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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海印寺)에 올라 …

교무부    2017.02.01    읽음 :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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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위원 박인규 

 

  도주께서 해인사에서 돌아오신 다음날에 여러 종도들을 모아놓고 “상제께서 해인을 인패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여 어떤 물체로 생각함은 그릇된 생각이니라. 해인은 먼 데 있지 않고 자기 장중(掌中)에 있느니라. …” 

 

  도주께서 다음 달에 박 한경(朴漢慶)과 김 용화(金容和)·김 해구(金海九)·오 치국(吳治國)·류 철규(柳喆珪)·이 윤섭(李允燮)·류 한규(柳漢珪)·김 영하(金永河)·오 영식(吳永植) 등을 데리시고 해인사(海印寺) 경내에 있는 관음전(觀音殿)이자 심검당(尋劒堂) 뒤편의 다로경권(茶爐經卷)에서 사흘 동안 공부를 하셨도다. 그러나 공부에 관한 말씀은 없으시고 “사명당(四溟堂)의 입적실에 가서 불공이나 드리고 가리라” 말씀하시니 박 한경과 그 외 세 사람이 먼저 그곳을 돌아보고 와서 가시기를 청하니 “너희들이 다녀왔으면 되었다”고 말씀하시고 근처에 있는 백련암과 그 외 여러 암자를 돌아보시고 길에 오르셨도다. 도주께서 해인사에서 돌아오신 다음날에 여러 종도들을 모아놓고 “상제께서 해인을 인패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여 어떤 물체로 생각함은 그릇된 생각이니라. 해인은 먼 데 있지 않고 자기 장중(掌中)에 있느니라. 우주 삼라 만상의 모든 이치의 근원이 바다에 있으므로 해인이요, 해도 진인(海島眞人)이란 말이 있느니라. 바닷물을 보라. 전부 전기이니라. 물은 흘러 내려가나 오르는 성품을 갖고 있느니라. 삼라 만상의 근원이 수기를 흡수하여 생장하느니라. 하늘은 삼십 육천(三十六天)이 있어 상제께서 통솔하시며 전기를 맡으셔서 천지 만물을 지배 자양하시니 뇌성 보화 천존 상제(雷聲普化天尊上帝)이시니라. 천상의 전기가 바닷물에 있었으니 바닷물의 전기로써 만물을 포장하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교운 2장 54~55절) 

  벚꽃이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봄날 아침 도주님께서 공부하셨던 해인사로 출발하였다. 해인사는 199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제463호)인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어 유명한 곳이다. 우리에게는 도주님께서 갑오년(1954년) 가을에 오셔서 사흘 동안 공부하셨던 곳이기에 더욱더 의미가 남다른 곳이기도 하다. 해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의 본사로 75개의 말사와 14개의 부속암자를 관리하고 있다. 통도사·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삼보(三寶 : 佛寶·法寶·僧寶)사찰 중 하나이며 고려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어 법보사찰이라고도 한다.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伽倻山)은 우두산(牛頭山), 설산(雪山)으로도 불리며 한재, 수재, 전쟁의 삼재가 들지 않는다는 명산이다. 가야라는 말은 우리말의 가람, 강에서 비롯된 이름이거나 석가모니께서 수행하신 인도의 붓다가야에 있는 가야산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도 한다.  

  해인사는 『가야산해인사고적』에 따르면 800년경에 순응과 이정 두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 기록에 의하면 중국의 양(梁)나라 때, 보지공(寶誌公)이 임종할 때 『답산기(踏山記)』를 제자들에게 주면서 유언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신라의 두 스님이 와서 법을 구할 것이니 그때 그들에게 이 책을 전해 주라.”고 하였다. 그 뒤에 과연 신라의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중국에 가서 법을 구하자, 보지공의 제자가 『답산기(踏山記)』를 내어 주면서 공이 임종할 때에 하던 말을 전하였다. 두 스님이 그 말을 듣고 공의 묘소를 찾아가서 “사람은 고금이 있거니와 법에야 어찌 앞뒤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밤낮 이레 동안을 선정에 들어 법을 청하였다. 어느 날 묘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공이 나와서 법을 설하고 의발과 신발을 전해주면서 말하기를 “너희 나라 우두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 그곳을 찾고 해인사를 세우라.”하고는 다시 묘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 귀국하여 두 스님은 지금의 해인사 터에 초당을 짓고 선정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願堂)을 짓고 정사(政事)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였다.  

  해인사에 이르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일주문이었다. 일주문을 지나 봉황문에 이르는 길 양 옆에는 수백 년 된 고목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그 나무들은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봉황문 다음 해탈문을 지나서 올라가면 마당에 의상대사의 법계도 모양으로 돌이 깔려 있다. 법계도는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가서 지엄대사에게 화엄경을 수학하고 그 오묘한 진리를 통한 후 668년에 이를 총 210자 7언 30구의 송으로 축약한 글인데, 54각이 있는 도인(圖印)으로 만든 것이다. 법계도는 일명 해인도(海印圖) 또는 법계도장(法界圖章)이라고도 불린다. 위쪽 계단으로 오르니 전면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대적광전이 보이고 오른쪽에 관음전(觀音殿)이자 심검당(尋劍堂)이 위치하고 있다. 그 뒤에는 도주님께서 공부하셨던 다로경권실이 있었다. 출입할 수 없어서 위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내려다보았는데 지금은 현판을 바꾸고 다른 용도로 쓰고 있었다. 떼어낸 현판은 따로 보관하고 있었는데 스님에게 물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해인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으로 서가여래 부처 대신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으므로 대웅전이 아닌 대적광전(大寂光展)이 있다. 대적광전 뒤로 가파른 계단으로 올라가면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국보 52호 장경판전이 있다. 이 건물의 과학적 설계는 770여 년의 시간 동안 팔만대장경을 단 한 판의 손상도 없이 보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적당한 환기와 온도·습도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팔만대장경을 만들 당시 우리나라는 몽고의 침입으로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몽고군에 대항하던 시점이었다. 그 당시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민중들의 부처에 대한 열렬한 신앙심이 느껴졌다. 팔만대장경의 제작은 불심의 힘이 나라를 구할 것이라는 믿음과 불경을 만드는데 참여하여 공덕을 쌓는다는 개념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정성으로 제작되었고 부처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이라 불법의 수호신명들이 보호하셔서인지 장경판전 건립 이후 일본의 끈질긴 침입이나 전쟁에도 화를 당하지 않았으며, 여섯 차례에 걸친 해인사 내의 큰 화재에 다른 건물은 소실되곤 하였으나 이곳은 단 한번도 화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장경판전 맞은편에 보이는 산이 매화산(埋火山)이다. 한 스님에게 매화산에 대해 물어보니 매년 단옷날 여러 스님들이 소금을 지고 올라가 매화산에 묻는다고 하였다. 해인사 주변의 산들이 풍수상 화기를 띠는 산이라 그 화기로 인한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바닷물의 기운을 지닌 소금을 묻는다는 것이다. 이 행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기록은 없으나 소금을 묻은 뒤로는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기에 반드시 치르는 중요한 행사라고 한다.  

  장경판전을 돌아나오면 최치원 선생이 공부하였다는 학사대(學士臺)가 있다. 당시 최치원이 땅에 거꾸로 꽂았다는 전나무 지팡이가 지금까지 살아 굉장한 크기로 자라 있었다. 해인사는 오랜 역사만큼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불교의 승려 외에도 고려 태조, 조선 태조, 세조, 덕종, 숙종 등의 임금과 신라의 최치원, 조선의 김정희 등의 기록이 있었다. 그만큼 해인사는 많은 사람들을 찾아오게 하는 신령스러운 힘이 있는 곳이다. 

  특히 조선 말에는 해인사와 관련해서 민중에는 하나의 신앙이 형성되어 있었다. 해인 설화라 지칭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강아지 한 마리가 찾아왔는데, 노부부는 그 강아지를 아끼며 3년 동안 잘 길렀다. 그런데 갑자기 강아지가 사라지고 준수한 청년이 찾아왔다. 청년은 자신은 본래 용왕국의 태자였는데 죄를 지어 강아지의 몸으로 벌을 받다 노부부의 도움으로 죄를 벗을 수 있게 되었다며 용궁으로 초청하였다. 노부부는 청년을 따라 용궁에 들어가서 용왕의 대접을 받고 돌아가려고 하였다. 태자는 노부부에게 용왕이 어떤 선물이든 원하는 것을 줄 터이니 말하라고 할 때 용왕이 쓰는 도장(해인)을 갖고 싶다고 하라 하였다. 용왕은 약속한 지라 어쩔 수 없이 해인을 주었고 노부부는 그 도장을 가지고 인간세상으로 돌아왔다. 노부부는 처음에 해인의 사용법을 몰랐는데 우연히 글자 쓴 종이에 해인을 찍으면 해당되는 물건이 나타남을 알고 곡식과 집을 해인을 통해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던 스님이 속세에 있으면 안 되는 물건이 있는 것 같다며 부처님께 올리라고 하여 노부부는 해인을 스님에게 주었다. 스님은 해인으로 하루아침에 해인사를 지었고 죽기 전 팔만대장경을 모셔 놓은 장경각에 해인을 숨겨 놓았다.  

그 후 조선시대 말기 흥선대원군이 부친의 묘소를 이장할 때 정만인이라는 풍수가가 묘자리를 잡아주면서 자손 가운데 두 명의 황제가 나올 것이니 그때 자기의 소원도 한 가지 들어달라고 하였다. 묘소 이장 후 고종이 왕이 되자 흥선대원군은 약속을 지키려고 정만인을 불러 소원을 물었다. 정만인은 자신은 중이므로 다만 팔만대장경을 살펴보는 것이라 하였다. 정만인은 해인사에 가자 곧바로 장경각으로 향하여 혼자 들어가서 며칠 동안 뭔가를 찾더니만 어느 날 얼굴에 웃음을 띠고 나왔다. 그 뒤 정만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어떤 이는 정만인이 장경각에 숨겨져 있던 해인을 찾아 가지고 남해 바다에 있는 자하도라는 섬에 숨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금강산이나 계룡산에 숨었다고 한다. 어쨌든 진인이 해인을 가지고 다시 나타나는 날이 오면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바치는 조공을 받고 살게 되며 세계일등국이 될 것이라고 한다.  

   

  위의 설화의 내용에는 해인사에 해인이라는 바다에서 유래된 보물[聖物]이 숨겨져 있고 그 해인은 무수한 조화를 부릴 수 있는 것이지만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면 안 되는 성스러운 물건이라는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정만인이라는 이인이 이 해인을 찾아냈고 우리나라 부근에 있는 바다의 어느 섬에 감추어져 있으며 해인은 곧 이 땅에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이야기 구조를 하고 있다. 조선 말 민중들 사이에 나라의 보물인 해인이 언젠가는 이인(異人)의 손에 의해 우리나라로 돌아올 것이며 외적의 침략을 막아주고 국운을 융창시켜 줄 것이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원래 해인은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된 것으로 「해인삼매」란 삼라만상이 고요한 바다에 비치듯이 번뇌가 끊어진 부처의 정심(定心)에 만법의 실상이 명료하게 비친다는 뜻이다. 즉 해인이란 말은 삼매와 같이 쓰였으며 어떤 물건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해인을 성스런 도장으로 인식하고 그에 관한 하나의 신앙이 형성된 것은 불교를 신앙하는 다른 나라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이다.  

  도장에 대한 신앙은 그 연원이 환인이 환웅에게 천부인 3개를 주며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는 단군신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인 신앙을 연구한 김탁은 의상대사가 화엄교학을 가르친 제자들에게 그 깨달음을 인가해 주는 방법으로, 자신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법계도인(法界圖印)’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었던 데서 해인이 성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01 『임진록』의 이본 중 『흑뇽일긔』에 나오는 해인은 휴정대사가 천지조화ㆍ음양오행ㆍ일월 도수ㆍ강산정기와 둔갑장신하는 법을 모아 새긴 신비한 보물이다. 『정감록』02과 『도선비기』03의 내용 중에 남쪽이나 남쪽바다 또는 해도(海島)에서 진인이 출현한다는 ‘진인출현설’04이 해인 설화와 결합하여 『격암유록』05에 등장한다. 해인에 대한 신앙은 상제님을 따르는 여러 종교단체에서도 발견된다.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후 상제님을 신앙하는 많은 종교단체들이 생겼다. 그중 일부의 여러 단체에서는 해인을 인패(印牌) 즉 어떤 구체적인 실물이라 여기고 나중에 괴질이 돌 때 의통하는데 꼭 필요한 물건이라 여겼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도장이 바로 해인이라고 주장하며 그 해인을 찍은 종이를 호신용 부적처럼 몸에 지니기도 하였다.06  

 

  이렇게 민중에게 널리 퍼져있는 믿음에 대해서 도주님께서는 “상제께서 해인을 인패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여 어떤 물체로 생각함은 그릇된 생각이니라. 해인은 먼 데 있지 않고 자기 장중(掌中)에 있느니라. 우주 삼라 만상의 모든 이치의 근원이 바다에 있으므로 해인이요, 해도 진인(海島眞人)이란 말이 있느니라. 바닷물을 보라. 전부 전기이니라. 물은 흘러 내려가나 오르는 성품을 갖고 있느니라. 삼라 만상의 근원이 수기를 흡수하여 생장하느니라. 하늘은 삼십육천(三十六天)이 있어 상제께서 통솔하시며 전기를 맡으셔서 천지 만물을 지배 자양하시니 뇌성 보화 천존 상제(雷聲普化天尊上帝)이시니라. 천상의 전기가 바닷물에 있었으니 바닷물의 전기로써 만물을 포장하느니라.”07고 말씀하시며 해인과 해도 진인의 참된 의미를 밝혀주셨다. 보통 도장은 도장의 주인의 정체성과 영향력을 상징한다. 왕의 도장인 옥새는 곧 왕권을 상징하는 등 동양 문화에 있어서 도장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해인은 곧 바다의 힘을 상징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제께서 “나를 잘 믿으면 해인을 가져다주리라.”08하심은 바닷물은 수기이면서 전기이며 이 전기로써 만물을 생성·지배·자양하시는 상제님을 잘 믿을 때 그 기운을 내리시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매화산에 바다를 상징하는 소금을 묻은 것도 왠지 관련성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주님께서 어떤 공부를 하셨는지 알 수는 없으나 수많은 민중의 염원과 정성으로 만들어진 팔만대장경과 조선 말기를 휩쓸었던 ‘진인출현설’과 관련된 해인신앙의 중심지인 해인사에서 공부하심은 깊은 뜻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중들이 그토록 바랐던 해인을 다시 찾아오셔서 새 세상을 여시는 후천 진인이 바로 도주님이 아니실까 생각해본다. 그러므로 해인에 대한 모든 오해와 논란을 해소하시는 말씀을 하신 게 아닌가 생각하며 사명대사가 입적한 홍제암을 둘러보고 해인사에서 나왔다.  

《대순회보》 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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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김탁, 『한국의 보물, 해인』, 북코리아, 2009년, 109쪽. 

02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성행하였던, 국가운명·생민존망(生民存亡)에 관한 예언서이자 신앙서. 참서(讖書)의 하나인 이 책은 여러 비기(祕記)를 모은 것으로, 참위설(讖緯說)·풍수지리설·도교(道敎) 사상 등이 혼합되어 이루어졌다. 조선의 선조인 이담이란 사람이 이씨의 대흥자가 될 정씨의 조상인 정감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는 말도 전한다. 이런 까닭에 그 종류가 40∼50종류에 이르며 정확한 저자의 이름과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03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 도선(道詵 : 827~898)이 지었다고 전하는 풍수서. 

04 ‘진인출현설’은 당시 민중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홍경래의 난과 동학혁명운동 등에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05 조선 중기의 학자 남사고(南師古 : 1509~1571)가 지은 예언서. 

06 김탁, 『한국의 보물, 해인』, 북코리아, 2009년, 229~235쪽 참고. 

07 교운 2장 55절. 

08 교운 1장 6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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