의 성예(聲譽)를 듣고 찾아뵌 후 한적한 곳에 가서 함께 글 읽으시기를 청한 일이 있었다.04 그리고 같은 해 금구 사람인 안필성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쫓기던 중 상제님을 만나 구사일생의 위기를 모면한 일도 있었다. 김형렬의 집안은 원래 부유했지만, 동학농민운동이 끝난 이후에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이 재실로 이사 온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때 김형렬은 상제님을 다시 뵙게 되었고, 1902년 4월경에는 상제님의 공사를 받드는 종도가 된다. 그 후 1903년경 가족들과 다시 동곡으로 이사 갈 때까지 이 재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진실로 상제님의 공사를 받들었다. 김형렬의 어려웠던 상황과 상제님에 대한 그의 진실한 마음은 다음의 『전경』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상제께서 임인(1902)년 여름철을 맞이하여 형렬의 집에 가셔서 지내시니라.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상제께 드리는 공궤가 소략하고 더욱이 가뭄 때문에 밭에 심은 채소도 가뭄을 탄 탓으로 더욱 걱정 근심하니 그 사정을 관찰하시고 상제께서 “산중에 별미가 있는 것이 무엇이리요. 채소의 별미라도 있어야 할 터이니라”고 하시고 “걱정 근심을 말라” 하셨도다. 이 말씀이 계신 후 채소가 잘 자라 형렬이 한결 근심을 덜었도다. (교운 1장 1절)
(1902년) 七월에 상제께서 본댁에 돌아와 계시므로 김 형렬은 상제를 배알하고자 그곳으로 가다가 문득 소퇴원 마을 사람들의 이목을 꺼려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 가다가 본댁에서 하운동으로 향하시는 상제를 만나 뵈옵고 기뻐하였도다.
형렬은 반기면서 좁은 길에 들어선 것을 아뢰고 “이 길에 들어서 오지 않았더라면 뵈옵지 못하였겠나이다”고 여쭈니라. 상제께서 가라사대 “우리가 서로 동 서로 멀리 나뉘어 있을지라도 반드시 서로 만나리라. 네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나를 좇고 금전과 권세를 얻고자 좇지 아니하는도다. 시속에 있는 망량의 사귐이 좋다고 하는 말은 귀여운 물건을 늘 구하여 주는 연고라. 네가 망량을 사귀려면 진실로 망량을 사귀라”고 이르셨도다. 형렬은 말씀을 듣고 종도들의 틈에 끼어서도 남달리 진정으로 끝까지 상제를 좇았도다. (교운 1장 7절)
상제님께서는 진심으로 따르는 김형렬의 시종을 받으시며 하운동에서 천하 창생을 구제하기 위한 천지공사를 행해 나가셨다. 상제님께서 이 시기에 하신 말씀과 공사로는 1902년 4월 “우리는 개벽하여야 하나니 대개 나의 공사는 옛날에도 지금도 없으며 남의 것을 계승함도 아니요 오직 내가 지어 만드는 것이니라. 나는 삼계의 대권을 주재하여 선천의 도수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무궁한 선운을 열어 낙원을 세우리라”(공사 1장 2절)라는 삼계 개벽 공사에 대한 말씀, 1902년 “명부의 착란에 따라 온 세상이 착란하였으니 명부공사가 종결되면 온 세상일이 해결되느니라”(공사 1장 5절)라고 하시며 행하신 ‘명부공사’, 1902년 “조선명부를 전명숙으로, 청국명부를 김일부로, 일본명부를 최수운으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노라”(공사 1장 7절)라고 하시며 행하신 ‘명부의 책임자를 정하는 공사’ 등이 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진심으로 공사를 받들려 했던 김형렬의 성심을 다시 생각해 보며 다음 목적지인 이선경의 장모가 살았던 집터로 향했다. 산길을 내려와 도로에서 700m 정도만 가면 그 집터가 있는 마을 입구에 도착한다. 그 마을은 도로변에서 보면 잘 눈에 띄지 않는 지형인데,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아늑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전경』 기록에 의하면, 상제님께서는 1902년경 이 마을에 살던 이선경의 장모에게 49일간 매일 공사에 쓰일 떡을 성심으로 찌게 한다. 당시 정성을 들였던 사람은 바로 김형렬의 막내 여동생이자 부안군 성근리 사람인 이환구(李桓九)의 아내인데, 49일간 매일 정성을 들이는 과정에서 한때 심히 괴로워하며 불평을 품기도 하였다. 하지만 상제님의 말씀을 듣고 뉘우친 이후 한결같이 정성을 들여 결국 일을 무사히 마치게 된다.
▲ 이선경 빙모가 살던 집터 추정지(촬영: 2010. 10. 6.)
마을에 있는 경로당에 차를 세우고 이선경 장모가 살았던 집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향했다. 그 장소는 경로당을 지나자마자 보이는 방치된 건물 바로 아래 주변이다. 이 건물은 예전에 동네 사람이 소를 키우기위해 지었던 우사(牛舍)였는데, 현재는 일부가 부서진 채로 방치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60년 전까지만 해도 이 터에 작은 초가집 한 채가 있었는데05, 상제님께서 이 마을에 오시면 항상 우사 건물 아래의 집에 머무시면서 공사를 행하시고 많은 이적을 보이셨다고 한다.06
한편, 이 동네에는 상제님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신기한 일화가 있다. 마을 입구를 조금 지나면 오른쪽으로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상제님께서 이 마을에 머물고 계시던 어느 날 그 나무 밑에 앉으셔서 물을 손에 묻혀서 뿌리시며 비를 내리게 하셨다고 한다.07 상제님의 신비한 행적을 답사지에서 직접 전해 들으니 삼계대권(三界大權)을 주재하시며 천지의 조화(造化)를 자유자재로 행하시는 상제님의 권능을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김형렬이 상제님의 종도가 되어 공사를 받들었던 곳이며, 그의 여동생이 49일간 상제님의 공사에 쓸 떡을 매일 쪘던 일화가 남아있는 하운동. 그곳은 청도리의 어느 한적한 산골 마을이었다. 상제님께서 김형렬과 그의 여동생을 광구천하·광제창생을 위한 대역사인 천지 공사에 쓰셨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순결한 마음으로 천지 공정(天地公庭)에 참여하라”08는 상제님의 말씀처럼 두 사람 모두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진실로 상제님의 공사를 받들려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01 유승상, 「청도리」, 디지털김제문화대전 참고.
02 권지 1장 9절 참고.
04 행록 1장 21절 참고.
05 2019. 9. 20. 마을 주민 김○○(1940년생) 증언.
06 2010. 10. 6. 마을 주민 전○○(1937년생) 증언; 2019. 9. 20. 마을 주민 박○○(195년4생) 증언.
07 2010. 10. 6. 마을 주민 전○○(1937년생) 증언.
08 예시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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