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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동묘(萬東廟)

교무부    2017.01.25    읽음 : 1277


본문

<편집자 주>

 

  은혜를 입었으면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중국의 은혜를 많이 받아 왔다. 특히 두 나라의 관계는 조선이 건국되면서부터 긴밀해져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큰 시련이 있을 때마다 명나라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명나라가 청국에 의해 멸망되었으나 우리나라는 명나라에 대한 보답으로 많은 비와 제단을 세우고 제향하였다. 그 중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의 만동묘는 명나라에 대한 춘추대의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혼란한 세상을 바르게 하기위한 황극신이 옮겨 오게 되는 인연처이다. 따라서 이번호와 다음호에 걸쳐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적 관계를 간략히 살펴보고 「만동묘 」를 중심으로 숭명보은사상이 전개되는 과정과 의의를 고찰코자 한다. 

 

만동묘(萬東廟)

 

황극신을 옮겨온 인연처

報恩의 깊은 의미 기려

 

 

하종필<연구위원>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 

  예로부터 동질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한국과 중국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측면에서 많은 교류를 가져 왔었다. 과거를 돌아볼 때 우리나라의 대중국 관계는 독립적 주권국가였다기 보다 중국의 흥망성쇠에 따라 영향을 받는 복속국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이 강성해지면 우리나라는 저들의 빈번한 침략을 당하여야 했고 조공을 바쳐 군신의 예를 다하여야 했다. 특히 정치적인 면뿐만이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도 종속되어야 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와 중국과의 관계가 심각한 경지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중국의 많은 문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영향뿐만이 아니라 사상(유교, 불교, 도교 등) 기술(역학, 역서, 의학, 농공업 등) 제도(학제, 법제, 예제, 병제 등)등이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오랜 기간동안 교류를 맺어 왔으니 여러 가지 면에서 동질성이 많은 것이다.

 

숭명사조(崇明思潮)의 등장

  명나라에 대한 모화사조는 14세기말경 중국 남방에 흥기한 정통중국민족인 한족(漢族)이 원나라를 물리치고 대명제국을 건립하면서 시작된다. 그동안 원나라의 폭압에 견디다 못해 강화로 천도까지 했던 고려였지만 다행히 명나라가 원세력을 꺾어 버리자 일부 친원파를 제외한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숭명배원(崇明拜元)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는 북방의 오랑캐 민족에 대한 거부반응과 함께 한민족에 대한 친화감내지 존화양이사상에 의한 작용이었다.

 

조선의 건국과 중화의식의 발생

  태조 이성계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주장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한 후 조선왕조를 건립함에 있어서 대내적으로는 고려백성을 통치하기 위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얻고 대외적으로는 국제 정치사회에서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명나라의 승인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이소사대(以小事大)의 외교정책을 취하니 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 高皇帝)는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지어주고 국가적 독립을 확인해 주니 조선은 수백년간의 원세력 하에서 벗어나 호복(胡服)등 제반 호제(胡制)를 철폐하고 명나라의 중화제도(中華制度)를 도입하여 소중화(小中華)의 문화민족으로 자부하게 되었다. 이는 항상 외세로부터 침략을 받아 신음해왔던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조선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큰 의의를 갖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병자호란과 북벌계획

  임진왜란으로 조선, 명, 일본 등이 기진맥진해 있는 틈을 타서 만주에서는 새로운 신흥세력이 일어났다. 여진족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약 20년 후(광해군 8년 병진)에 후금국을 세운 것이다. 약 10년이 지난 정유년(인조 5년)과 다시 10년이 지난 병자년(인조 14년) 12월 청 태종이 청 ∙ 몽 연합 13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조선에 침입하니 당시 인조 대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인조대왕은 45일간을 버티다가 마침내 정축년 정월 그믐날 왕복을 호복으로 바꿔 입고 임시로 만든 구층토단(九層土壇)인 수강대(受降臺)위에 앉아 있는 청나라 황제 앞에 삼배구고(三拜九叩)라는 만주식 최고 예절을 갖추고 항복문을 바쳐야 했다. 이로 말미암아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인질로 끌려갔으며 그동안 화친관계를 유지했던 명나라조차 청군에 멸망되고 의종황제(毅宗皇帝)는 황후와 함께 스스로 목매 순사하였으니 청군에 대한 원망은 고조되어 의종 황제는 만국제왕(萬國帝王)의 표본으로 숭앙되었다.

  병자호란을 직접 겪고 또 심양에 8년간 인질로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당한 효종(孝宗)은 명국 유민의 내응(內應)을 받아 조명합작으로 멸청복명(滅淸復明)할 밀계(密計)를 품고 심양에 계류 중인 아홉 명의 의사(九義士)와 같이 귀국한 후 어의궁(於義宮 - 현 종로 5가와 연지동 1번지 근처)옆에 주거했으며, 왕위에 등극한 후에는 송 우암(송시열), 이 매죽헌 등 제신(諸臣)과 임란 때 입은 명국에 대한 은혜에 보답하고 남한산성에서의 치욕을 설욕하겠다는 결의로 북벌대계를 추진하다가 재위 십년 만에 승계하니 그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북벌 계획은 이후로도 군신지간에 계속 거론되어 오다가 거사 한 번 못해보고 영원히 매장되었다. 비록 좌절은 되었지만 비단 위정자의 정책적 입안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당시의 지식층인 유림과 일반 국민도 지지하였던 국민의 염원이었으며 후에 북벌계획은 추모제향(追慕祭享)으로 변형되었다.

 

숭명보은(崇明報恩)과 만동묘(萬東廟)

  임진란이 끝난 직후 조선 조정에서는 자국을 구원하기 위해 명국에서 왔다가 순절한 사람이나 공이 있는 사람들의 노고에 대한 보은으로 망일사은비(望日思恩碑 - 공주), 거사비(去思碑 - 현재 서울 명지대학교와 대신고등학교 교정에 있음), 종덕비(種德碑), 민충단(愍忠壇), 선무사(宣武祠), 무열사(武烈祠) 등을 건립하여 한말까지 300년간 치제(致祭)하여 오다가 왜적의 침략으로 철폐되었다.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 북벌계획을 쉽사리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숙종은 갑신년(숙종 30년)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그 후 역대 국왕이 200년간 국가적 최고 의절(儀節)인 사천지례(祠天之禮)의 대사(大祠)로 명나라의 태조, 신종, 의종 세 황제에게 친향(親享)하였다. 또 우암선생과 당대 유학가의 숭명보은사상의 일환으로 당시의 청주(현재의 충북 괴산군 화양동)에 만동묘(萬東廟)와 경기도 가평에 조종암(朝宗巖) 대통단(大統壇)이 건립되었다.

  만동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효종대왕의 승계로 은거(隱居)하게 되면서 현종대왕 15년 갑인(1674년)에 화양동 중간계곡 암석 서편에 의종황제 어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 -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 선생이 북경에서 구해옴)」과 선조대왕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을 조각하고 이후 신종, 의종의 묘를 세워 봉제(奉祭)할 계획을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우암이 죽을 때 제자 권상하(權尙夏)에게 유명을 내리게 된다.

  그 후 15년이 경과한 숙종 29년 계미년(1703)에 권상하, 정호(鄭湖), 민정중 등이 우암선생의 유명을 따라 묘를 건립하고 매년 춘추 2회씩 봉제하였다. 이처럼 유학자들의 춘추대의(春秋大義)의 표상이며 예의동방의 상징처로써 숭앙되다가 대원군이 실각한 후 만동묘는 이항로, 최익현 등의 항소로 10년만에 다시 중수복건(重修復建)되고 국비로 치제하다가 일제통치로 철폐되었다. 후에 유림이 존화계(尊華界)를 조직하여 자비로 봉사하였으나 일제의 압박으로 중단되었으며 8. 15광복 후에는 유지설단행사(遺址設壇行祠)를 기획하였다. 

《대순회보》​ 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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