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无極道場터를 찾아서

교무부    2017.01.25    읽음 : 1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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无極道場터를 찾아서

『도주께서 무극도를 창도하시고 상제를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로 봉안하셨다』

 

 

 

  해방 후 학교가 건립되었으나 지금은 빈 건물만 남아있는 무극도장 자리는 전라북도 구태인(舊泰仁) 도창현(道昌峴) 치마바위 부근에 자리 잡고 있다. 1923년 3월, 도주 조정산께서는 무극도장 건립기공식을 갖고 2년 후인 1925년(乙丑年) 4월 15일 도장의 주요 건물인 영대(靈臺)의 도솔궁을 완공하시는 등 무극대도를 창조하여 종교활동을 펴셨다. 그 구조를 살펴보면 영대는 총48간으로 맨 위층에는 증산 상제님의 영위(靈位)를 모시고 1층과 2층은 집회장으로 사용했으며 내부는 3층이나 외부는 2층으로 되어 있었다. 도솔궁은 내부 4층, 외부 3층의 총 72간짜리 건물로 맨 위층은 33천(天)을 봉안(奉安)한 도솔궁, 3층은 칠성(七星)을 봉안한 칠성전(七星殿), 2층은 육정신(六丁神)과 제대신명(諸大神明)을 봉안한 봉령전(奉靈殿)이라 하였는데, 아래층은 중궁(中宮)이라 하였다. 영대와 도솔궁을 중심으로 각종 회관(會館)과 사무실, 거실, 주방, 창고 등의 건물이 있고 도장주위로 동서남북(東西南北)을 내어 총19동, 240여간의 건물로 목조와가(木造瓦家)에 단청(丹靑)을 한 전통적인 고전형이었다. 공사기간 3년여에 동원된 인원만도 연 12만명, 총 5만여원의 경비가 소요 되었다. (이상「太極眞經」참조) 

  무극도장 뒤편에는 깎아 놓은 듯한 바위가 절벽으로 늘어져 있고, 그 절벽위에는 대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이 바위는 치마바위라고 일컫는다. 또한 도장앞 마당 가운데 보면 상제님께서 이것이 젓샘이라 말씀하신 그 우물자리가 무성한 숲으로 덮혀 있었다. 그 구절을 전경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상제께서 태인 도창현에 있는 우물을 가리켜 「이것이 젖(乳)샘이라고 하시고 일만 이천봉을 응기하여 일만 이천의 도통군자로 창성하리라. 그러나 후천의 도통군자에는 여자가 많으리라」하시고 「상유도창 중유태인 하유대각(上有道昌中有太仁下有大覺)」이라고 말씀하셨도다 』(예시 45절) 그 우물은 지금은 자취만 남아 있으나 상제님의 숨결이 우리 수도인에게 전해오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1936년 4월 총독부가 日本의 전쟁준비로 사상통제를 강행할 때 증상계(甑山系)신도를 민족의식을 고집하는 준민족운동(準民族運動)으로 규정하여 증산계 각 교단에 대한 대폭압령(大暴壓令)을 내렸고, 이에 정읍경찰서에서 무극도장을 경매하여 철거하였다. 

  무극도장 건립의 의미는, 일반 대중이 상제님의 대도(大道)를 닦아나갈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는데 있다. 현재의 대순진리회 수도인들의 지침이 되고 있는 종지 ∙ 신조 ∙ 목적도 이때 선포된 것이다. 또한 1925년 4월 28일 성전준공치성(聖殿竣工致誠)과 영대봉안치성을 올림에 앞서 영대에 상제님의 존호(尊號)를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上帝)로 봉안하여 무극도의 신앙대상으로 밝히고, 치성후 취지문과 강령, 3요체, 도규(道規) 등을 발표하였다. 

  대진연합회에서 두 차례 찾아간 성지순례시에 무극도장터에선 빈 학교건물 뒤로 치마바위 등을 볼 수 있었으며 멀지 않은 곳의 관왕묘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순회보》 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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