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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음양신 전주운회(天下陰陽神 全州運回)

교무부    2017.01.23    읽음 :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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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음양신 전주운회(天下陰陽神 全州運回)

전주는 마한시대 이래 호남지방의 거읍

              

 

연구실

 

  상제께서 공사상의 일이나 그 외 여러 가지 사건으로 말미암아 드나드셨던 전주는 노령산맥을 주룡(主龍)으로 하여 완만한 산들이 둘러싸인 한복판에서 북서쪽으로 평야를 향해 뻗어 있으며 전북의 행정, 교육,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전주는 마한(馬韓)이래 호남 지방의 거읍(巨邑)으로 마한의 원산성(圓山城)에서 유래한다. 원(圓)은 (온)의 차음(借音)이어서 백제시대에는 완산(完山)이라 불렀으며, 통일신라시대인 756년(경덕왕 15년)에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라고 고침으로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전주의 지형을 살펴보면 진산(鎭山)은 전주시 북쪽에 높이 솟아 있는 건지산(乾止山)이고 동쪽에는 고덕산(高德山)과 남으로는 남복산(南福山)이 있으며 하연산(河連山)과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옹위하듯 펼쳐져 있다. 하천은 만경강의 상류쪽 지류인 전주천(全州川)과 삼천(三川)이 있는데, 전주천은 남동쪽 노령산맥의 분수계인 임실군 관촌면 슬치에서 발원하여 전주시가를 관통하면서 북동쪽으로 흐르고, 삼천은 정읍, 임실 등 노령 산맥의 서사면에서 발원하여 전주시가의 남서부를 흘러 서신동(西新洞)에서 전주천에 합류한 후 추천(秋川)이 되고, 삼례에서 고산천(高山川)과 합류하여 만경강이 된다.

  상제께서는 전주와 관련하여 「천하음양신 전주운회(天下陰陽神 全州運回) (공사 3장 39절)의 기운을 돌리셨는데 이는 특히 전주의 지형 경관 중 건지산(乾止山)과 곤지산(坤止山)을 두고서 공사를 보시지 않았나 추측된다. 산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乾은 陽이고 坤은 陰을 상징한다고 볼 때 상제께는 음양을 고르는 작업을 운회를 통해 하신 것으로 보인다. 음양이라고 하는 것은 「天下之事 皆是陰陽中有成 萬物之理 皆是陰陽中遂(천지의 일은 모두 음양 가운데 이루어지고 만물의 이치는 모두 음양 가운데 따른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음과 양이 조화하여 정위(正位)를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선천에서는 음양의 기운이 막히고 서로 상극에 지배되어 끊임없이 분열과 쟁투를 조장한 연고로 상제께서는 지기(地氣)를 고르는 공사를 보셨다. 「이제 천하에 물기운이 고갈 하였으니 水氣를 돌리리라」하시고 피란동 안씨의 재실에 가서 우물을 대가지로 한번 저으시고 안내성에게 「음양이 고르지 않으니‥」 (공사 3장 21절) 즉 음양 공사의 목적은 건곤(乾坤)을 바로 세워 선천 세상의 각종 폐단과 원이 가득한 우주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다. 음양의 나아갈 바는 건정곤순 건양곤음(乾定坤順 乾陽坤陰)으로 되어 있으므로 마침 전주에는 건지산(乾止山), 곤지산(坤止山)이 있어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생성할 수 있는 음양의 기운을 지명상 갖고 있다. 따라서 그 지기에 들어있는 정음정양의 기운으로써 전주에 운회의 공사를 보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전주는 상제의 공사에도 쓰였으나 아득한 옛날부터 왕기(王氣)를 띠었던 군왕지(君王地) 였으니 이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아득한 옛날 정감(鄭鑑)이란 철인(哲人)과 이한(李翰)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풍수지리(風水地理)뿐 아니라 세상을 내다보는 밝은 도력(道力)을 지녔었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산천을 두루 편답하다가 전주에 이르러 건지산(乾止山)에 오르게 되었다. 이들은 전주의 비옥하고 조용한 산세를 살피며 세상일과 후세를 논하던 중 이 산내의 산맥에 두곳의 명당이 있다고 동시에 생각하여 관산(觀山)하였는데 두 곳이 다 기막힌 명당이요 장차 왕이 태어날 명당이니 명당자리를 보기는 했으나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다 강산편답을 같이 한터라 후손을 위하여 각기 욕심을 내었으되 말은 못하고 누가 먼저 발복(發福)이 빠른 자리를 쓰느냐 하는 문제에 골몰했다. 이때 이한이 참지 못하고 자기가 먼저 자리 쓰기를 원했다. 서로의 자리가 결정되자 정감이 말하기를 『그대의 후손은 앞으로 오백년 후에 고려국이 망하면 왕조를 이룰 것이나 우리 자손은 천여 년이 지나야 빛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 후 묘를 썻는데 그 폭우가 며칠을 두고 억수같이 퍼붓더니 묘는 흔적 없이 사라져 평지가 되고 이때에 흘러 고인물이 지금의 덕진못(德眞池)이 되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전주 이씨는 건지산에 이한을 모시고 오백년 동안이나 전주에 살았으며 이안두(李安杜)에 이르러 전주땅을 떠났는데 그후 이성계(李成桂)가 이씨 조선을 세운 뒤에도 왕운(王運)을 주게된 조상의 묘를 찾지 못하다가 조선왕조 21대 왕인 영조(英祖)때 조상 대대로 전하여 오던 건지산 기슭의 조상묘를 찾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영조 47년에 조경묘(肇慶廟)를 세워 시조(始祖) 이한의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그러다가 광무 2년(1899)에 건지산 기슭에서 나무꾼이 묘소를 발견함에 따라 왕실은 서둘러 봉분을 모시고 곡담을 쌓아 능묘로써 경묘전(慶墓殿)에 있던 신도비(神道碑)를 옮겨 놓고 비각을 세웠다고 한다.

  우리는 천년종왕기(千年鍾王氣)라고 말한 권근(權根)의 말에서나 「천하음양신 전주운회」라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 속에서 전주에 크나큰 기운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순회보》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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