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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山寺(금산사)

교무부    2017.01.25    읽음 :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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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山寺(금산사) Ⅰ



     전국대학 대진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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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님의 강세와 종통계승의 의미가 담긴 곳 -

    

  금산사(金山寺)는 전북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도립공원 모악산(794m) 서편 기슭의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금산사 창건에 관한 설화는 구구하므로 현존하는 자료로써 금산사의 창건시기와 창건주를 분명히 알기는 어렵지만, 문헌상으로 볼 때 진표율사가 출가하기 이전 경덕왕 때에 이미 창건되어 있었고, 또 금산사가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는 진표가 중창을 이룩한 혜공왕(서기 765-779) 이후로 보여 진다. 다시 후백제왕 견훤이 자복(自福)사찰로 3창하면서 크게 세력을 떨쳤다.

  금산사를 중창한 진표율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금산사와 멀지 않은 만경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12세에 금산사의 숭제법사에게 가서 중이 되었고 그 후 금산사를 떠나 선계산 불사의암에서 참회법을 닦아 미륵과 지장 두 보살로부터 계법을 받았다. 다시 금산사로 돌아온 진표는 불사중창을 시작했는데 이 때의 상황을 (본원루석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표는 교법을 받고 금산사를 창건하기 위해 산을 내려왔다. 대연율에 이르렀을 때 용왕이 나타나 옥가사를 바쳤다. 그는 용왕이 거느린 8만권속의 호위를 받으며 금산사에 이르렀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며칠 만에 절이 완성되었다』, 이처럼 용왕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되어있는 이 기록에 비해 못의 용을 쫓아내고 금산사를 이룩했다는 다음과 같은 설화도 있다. 『모악산 남쪽에 있는 금산사는 본래 그 터가 용이 살던 곳으로서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신라 때 조사가 여러 만석의 소금으로 메워서 용을 쫓아내고 터를 닦아 그 자리에 대전을 세웠다고 한다. 대전 네 모퉁이 뜰아래서 가느다란 간수가 주위를 돌아 나온다』

  위의 두 설화의 공통점은 금산사가 세워진 터전이 못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통도사나 해인사 등의 창건설화와 비슷한 내용으로서 진표가 금산사를 중창할 때 못을 메워 터전을 넓혔던 것으로 생각된다. 진표가 미륵으로부터 계법을 전해 받은 762년부터 시작된 중창불사는 4년 후인 776년에 끝났는데 이 때 진표는 미륵장육상을 조성하여 주존으로 모셨고 금당의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그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려 모시기도 했다. 

  국보 제 62호인 미륵전은 신라 법상종 시대에 미륵본존을 봉안한 절의 중심건물인 금당(金堂)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혜공왕 2년(766) 진표율사가 미륵불의 수기(授記)를 받고 비로소 중창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 미륵전은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현존건물은 선조30년(1577) 정유병화(丁酉兵火)로 소실되었다가 인조13년(1635) 수문대사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그 후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이 미륵전은 외관 3층으로 된 우리나라 유일한 법당이며 내부는 층층으로 되어있다. 1층은 대자대비(大慈大悲), 2층은 용화문회(龍華文會), 3층은 미륵전(彌勒殿)이라 했다.

  금산사 미륵불은 그동안 세 번의 변화를 거쳤다. 첫째는 진표율사가 금불(金佛)로써 33자 높이로 창건한 이후 1568년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01년 수문대사에 의해 36자 높이의 목불로써 다시 재건되었다가 1934년 원인모를 불로 인하여 미륵전 주불이 소실된 것을 성열대사가 39자 높이의 석고불로 조성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다음호에서는 금산사의 유래 및 변천과정에 이어   대장전과 대적광전, 석련대에 대하여 알아보고 또 『전경』과 관련하여 금산사가 상제님의 공사에서 지니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계속)

《대순회보》 25호

 

금산사(金山寺) Ⅱ

 

 

  지난호에서는 금산사(金山寺)의 유래 및 변천, 미륵불의 변화에 대하여 소개했었다. 

  이번호에서는 대장전과 대적광전, 석련대에 대하여 알아보고 또 『전경』과 관련하여 금산사가 상제님의 공사에서 지니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대장전」에 대하여 보면 공사 2장 11절에 『상제께서는 약방에 갖추어 둔 모든 물목을 기록하여 공우와 광찬에게 주고 가라사대 「이 물목기를 금산사에 가지고 가서 그 곳에 봉안한 석가불상을 향하여 그 불상을 업어다 마당 서쪽에 옮겨 세우리라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면서 불사르라」하시니 두 사람이 금산사에 가서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이로부터 몇 해 지난 후에 금산사를 중수할 때 석가불전을 마당 서쪽에 옮겨 세우니 미륵전 앞이 넓어지느니라. 이 불전이 오늘날의 대장전이로다.』라고 나와 있는데 <금산사 사적기>에 의하면 본래 대장전은 미륵전의 정중 우측에 위치하여 미륵전을 장엄하게 하는 정중(庭中) 목탑이었다. 당내에는 석가모니 불과 가섭 아난의 제자상을 봉안했다. 또 금산사에는 다른 절에서는 보기 힘든 「대적광전」이 있었다. 여기에는 법보화삼신불(法報化三身佛)과 아미타불, 약사여래불과 6보살 그리고 500나한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5여래 6보살 500나한은 불법을 대표한다 할 수 있다. 이 대적광전은 86년 12월 원인모를 불로 소실되었다. 그 외에도 불상을 봉안하는 대상으로 대적광전 동남쪽 약 10m에 자리잡고 있는 「석련대」가 있다. 석련대는 석존연화대의 준말이다. <한국의 사찰 11, 금산사>에 의하면 이 연화좌의 본래 위치는 고증할 길이 없으나 높이 1.67m, 둘레 10m가 넘는 거대한 크기였다는 점과 중앙부가 방형공(方形孔)인 것으로 보아 거대한 입불(立佛)을 봉안하기 위한 연화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뒷받침하듯 진표율사가 미륵전의 주불(主佛)을 받칠 목적으로 만들었으나 하늘의 계시로 연화대 대신에 솥을 받혔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 금산사와 미륵불에 대하여 흡사하시며 『양미간에 둥근 백호주(白濠珠)가 있고 왼 손바닥에 임(壬)자와 오른 손바닥에 무(戊)자가 있음을 종도들이 보았도다.』(행록 2장 16절), 『상제께서 가라사대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너라」고 하셨도다.』(행록 5장 29절) 『전경』에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여러구절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상제께서 어느날에 가라사대 「내가 곧 미륵이라. 금산사 육장금신은 여의주를 손에 받았으되 나는 입에 물었노라」고 하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아래 입술을 내어 보이시니 거기에 붉은 점이 있고 상제의 용안은 금산사의 미륵금신과… 』(행록 5장 29절), 『상제께서 어느 날 김형렬에게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 없이 저질러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하다가 이 동토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 삼층전 미륵금불에 이르러 삼십년을 지내다가 최제우에게 제세대도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년에 강세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교운 1장 9절), 『또 상제께서는 때로 금산사의 금불을 양산도(兩山道)라고 이름하시고 세속에 있는 말의 양산도에 비유하기도 하셨도다』(교운 1장 9절), 『금산사에 상제를 따라갔을때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천황 지황 인황 후 천하지 대금산 모악산하에 금불이 능언하고 육장 금불이 화위전녀(化爲全女)라. 「만국활계남조선 청풍명월금산사 문명개화삼천국 도술운통구만리」라 외어주셨도다』(예시 14절), 이상의 『전경』구절에서 금산사는 상제님 강세와 종통의 의미가 깃들여 있는 절임을 알 수 있다. 

《대순회보》 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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