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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성의 사문, 서천교, 용머리고개(용두치)

교무부    2017.03.27    읽음 :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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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성의 사문, 서천교, 용머리고개(용두치)

 

 

 연구원 조규제

   

 

전주성의 사문과 풍남문

 

  완전하고 온전한 고을이라는 의미의 전주는 100여 년 전 상제님께서 활동할 당시 한양을 제외한 조선의 3대 도시 중 하나였다. 조선 제일의 곡창지대에서 나오는 풍부한 물산과 사통팔달로 이어진 교통으로 전주는 조선의 경제를 대표하기에 충분하였다. 이번 답사에서는 그 중에서도 옛날 김제와 정읍에서 전주를 오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풍남문과 서천교 주변의 남문밖 장, 그리고 용머리고개 등을 돌아볼 예정이다.
  여주에서 자동차로 3시간 정도를 달리니 전주로 들어가는 동전주 요금소가 보인다. 요금소를 지나 시내로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는 견훤로라는 표지판이 잊었던 옛 영웅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전주는 후백제의 수도였다. 통일신라가 쇠퇴하자 여러 지역에서 영웅들이 나타났는데 그중 한 사람이 후백제의 견훤이다.
  견훤은 청년시절 무관의 길을 택했고, 892년 무진주(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900년 완산주(지금의 전주성)에 무혈입성하여 도읍을 정하고 나라의 이름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비참하게 몰락한 백제의 부활을 꿈꾸며 그 맥을 잇는다는 뜻을 내세워 백제라고 선포하였다. ‘후백제’라는 이름은 전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역사가들이 붙인 이름이다. 삼한의 통일을 염원했던 견훤은 신라를 공격하고 돌아오는 길에 팔공산에서 왕건을 궁지로 몰아넣을 만큼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아들과의 내분으로 백제의 맥을 이으려던 그의 뜻은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삼국사기』에는 “하늘이 나를 보내면서 어찌하여 왕건이 뒤따르게 하였던고….” 라고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지금의 논산시 연산면에 있던 황산사에서 죽었으며, 무덤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서 전주 땅을 바라보고 있다. 견훤이 죽고 난 뒤 항간에는 “가련토다 완산 애기 애비 잃고 눈물 흘리네.” 라는 노래가 유행하였다고 한다.
  견훤로를 뒤로 하고 조금 더 달리니 풍남문이 눈앞에 나타난다. 풍남문은 옛 전주성의 사문(四門) 중 남문에 해당한다. 풍남문 한쪽에 걸려 있는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이란 현판이 지난날 전주가 호남 제일의 도시였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하지만 과거 번영을 누렸던 풍남문은 이제 둥근 원형의 교차로 가운데 갇혀 있어 세월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풍남문이 이렇듯 사거리의 교차로 안에 갇히게 된 것은 순종 원년인 1907년에 일제에 의한 도시계획의 일환이었다. 이때 성벽과 성문을 철거하면서 풍남문만은 남겨두었다. 그러나 그것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헐리거나 땅에 묻히는 등 옛 모습을 크게 잃었다. 전주시는 1978년부터 3년에 걸쳐 풍남문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그리고 풍남문을 제외한 완동문, 패서문, 공북문 등 세 곳의 문이 있었던 자리에는 빗돌을 세워 그곳에 성문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전주성은 고려 공양왕 원년(1388)에 도관찰사 최유경이 처음 축조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조현명이 성을 개축하고 사문을 쌓았다. 그러나 1767년(영조 43년) 전주에 큰 불이 나서 민가 1천 여 호와 전주성의 문루가 모두 불탔다. 이때 소실된 것을 그 이듬해인 1768년에 전라감사 홍낙인(洪樂仁)이 다시 세우면서 사대문의 이름을 완동문(동), 패서문(서), 풍남문(남), 공북문(북)이라 하였다. 여기서 풍남이란 ‘풍패(豐沛, 지금의 강소성 패현)’의 남쪽이란 뜻이다. 풍패는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의 고향으로 조선왕조 성씨의 고향인 전주를 이에 비유해서 붙인 이름이다.

 



  풍남문은 보물 제308호로 3층 구조의 일반적인 성문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1층은 화강암으로 성벽의 일부를 형성하는 석축기대(石築基臺) 쌓았고, 중앙에는 무지개 형태의 홍예문(虹霓門)을 만들었다. 2층 중앙에 중층 형태의 문루[重層門樓]와 그 좌우에 종각과 포루(砲樓)를 복원하여 지금은 전주를 대표하는 명물 중 하나다. 은은한 조명과 함께 어울리는 풍남문의 야경은 특히 아름다워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전주성 사문(四門)에 대한 『전경』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갑진년 七월에 일진회와 아전의 교쟁이 전주에서 있었도다. 최창권(崔昌權)이란 사람이 전주부 내의 아전을 모아서 일진회를 타도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고자 각 군 각 면으로 통문을 보냈도다. 상제께서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 “어렵게 살아난 것이 또 죽겠으니 그들을 내가 제생하리라.” 하시니라. 상제께서 화정리의 이경오(李京五)를 찾아 돈 七十냥을 청구하시니 그가 돈이 없다고 거절하였도다. 부득이 다른 곳에서 돈 일곱 냥을 구하여 가지시고 “이 돈이 능히 七十냥을 대신하리라.”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는 형렬과 함께 용머리 주막에 돌아오셔서 많은 사람을 청하여 술을 권하여 나누시고 난 후에 종이에 글을 쓰고 그 종이를 여러 쪽으로 찢어 노끈을 꼬아서 그 주막의 문돌쩌귀와 문고리에 연결하여 두시니라. 그날 오후에 아전과 일진회원 사이에 화해가 이룩되니 일진회원들이 사문을 열고 입성하니라. 이 일에 상제께서 소비하신 돈이 엿 냥이었도다. 가라사대 “고인은 바둑 한 점으로써 군병 百만 명을 물리친다 하나 나는 돈 엿 냥으로써 아전과 일진회의 싸움을 말렸느니라.” 하셨도다.
(행록 3장 14절)

 

 

 
  서천교는 풍남문에서 서남쪽 5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서천교는 전주천의 매곡교와 완산교 사이에 설치된 다리이다. 전주천은 임실군 관촌면과 완주군 상관면의 경계를 이루는 슬치(瑟峙)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른다. 북쪽으로 흐르던 전주천의 물이 상관계곡을 지나 전주 8경의 하나인 한벽당(寒碧堂) 절벽에 부딪쳐 소용돌이치면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싸전다리와 매곡교를 지나면서 서천(西川)이 된다. 서천교는 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서천교는 옛날에 전주성에서 김제, 정읍으로 통하는 길목에 해당한다. 전주성에서 서천교를 건너 용머리고개를 지나면 김제, 정읍으로 통한다. 지금의 서천교는 여느 도시의 다리처럼 튼튼한 콘크리트로 건설되어 옛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다. 그리고 100여 년 전 장이 섰던 서천교 옆의 넓은 공터는 주차장으로 변해 옛날 흥성했을 장터의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옛날 전주성의 사대문 밖에는 장이 섰는데, 서문장과 풍남문 남쪽에 열리는 남문장이 그중 컸다.
  지금의 전주시 다가동 우체국과 완산교 사이에 해당하는 서문장에는 약령시장이 함께 개설되었다. 전주의 약령시는 대구약령시와 함께 조선 2대 약령시장의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남문장은 풍남문과 완산교 사이에 해당한다. 이곳 서천교는 남문장에 포함되는 지역이다. 서천교는 전주성의 풍남문 밖의 남문장에서 김제와 정읍을 오가는 길목에 해당하여 매우 번화한 곳이었다.
  서원규의 약국은 이처럼 번화한 서천교 사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상제님께서는 서원규의 약국에서 김병욱의 관액을 풀어주셨다. 1903년 4월부터 남원의 세금을 거두는 관직에 있던 김병욱은 박영효의 혁명사건에 연루되었다. 상제님께서는 관에서 김병욱을 체포하려는 것을 미리 아시고 남원으로 내려가셨다. 숙소 밖에서 김병욱을 불러내어 그동안 수합한 세금을 숙소 주인에게 보관케 하시고, 병욱에게 가죽신 대신 짚신을 신게 하고 그의 선산으로 향하셨다. 상제님께서는 김병욱의 선산 재실(齋室)에서 그와 함께 밤을 새우시고 병욱을 여자가 타는 가마에 태우고 전주 상관(上關)의 좁은 목에 이르러서 병욱으로 하여금 서천교 사거리에 있는 서원규의 약국에 가서 정세를 살피게 하셨다. 전주에서 포교가 남원으로 향하고, 상제님과 본인이 남원을 벗어나온 때가 겨우 한나절 차이밖에 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원규로부터 전해들은 병욱은 상제님의 신이한 능력에 더욱 놀란다.01 그 후 상제님께서는 병욱을 장흥해의 집으로 옮기게 하여 머물게 하셨다. 장흥해의 집에서 머문 지 석달이 지나자 상제님께서는 병욱에게 마음을 놓으라고 하신 후, 그에 대한 관의 혐의도 풀렸다.02

 

▲ 구 서천교(출처, 전북일보, 1967년 6월)

 

 

▲ 현 서천교

 
  전주부성의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성벽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서천교는 처음에 나무와 흙으로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장마 때가 되면 다리 곳곳이 무너져 내리는 등 통행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1803년(순조 3)부터 1832년까지 29년에 걸쳐 기금을 조성하여 1832년에 공사를 착공, 1833년(순조 33) 4월에 돌다리로 건설되었으나 이마저 홍수로 유실되었다. 1854년(철종 5)에 주민들이 다시 가설하였고, 1896년(건양 원년)에 승지 김창석(金昌錫)에 의해 개축되었다. 1932년에 박기순(朴基順)이 기부한 돈으로 나무다리를 세웠는데, 이 때문에 박참판 다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1936년의 대홍수로 서천교는 또다시 유실되었다가 개축 및 보수공사를 거듭하였다.
  현재의 서천교는 1997년에 건립된 다리이다. 그리고 서천교 남쪽 옆에는 다리의 건립을 위해 기금을 조성한 사람들의 이름과 모금 액수, 그리고 서천교의 건립과정을 알 수 있는 서천교사적비(西川橋事蹟碑, 1847년)와 중건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전경』에는 서천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병욱은 서 원규의 약국이 서천교(西川橋) 네거리의 번화한 곳임을 몹시 걱정 근심하였으되 상제께서 나중에 찾아오셔서 병욱에게 근심 말라고 이르시니라. 상제께서 병욱을 데리시고 왕래하시면서 거리에서 병욱의 이름을 높이 부르시니 그는 더욱 당황하여 모골이 송연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여러 사람을 이곳저곳에서 만났으되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도다.(교운1장 13절)

 


용의 전설이 깃든 용머리고개

 

  서천교에서 서남쪽을 바라보면 용머리고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서천교에서 용머리고개까지는 자동차로 2~3분 거리다. 용머리고개는 전주시의 완산동과 평화동 사이에 위치한 고개다. 용머리고개는 전주가 호남의 수도(首都)로 여겨지던 시절 정읍과 김제 등에서 전주로 넘어오는 길목, 다시 말해서 호서출입의 인후(咽喉, 목)에 해당하는 곳으로 한때는 주막과 대장간 등이 즐비하여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지금은 교통과 도시의 발달로 과거의 번화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용머리고개 대장간만이 옛 영화를 추억하며 대를 이어 이곳을 지켜오고 있다.
  용머리고개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주천에서 천년을 자란 용이 승천하려고 전주천의 물을 모조리 삼키며 하늘에 오르려다 천년에 하루가 모자라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는 안타까운 전설이다. 그 때 용이 떨어진 곳이 완산 칠봉이라고 한다. 이와 더불어 전해지는 또 하나의 전설은 고려시대의 명장 강감찬이 전주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해 가뭄이 매우 극심하여 백성들이 몹시 걱정하자 하루는 강감찬(姜邯贊, 948~1031) 장군이 하인을 시켜 “지금 막 전주천을 건너는 초립동(草笠童)이 있을 것이니 가서 데려오라.”고 하였다. 전주천에 가보니 과연 그런 아이가 있어 장군 앞에 데리고 왔다. 그 아이를 보자 강감찬 장군은 “이렇게 가물어도 못 본 체하고 지나가다니 괘씸하다. 당장 비를 내리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호통을 치며 말하였다. 초립동으로 둔갑한 용은 승천하여 비를 내리게 하고는 그만 떨어져 죽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용머리 고개라는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강감찬 장군은 죽은 용을 후히 장사지내 주었다고 한다.
  이렇듯 용머리고개는 승천하지 못한 용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이고, 또한 완산 칠봉의 형세가 용의 형세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용머리고개는 떨어진 용의 목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현재 전주시는 과거 일제 강점기 때 도로의 개설로 잘려진 용의 머리 부분을 복원하여 전주의 기를 살리기 위한 사업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시는 이에 따라 용머리고개 부분에 터널이나 교각, 또는 이 둘의 복합형태의 시설을 설치하여 복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용에 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기 때문일까? 상제님께서는 용머리고개에서 비와 관련된 공사를 보신 적이 있다. 한번은 상제님께서 용두치(龍頭峙)에서 서양으로부터 우사를 불러 비를 내리는 공사를 보셨다. 상제님께서 “금년에 비가 극히 적으리라. 만일 비가 내리지 않으면 천지에 동과혈(冬瓜穴)이 말라 죽으리라. 그러므로 서양으로부터 우사(雨師)를 불러 비를 주게 하리라.”03 하시고는 술상을 차리고 이치복에게 술 두 잔을 주시며 한 잔을 요강에 부으셨다. 그리고 또 어느 해 4월에 보리가 타들어가는 심한 가뭄으로 종도들이 서로 걱정을 나누는 것을 보시고, 상제님께서 전주 용머리고개 김낙범의 집에 들러 거친 보리밥 한 그릇과 된장국 한 그릇을 보고 “빈민의 음식이 이러하니라.” 하시면서 다 잡수셨다. 그러자 갑자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기 시작하더니 큰 비가 내리니 말라죽어가던 보리가 다시 생기를 얻게 되었다.04

 

 
  또한 상제님께서는 용머리고개 주막에서 일진회와 아전의 화해를 이룩하는 공사를 행하셨다. 1905년 2월에 친일단체인 일진회와 아전의 교쟁이 일어났다. 최창권(崔昌權)이란 사람이 전주부내의 아전을 모아 일진회를 타도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상제님께서는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는 “어렵게 살아난 것이 또다시 죽겠으니 그들을 내가 재생하리라.”05 하시면서 일진회와 아전 사이에 화해를 이룩하는 공사를 보셨다. 그날 오후에 아전과 일진회원 사이에 화해가 이룩되어서 일진회원들이 사문을 열고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제생과 관련된 또 다른 일화를 보면 용머리고개에 교자를 타고 다니는 김모라고 하는 앉은뱅이가 있었다. 하루는 그가 상제님을 찾아와서 불편한 다리를 고쳐주시기를 애원하므로 상제님께서는 그의 다리를 펴서 교자를 버리고 걸어가게 하시는 등 제생의 이적을 보여주셨다.06

  

  또 상제께서 용두치(龍頭峙)에 계실 때 하루는 마당에 촛불을 밝히고 “천유 일월지명(天有日月之明) 지유 초목지위(地有草木之爲) 천도 재명고(天道在明故) 인행 어일월(人行於日月) 지도 재위고(地道在爲故) 인생 어초목(人生於草木)”이라 써서 불사르셨도다. 이때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비바람이 크게 일어도 촛불이 요동하지 않았도다. 상제께서 찬명의 서북 하늘의 구름 사이에 별 하나가 반짝이고 동남 하늘에 구름이 흩어져 별이 많이 반짝인다는 복명을 들으시고 “서북(西北)에서 살아날 사람이 적고 동남(東南) 쪽에서 많으리라”고 이르셨도다. (예시 68절)

 <대순회보> 163호

 

 

참고문헌

『전경』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1988.
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웅진출판, 1991.
윤홍길, 『윤홍길의 전주이야기』, 신아출판사, 1999.
신정일,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다음생각, 2012.
<<전북일보>>
전주역사박물관 (http://www.jeonju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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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권지 1장 16절.
04  행록 4장 15절.
05  행록 3장 14절.
06  공사 3장 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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