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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반구정(伴鷗亭)을 다녀와서

교무부    2017.02.01    읽음 :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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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송상범 

   

 4월 8일 여주본부도장 교무부에서 2박 3일 일정으로 도주님 관련 답사지로 향했다. 일행은 경남 함안군에 들어와서 반구정의 근처 마을 어귀에 도착하여 도주님께서 공부하신 곳으로 이동했다.  

저 멀리 나지막한 산등성이가 보였는데, 가는 길이 콘크리트로 잘 닦여 있어 발걸음이 한결 편했다. 고갯마루에 다다라서 다시 아래로 내려갔는데, 산 중턱에서 진달래가 반기듯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고갯마루가 나오고, 굽이굽이 아래 길로 내려가니 멀리 강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고, 기와집과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한 40분쯤 걸어서 도착해보니 눈앞에 반구정이란 현판이 붙은 기와 건물이 서 있었다. 맞은 편에는 일행을 다 품을 만큼이나 큰 느티나무가 묵묵히 서 있고, 그 아래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마침, 연세가 지긋한 어른 한 분이 마당에 서 있었다. 함안조씨(咸安趙氏) 두암공파(斗巖公派) 후손으로 반구정을 관리하고 있는 조성도란 분인데, 반구정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이곳은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333번지입니다. 그리고 풍수지리학적으로 볼 때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좌청룡 우백호의 지형으로 명당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릴 때 문중어른(도주님)께서 이곳에서 공부하셨다는 것을 저의 숙모께 직접 들어서 알고 있어요.” 

   

조선 전기 문신이신 조려(趙旅, 1420~1489, 생육신)의 현손 조방(趙), 1557~1638, 호는 두암)은 임진왜란 때, 화왕산성에 진을 치고 홍의장군 곽재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임란 후에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말바위에 반구정을 짓고, 강 맞은편에 곽재우 장군이 창암정(滄巖亭)을 지어 서로 교류가 두터웠다고 한다. 

두암공은 전공을 세웠지만, 벼슬을 하지 않았다.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을 무찌른 공을 고을 선비들이 모여 추대하려고 상소장을 써서 의논했다. 그는 큰아들을 보내 그 상소장을 빼앗아 불태우면서 “신하가 나라를 위하고 자식이 어버이를 받드는 것은 사람의 떳떳한 이치이거늘 어찌 스스로 자랑 할 일이리오. 내 죽은 뒤라도 혹 이런 일이 있거든 너희들이 일체 금지시켜 지하에까지 수치를 끼치지 말라.”고 했다. 벼슬에 대한 욕심은 추호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여생을 반구정에서 마감했다고 전한다. 

현재의 반구정은 두암공의 후손들이 170년 전 함안군 칠서면 용성리 ‘창녕 낙동대교’ 부근의 말바위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그때만 하더라도 비가 좀 왔다 하면 홍수가 나서 물이 스며들고, 지탱이 잘 안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두암공의 산소는 이 산 고개 너머 양지에 있고, 재실은 4km 정도 거리의 대사리에 있다. 이러한 두암공의 11대손이 도주님의 할아버지이다. 바로 홍문관 정자를 지낸 조영규 되시는 분이신데, 도주님께서는 이러한 가풍(家風) 속에서 성장하신 것이다. 

두암공의 시(詩)가 아직도 그대로 전해져 반구정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事親當盡孝(어버이를 섬김에 마땅히 효를 다하고)  

爲國亦當忠(나라를 위해서는 마땅히 충이라.)  

嗟我俱無及(슬프다 이내몸은 모두 미치지 못하였으니)  

江湖恨不窮(세상에 한이 끝이 없도다.)  

   

20년 전에는 반구정까지 들어오는 이런 도로가 없었다고 한다. 산허리에 조그마한 오솔길이 있어서 다녔는데, 그동안 사람의 발길이 없어 숲이 우거져 새가 아니면 올 수 없었다. 그래서 10년 전에 조성도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길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반구정은 짝 반(伴), 갈매기 구(鷗), 정자 정(亭), ‘갈매기와 짝을 이루어 여생을 살고 싶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자연을 좋아하며, 자연과 더불어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맞은편 커다란 느티나무는 수령이 650년이 넘었고, 높이는 15m, 둘레는 6m이다. 이미 전국의 고목을 관리하고 있는 산림청 관계자들에게 정평이 나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느티나무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나무 위치 또한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나무 가까이 가보니 긴 세월을 함께 한 영험함이 풍기는 듯 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나무가 사람의 말을 20가지 정도 알아듣는다 하니, 예사로 생각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일행과 함께 단체사진을 찍고 나서 반구정에 가까이 가서 내부를 살펴보았다. 도주님께서 이곳에서 공부하시고 도수를 보셨다고 생각을 하니 저절로 몸과 마음이 엄숙하고 경건해졌다.  

반구정에 관련된 『전경』구절은 다음과 같다. 

   

도주께서 경신년에 재실에서 밤낮으로 불면 불식하면서 공부하시던 중 二월 열이레에 둔궤가 봉안된 곳에서 벼락소리가 나더니 둔궤가 저절로 열려져 있었도다? 그 속에 호피 한장과 반쯤 핀 국화 한 송이가 그려있고 양피(羊血) 스물넉점이 궤에 찍혀있고 오강록(烏江錄) 팔문둔갑(八門遁甲) 설문(舌門)이란 글자가 궤에 쓰여 있었도다? 그 후 둔궤는 도주께서 함안 반구정(伴鷗亭)에서 공부하실 때 그곳에 옮겨졌도다? 그러나 당시 심복자이던 창원 사람 조 주일(曺周一)이 둔궤를 훔쳐 갔는데 훗날에 종도들이 이를 알고 매우 안타까워하니 도주께서 “그 시기의 도수에 쓰였으면 족하니라? 둔궤의 둔자는 도망 둔자이도다”고 그들에게 이르셨도다? (교운 2장 20절) 

   

갑자년 여름에 도주께서 배 문걸을 데리고 밀양 종남산 영성정(靈聖亭)에 이르러 폐백도수(幣帛度數)를 밤 열 시부터 다음날 아침 여섯 시까지 다섯 달 계속하시고 다시 함안 반구정으로 옮겨 마치셨도다?  (교운 2장 30절) 

   

상제님의 유품이었던 둔궤에서 나온 여러 가지 그림과 글의 의미를 해석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도주님을 상징하는 종통의 의미가 아닐까? 후에 도전님께서 중곡동에 계실 때 임원들과 이 둔궤를 다시 찾아오셔서 ‘성궤’로 이름을 고치시고 치성을 모셨다고 한다.  

반구정이 위치한 곳은 용화산(龍華山)이라고 불리는데, 이 산의 이름을 들으니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용화세상이 떠올랐다. 아마도 도주님께서 후천선경을 여시기 위해 이곳에서 공부하시고 도수(度數)를 보신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폐백은 보통 예물을 의미하는데, 예물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기 때문에 보은(報恩)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상제님의 해원상생 대도의 진리를 도주님께서 밝히시고, 보은상생으로 양대진리를 이루신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겨보았다. 

   

느티나무 저편으로 남지철교가 보였다. 남지철교는 일제 때 물품수송을 위해 만든 철다리이다. 철교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채지가』 속에 나오는 “…남해남지 지남지 대강철교 높았구나…, 이다리는 뉘다린고 정산도의 놋다리라 의심말고 어서가자 일심으로 건너가자…”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반구정에 와서 도주님께서 공부하신 곳을 눈으로 확인하니 정말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혼란스러웠던 일제강점기에도 불구하고 도주님께서 천하창생을 위해 공부하시고 도수를 보셨다. 이러한 도주님의 구제창생 정신을 마음속에 되새기고, 유일무이한 법방에 어긋남이 없도록 덕화에 손상이 없는 수도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대순회보》 1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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