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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님 생가와 회룡재(廻龍齋)

교무부    2017.02.01    읽음 :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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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신상미

 


 ▲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 전경 

 

  어딘가를 찾아 떠난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도(道)의 법방을 짜신 도주님의 생가와 공부하셨던 곳을 간다고 하니 내 마음은 더욱 설레였다. 도주님의 생가는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 회문동(慶尙南道 咸安郡 漆西面 會山里 會文洞)에 자리하고 있다. 함안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최초로 함안이라 불렸고, 고려 성종 14년(995)에 함주로 개칭되었다가 현종 9년(1018)에 다시 함안으로 고쳐졌다.  

  우리나라는 보통 서북이 높고 동남이 낮은 까닭으로 도읍을 세우고 고을을 설치함에 있어서 모두 남쪽으로 향하고 북을 등지는 지세인데, 함안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아 물이 역류하는 특이한 지세이다. ‘함안’이란 다 함께 화합하여 안가태평(安家太平)을 기원하는 뜻에서 다 함(咸)과 편안할 안(安)을 사용한 것에서 유래되었다.01 회문동은 칠원면 유원에서 대산으로 가는 첫째 마을로 회문이란 이름은 한 도사가 풍수지리를 본 결과 동쪽에는 작대산이 마주 보이고 마을 앞에는 광려천이 유유히 흘러 앞으로 문인이나 선비들이 많이 배출될 것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典經』에 이곳은 대구(大邱)에서 영산ㆍ창녕ㆍ남지에 이르러 천계산ㆍ안국산ㆍ여항산ㆍ삼족산ㆍ부봉산으로 연맥되고, 도덕골(道德谷)을 옆에 끼고 있는 문동산ㆍ자고산의 아래로, 구미산을 안대하고 있는 마을이라고 전해진다.02  

  목적지에 이르러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마을 입구에 있는 도주님 조부 공덕비였다. 영화 “화평의 길”에서 을사조약에 분개하여 토혈(吐血) 서거(逝去)하시던 도주님의 조부를 생각하며 공덕비를 둘러보았다. 도주님의 조부 휘 영규(諱 瑩奎, 1861∼1905)께서는 조위도(趙衛道, 1579∼1656)03의 10대 손이며, 함안 조씨 27대손임과 동시에 홍문관 정자(弘文館 正字)겸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 승정원 주서(承政院 主書)등을 지내셨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마을 어귀에서 5분 정도 꼬불꼬불하게 난 길을 따라 한 집 한 집 지나다보니 도주님 생가가 보였다. 도주님 생가라는 말을 처음 듣고 떠올린 집은 유물로 남을 법한 오래된 기와집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도주님 생가는 현대식 주택이었다. 그 뒤편에는 도주님께서 공부하셨던 회룡재(廻龍齋)가 보였다. 3칸으로 지어져 작지만 색채감이 화려한 기와 건물이었다. 주변에는 대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고요함을 깨우고 있었다.  

  지금의 도주님 생가와 회룡재는 6ㆍ25전쟁 당시 소실된 것을 각각 새로 지은 것이다. 도주님 생가는 도주님 자제분[조준래]이 현대식 집을 다시 지은 것이고, 회룡재는 조준래 씨의 증언04에 따르면 2004년 봄에 원래 있던 위치에 재건축을 하기 시작하여 5∼6개월 후에 완공한 것이라고 한다. 이 사실들을 알고 나니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고사성어가 절로 떠올랐다. 이번 답사를 준비하며 보았던 자료에서는 전혀 확실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던 의문들이 답사와 인터뷰를 통해 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6ㆍ25때에 소실된 회룡재는 주춧돌만이 남았다고 하였는데, 현재의 회룡재라며 지어져 있는 건물은 과연 본 터에다 지은 것일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내가 예전에 보았던 주춧돌만이 남아 있는 사진자료는 1992년에 출판된 것으로 그 당시는 재건축하기 전이라서 주춧돌에 대한 내용만 있었고, 2004년 옛터에 건물을 다시 지었기 때문에 2004년 이후 출판된 자료에는 현재의 회룡재 사진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도주님 생가를 관리하는 분의 증언에 의하면 주춧돌을 잠시 그대로 빼서 소나무 있는 곳에 두었다가 다시 그대로 원위치에 옮겨 놓았으므로 회룡재의 위치가 바뀐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회룡재의 옛터 사진과 현 회룡재의 위치가 다른 사진은 주춧돌을 잠시 빼놓았을 때 찍은 것으로 추측된다.  

  불에 타기 전의 도주님 생가는 5대가 살아왔으며, 4칸의 규모에 방이 2개, 부엌 1개, 대청마루, 사랑채 겸 창고로 쓰던 곳이 있었던 기와집이었다.  

도주님께서 회문동에서 거처하셨을 당시 생가에는 도주님 부친[휘 용모(鏞模)], 도주님 부인[예종린(芮鐘麟)], 도주님 자제분[조준래(趙俊來), 조영래(趙永來), 조선래(趙璇來)] 이 거주하셨다. 도주님께서는 이 생가에서 지내시지 않고 회룡재에서 거주하시며 공부하셨다고 한다. 놀랍게도 회룡재가 소실되기 전의 집 형태가 초가집의 형태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조준래씨의 증언05에 따르면 원래 기와집의 형태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그 증언에 대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다.  

  회룡재는 도주님께서 1926(丙寅)년 4월에 지으셨다. 그 후 1941(辛巳)년 세계 2차 대전 당시 일제의 종교단체 해산령(宗敎團體 解散令)에 의해 무극도에서의 종교 활동을 중단하시고 고향인 회문동에 오셔서 회룡재에서 수행을 하신 것이다.06 이곳에서 잠룡도수, 회룡도수, 해방도수를 보셨다고 한다. 회룡재는 돌 회(廻), 용 룡(龍), 재계할 재(齋)인데, 아마도 물속에 숨어 있던 잠룡이 다시 하늘에 오르기 위해 돌아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도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준비하셨던 것이라 생각된다.  

  혹독한 추위에도 회룡재 공부실에 불을 때지 않아서 동상에 걸려 피가 맺히고 발이 부었어도 괴로움에 동요하지 않은 채 공부하신 곳을 눈으로 확인하니 정말 묘한 감정이 들었다. 소실되지 않고 옛날 모습 그대로 보존이 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도 들었다.  

  혹독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구제창생을 위해 수행하신 도주님의 정성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리고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 길을 재촉하였다.  

《대순회보》 1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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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함안군지편찬위원회, 『함안군지』, 1997, pp. 1031∼1032.  

02 교운 2장 1절. 

03 함안 조씨 두암공파의 파시조(派始祖).    

04 2010년 4월 15일 전화 인터뷰.  

05 2010년 7월 8일 인터뷰.  

06 교운 2장 4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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