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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 불사의방(邊山 不思議房)

교무부    2017.02.01    읽음 :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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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 불사의방(邊山 不思議房)

 

 

연구위원 장선렬 

  

 


▲ 변산 의상봉 전경

​ 

 

  예로부터 방장산, 두승산(영주산), 변산은 호남의 삼신산(三神山)이라 불러왔다. 그중에서 변산은  『전경』에도 언급된 곳으로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이라 하였다. 변산은 절경이라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선계산(仙溪山)이라 했고, 고려시대에는 현계산(賢戒山)이라 했으며, 호남의 금강산이라 하여 봉래산(蓬萊山)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리었다. 변산은 곳곳마다 산세가 험하고 등산로에 사다리와 로프를 설치할 만큼 초행자는 오르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산마다 특징이 있듯이 지리산이 높고 험준하며 거친 남성적인 산이라면, 변산은 낮으면서도 우아하고 섬세한 여성적인 산이라 할 수 있는데, 가는 곳마다 기암으로 둘러싸여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상제님께서는 변산에 24혈이 있다 하시고 해왕(海王)이라고도 하셨다. 변산은 진표율사가 득도한 ‘불사의방(不思議房)’이 있는 곳이어서 친숙하게 느껴지지만 웬만한 마음을 먹지 않고서는 찾아 나서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불사의방’을 가려고 오래 전부터 답사계획을 세워놓고 기다리다가 날씨가 좋은 날을 잡아 변산으로 출발했다. 

   바다를 가르며 끝없이 펼쳐지는 새만금방조제 위를 달려 부안군 하서면 백련마을에 도착했다. ‘불사의방’은 전북 부안군 변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의상봉(508m)의 남쪽 자락으로 등산코스는 여러 곳이 있지만 가장 짧은 코스를 택하여 등산하기로 했다. 산은 보기에 아름답고 유명한 산일수록 험하다는 말을 이번 산행에서 또다시 느꼈다. 비득치경로당에서 의상봉 공군부대를 통하여 가는 길이 가장 빠르나 사전에 협조공문과 검열 등 여러 단계를 거쳐가야 하므로 일반인은 접근하기 쉽지 않은 코스이다. 그 다음은 부안군 하서면 백련리 백련마을에서 문수제를 거쳐 올라가는 코스로 등산객들이 선호하는 코스는 아니지만 비교적 짧아 이 코스로 가기로 결정했다. 

 


▲ 절벽 위에서 본 불사의방 

 

  저수지 위쪽의 소방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소방도로 중간 중간이 험하게 유실되어 있어 지나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끝나는 지점까지 차를 타고 갈 수 있었다. 도로의 끝지점에서 두 갈래의 길이 나오는데, 골짜기를 따라가는 길은 중간에 길이 유실되어 갈 수 없었다. 다른 길은 오른편 산 능선을 따라 가는 것으로 이 길을 따라 1시간 반 남짓 올라가니 ‘불사의방’이 있는 절벽에 도착하였다. 절벽이 시작하는 지점에서 약 100m쯤 가면 좌측으로 ‘불사의방’ 입구가 나오는데 초행길이면 좀처럼 찾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이번이 두 번째 산행으로 올봄에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가 생각난다. 내심 산행에는 자신 있었지만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오만에 불과했다. 가는 곳마다 절벽으로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공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입구를 찾은 적이 있었다.    

  불사의방이 위치한 의상봉은 의상대사가 지은 의상사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의상봉 자락의 절벽 위에 서서 바라본 전경은 아름답고 장엄하여 올라오면서 힘들었던 생각은 사라지고 온몸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상쾌했다.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절벽 아래로는 천길 낭떠러지였다. 

 

 

▲ 불사의방으로 내려가는 길

 

  어렵게 불사의방으로 가는 입구를 찾아 내려가니 누가 매어놓았는지 몇 개의 밧줄이 절벽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밧줄을 타고 10m가량 내려가니 바위틈 사이에 나무가 자라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밟고 내려가라고 발받침이 되어주었다. 바닥에 다다르니 절벽을 타고 불사의방으로 들어가는 좁은 통로가 나왔다. 좁은 통로 중간에 누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절벽의 바위틈에서 새어나오는 물이 고일 수 있게 바위에 네모나게 작은 홈을 파 둔 것을 볼 수 있었다. 비록 벼랑 끝 바위에서 나오는 적은 양의 물이지만 이곳에서 수도하는 이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이 귀중하게 쓰였을 것이라 생각하니 새삼 선조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간신히 사람 하나 지날 정도의 좁은 통로를 타고 돌아들어가니 깎아지를 듯한 절벽 중간에 폭 3m의 타원형구조로 된 3평 남짓한 공간이 나왔다. ‘불사의방(不思議房)’이 지닌 뜻처럼 ‘마음을 비우고 신에게 올바른 것을 묻는 방’으로 이 낭떠러지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불가사의한 방이었다. 언제 조성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와조각들이 있고 주춧돌로 사용했을 만한 바윗돌이 있었다. 절벽 중간에는 쇠사슬로 묶었던 흔적이 있는 굵기 5cm정도의 사각형 모양의 쇠가 바위에 박혀 있었다. 지금도 주변 마을에서는 불사의방을 ‘다래미절터’ 또는 ‘다람쥐절터’라고 부르는데, 쇠사슬로 집을 달아매었다는 데서 유래된 말인 듯하다.

  이규보가 변산에 작목사라는 벌목 책임자로 왔을 때 ‘불사의방’을 다녀가서 남긴 기록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 높고 험함이 효공의 방장의 만배였고 높이 1백 척쯤 되는 나무사다리가 곧게 절벽에 걸쳐 있었다. 3면이 모두 위험한 골짜기라, 몸을 돌려 계단을 하나씩 딛고 내려와야만 방장에 이를 수가 있다. 한 번만 헛디디면 다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나는 평소에 높이 한 길에 불과한 누대(樓臺)를 오를 때도 두통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아찔하여 굽어볼 수 없던 터인데, 이에 이르러는 더욱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 들어가기도 전에 머리가 벌써 빙 돈다. 그러나 예전부터 이 승적(勝跡)을 익히 들어오다가 이제 다행히 일부러 오게 되었는데, 만일 그 방장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또 진표대사(眞表大師)의 상(像)을 뵙지 못한다면 뒤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그래서 어정어정 기어 내려가는데, 발은 사다리 계단에 있으면서도 금방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들어가서 부싯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향(香)을 피우고 율사(律師)의 진용(眞容)에 예배하였다.

( 『동국이상국집』 제23권 「남행월일기」 )

 

  이규보가 쓴 800년 전의 기록에서 불사의방에 진표율사의 진용이 모셔져 있었던 것을 보면 쇠사슬에 묶여 있던 집은 진표율사께서 득도하신 후에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첩첩산중 깊은 곳에 진표율사께서 홀로 수도를 하시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 주위를 둘러보니 ‘망신참법(亡身懺法)’을 했을 만한 바위가 보이고, 율사께서 뛰어내렸다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니 끝없는 낭떠러지라 현기증이 났다. 

  불사의방에 앉아 전방을 바라보니 인간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미미한 존재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율사께서 수도하시던 이 장소에서 바라본 산천은 변함없건만 주인만 보이지 않으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데없네.”라는 옛시조가 떠올랐다. 진표율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진표전간(眞表傳簡)」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잘 나와 있다. 

  
▲ 불사의방에서 본 전경

 

  진표율사(眞表律師)는 전주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里) 사람이다. 나이 12세에 출가할 뜻을 품으니 아버지가 허락하였다. 금산수(金山藪)의 순제법사(順濟法師)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순제법사가 사미계법(沙彌戒法)을 주고 『전교공양차제비법(傳敎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주면서 말했다. “너는 이 계법(戒法)을 지니고 미륵(彌勒)ㆍ지장(地藏) 두 보살 앞으로 가서 간절히 참회하여 친히 계법(戒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율사는 가르침을 받들어 하직하고 물러나와 두루 명산을 유람하였다.

  나이 이미 27세인 상원(上元) 원년 경자년(760, 통일신라 경덕왕 19)에 쌀 20말을 쪄서 말려 양식을 만든 뒤 보안현(保安縣)으로 가서 변산(邊山)에 있는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갔다. 쌀 5홉으로 하루의 양식을 삼았는데, 그 가운데서 한 홉을 덜어서 쥐를 길렀다. 율사는 미륵상(彌勒像)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戒法)을 구했으나 3년이 되어도 수기(授記)를 얻지 못했다. 이에 발분(發憤)하여 바위 아래에 몸을 던지니, 갑자기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손으로 받들어 돌 위에 올려놓았다. 율사는 다시 지원(志願)을 내어 21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도하여 바위를 두드리며 참회하니, 3일 만에 손과 팔뚝이 부러져 땅에 떨어졌다. 7일이 되던 날 밤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손에 금장(金杖)을 흔들면서 와서 그를 도와주니 손과 팔뚝이 예전처럼 되었다. 보살이 그에게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주니 율사는 그 영응(靈應)에 감동하여 더욱더 정진하였다. 21일이 다 차니 곧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중(兜率天衆)이 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에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의 앞에 나타나니 미륵보살이 율사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잘하는구나, 대장부여! 이처럼 계를 구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참회하는구나.” 지장이 계본(戒本)을 주고, 미륵(彌勒)이 또 목간자(木簡子) 두 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아홉째 간자, 또 하나에는 여덟째 간자라고 씌어 있었다. 

  미륵보살이 율사에게 말하였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뼈이니, 이것은 곧 시  (始)와 본(本)의 두 각(覺)을 이르는 것이다. 또 아홉 번째 간자는 법(法)이며, 여덟 번째 간자는 새로 만들어질 종자(種子)이니, 이것으로써 과보(果報)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이후에 도솔천 (兜率天)에 가서 태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말을 마치고 두 보살은 곧 사라졌는데, 이때가 임인년(762) 4월 27일이었다. 

 

  위 글은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의 내용으로 이 기록은 사주(寺主) 영잠(瑩岑)이 지은 것으로 기미년(1199)에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진표전간」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의 내용이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전반적인 맥락은 같다. 

  


▲ 원효굴

 

  불사의방을 나와 병풍같이 펼쳐진 절벽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보면 절벽이 끝나는 지점에 원효대사께서 수도했다는 자연식 동굴이 있어 찾아가 보았다. 불사의방에 비해 상당히 넓은 동굴로 안에는 맑은 샘물도 나와 족히 4~5명은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였다. 원효대사(617~686)께서 입적하신 후에 진표율사께서 활동을 한 것으로 보면 당시에도 이 동굴은 있었을 것이다. 1년을 기약하고 수도에 들어갔으나 이루지 못하고 3년이란 세월을 벼랑 위에서 눈비를 맞으며 수도를 할 때, 불과 1~2백 미터 떨어진 이곳의 안락한 수도처를 두고 벼랑 끝에서 일심으로 수도에 정진을 했다고 생각하니 산을 내려오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순회보》 1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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