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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대웅전

삼신산 쌍계사(三神山 雙磎寺)

교무부    2017.02.01    읽음 : 1817


본문

 연구위원 염장선 

   

박 한경이 이해 八월에 충청도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교화에 힘을 다하고 있던 중에 급히 도장으로 귀환하라는 도주의 분부를 받고 류 철규와 함께 돌아오니 도주께서 지리산 쌍계사(智異山雙磎寺)에 갈 터인데 배종할 것을 분부하시니라. 다음날에 박 한경ㆍ류 철규ㆍ한 상덕ㆍ김 재복이 도주를 모시고 절에 이르러 정하신 바에 따라 청학루(靑鶴樓)의 뒷계단 위에 있는 영주각(瀛洲閣)의 정결한 방으로 주지의 안내를 받았도다. 도주께서 이레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생각하였던 바와는 달리 쉽게 마쳤다고 하시고 “趙鼎山來智異應 一布衣來白日寒”이라고 말씀하셨도다.  (교운 2장 60절)

  

  도주님 관련 답사를 위해 하동에 있는 삼신산의 하나인 지리산 쌍계사를 향해 출발, 여섯 시간여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삼신산의 명칭은 『사기(史記)』ㆍ『열자(列子)』에서 유래했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이 산은 중국 전설의 발해만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州山)을 의미하며 이곳에 신선과 불사약과 황금과 백은으로 만든 궁궐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열자(列子)』에 의하면, “발해(渤海)의 동쪽 수억만 리 저쪽에 오신산(五神山)이 있는데, 그 높이는 각각 3만 리, 금과 옥으로 지은 누각(樓閣)이 늘어서 있고, 주옥(珠玉)으로 된 나무가 우거져 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불로불사(不老不死)한다고 한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모두 선인(仙人)들로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살아간다. 오신산은 본래 큰 거북의 등에 업혀 있었는데, 뒤에 두 산은 흘러가 버리고 삼신산만 남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우리나라와 관련된 삼신산의 기록을 보면,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지리산에 대해 “백두산의 큰 줄기가 다한 곳이다. 그래서 일명 두류산이라고도 한다. 세상에서 금강산을 봉래(蓬萊)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方丈)이라 하며 한라산을 영주(瀛洲)라 하는데 이른바 삼신산으로서 태을성신(太乙星辰)이 사는 곳이며 여러 신선이 모이는 곳이다.”라 언급하고 있다.  

  삼신산에서 건너갔다는 제주도(濟州道), 그 옛 이름을 영주(瀛洲)라 하는데, 영(瀛)은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에서 갈라져 나간 산이란 뜻01이다. 영주산이 이어져 내려와 옛 영주가 된 것이라 한다. 한라산은 다른 산들과 달리 신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곳이며 민족의 성산(聖山)인 백두산이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진 금강산과 지리산 못지않게 신비스러운 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라산을 신비롭게 하는 신선사상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산북 최대 하천인 한천계곡에 자리 잡은 방선문(訪仙門)이다. 영주십경의 하나인 ‘영구춘화(瀛丘春花)’로도 널리 알려진 방선문은 문자 그대로 ‘신선이 사는 곳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가운데가 원형으로 뚫린 바위에는 누군가가 커다란 글씨로 ‘방선문(訪仙門)’이라는 마애(磨崖)02명을 편액(扁額)처럼 새겨놓았다.  

  이렇듯 삼신산은 무위자연사상인 도교의 영향을 받고 신선과 직접 관련돼 있다. 도교에서 하늘의 신선이 지상에 내려와 노니는 곳이라는 전설이 있는 산이 봉래산이며, 영주산, 방장산도 마찬가지로 전설 속의 산이다. 이중국의 삼신산이 한반도로 전래되어 왔는데, 그 전설 속의 산이 한반도로 와서 구체적인 산으로 현세화(現世化)됐던 것이다. 즉, 봉래산은 금강산으로, 방장산은 지리산으로, 영주산은 한라산으로, 그 이름이 지금까지 그대로 불리는 것이다.  

  쌍계사는 지리산에 있는 사찰이면서 특이하게도 삼신산 쌍계사란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쌍계사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번지의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13교구 본사로 서기 723년(신라 성덕왕 22년)에 삼법(三法)과 대비(大悲) 두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귀국하기 전에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정상(頂相)03을 모셔다가 삼신산(三神山)의 눈 쌓인 계곡 위 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 는 꿈을 꾸고 육조의 머리를 취한 뒤 귀국하였다. 그가 한라산을 거쳐 지리산에 오자 호랑이가 길을 안내하여 지금의 쌍계사 금당(金堂)자리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곳이 꿈에 지시한 자리임을 깨닫고 혜능의 머리를 평장(平葬)04한 뒤 절 이름을 옥천사라 하였다. 그 후에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05은 이웃 고을에 옥천사가 있고 산문 밖에는 두 시내가 만난다 하여 쌍계사라는 사명(寺名)을 내렸다 한다. 산내 암자로는 국사암06과 불일암07이 있다. 

  처음 우리를 맞이한 삼신산 쌍계사 일주문은 속세(俗世)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서는 첫 관문으로, 항상 한결 같은 마음으로 수도하고 교화하라는 뜻으로 세운 문이다. 양쪽에 하나씩의 기둥을 세워 지붕을 받치게 하여 ‘일주문(一柱門)’이라 한다. 그런데 이 문은 팔작지붕의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보조 기둥이 앞뒤로 두 개씩 세워져 있어 일주문으로 보기 어려울 듯했다. 일주문을 뒤로 하고 외청교(外淸橋)를 건너니 금강문(金剛門)이 나왔다. 이 문은 불법을 수호하고 속세의 더러움을 씻어낸다는 의미가 있는 장소로 두 분의 금강역사가 부처님 좌우에 모셔져 있었다. 이 건물은 신라 문성왕 2년(840)에 진감선사(眞鑑禪師)가 창건하였으며, 인조 9년(1641)에 벽암스님에 의해, 그리고 1979년에 고산스님에 의해 각각 중수되었다. 그 다음 세 번째 문은 천왕문으로 부처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고 수도승과 불자를 돕는 네 분의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천왕문을 나서니 석가모니 사리가 모셔져 있는 9층 석탑이 우뚝 서 있었다. 그 탑 뒤로 팔영루(八泳樓)가 보이는데 이곳 또한 통일신라 문성왕 2년에 진감선사08가 세웠으며 조선 인조 19년과 1978년에 보수되었다. 이곳은 우리 민족에게 맞는 불교 음악[범패]을 만든 곳으로 훌륭한 불교 음악의 명인을 많이 배출하였다. 또한, 진감선사가 섬진강에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 음률로써 ‘어산(魚山)’이란 불교 음악을 작곡하였다고 하여 팔영루라 했다. 팔영루의 좌측으로 범종각(梵鐘閣)이 있고 계단 따라 올라가면 청학루(靑鶴樓)가 나오는데 그 왼쪽에 영주당[영주각]이 있었다.  

  이곳 영주각은 도주님께서 1957년 8월에 공부하신 곳이다. 지리산은 세인들에게 이성계가 요구한 조선왕조 오백 년 역사 동참에 따르지 않은 불복산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도주님께서 영주각에서 칠 일간 공부를 하시고 나서 “쉽게 마쳤다” 하시며 “지리산이 응했다”는 시를 읊어주셨는데, 이 말씀을 미루어 보면, 지리산 산신이 후천 오만 년의 법을 짜시는 도주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아뵙고 도주님의 뜻에 따랐으리라 생각되었다. 잠시 영주각 앞에 서 있으니 고개가 숙여지고 마음도 차분해졌다.  

  영주각 맞은편에는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산과 관련이 있는 봉래당이 있었으며 좌측 계단 따라 올라가니 칠 층 석탑이 모셔져 있는 금당(金堂)이 있는데 이곳은 진감 국사가 건물을 세워 육조영당(六祖影堂)이라 했다. 지금 금당 안에 있는 칠 층 석탑은 1800년대에 주변에 있던 목압사09의 석탑을 용담스님이 옮겨와 세운 것이며, 그로부터 육조정상석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건물의 양식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한 다포계 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1979년에 중수되었으며, ‘세계일화조종육엽(世界一花祖宗六葉)’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전해지고 있다. 이 주위로 청학루, 영주당, 팔상전, 봉래당 등이 모여 있으며 이곳을 금당구역이라 한다. 금당건물 주변에 홍인대사와 육조혜능대사의 선종의 법통을 이어받는 과정이 그림으로 잘 그려져 있었다.  

  한편, 대웅전 앞마당에는 887년(진성여왕 1년)에 세워진 국보 47호 진감선사 대공탑비가 금이 간 상태로 대웅전의 설선당(說禪堂)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 탑비는 신라말의 명승 진감선사 혜소(774~850)의 높은 도덕과 법력을 앙모한 신라 정강왕이 887년에 건립한 것이었다. 이 탑비는 귀부와 이수(耳垂) 및 탑신이 완전한 형태로 귀부와 이수는 화강암이고 탑신은 흑 대리석이었다. 신라말기에 나타난 탑비양식에 따라 귀두는 용두화(龍頭化) 되었으며 귀부의 등에는 6각의 귀갑문(龜甲文)이 간편하게 조식되어 있었다. 이수는 양측을 비스듬히 자른 오각형으로 4면에 용이 있고 전면 중앙에 방형으로 깊이 판 제액이 마련되어 있었다. 탑비의 비문을 쓴 이는 최치원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자리를 옮겨 대웅전과 삼신각, 나한전, 명부전 등을 둘러보고 발길을 돌려 쌍계사 입구인 일주문으로 내려왔다. 여전히 관람객은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쌍계사를 뒤로 하고 쌍계사 석문의 문구가 새겨진 바위 근처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차에 올랐다. 

《대순회보》 1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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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강문구 외, 『한라산 이야기』, 제주도, 2006 

02 암벽이나 석벽에 글자나 그림을 새김. 

03 선종(禪宗)의 고승(高僧)의 초상화(肖像畵). 한편 쌍계사에 내려오는 전설로는 정상을 초상화라 하지 않고 머리라 하고 있다. 정상에 관한 내용은 쌍계사측 자료집을 참고함. 

04 평토장(平土葬)의 준말. 봉분을 만들지 않고 평평하게 매장함. 

05 신라의 제50대 왕. 이름은 황(晃). 경문왕의 둘째 아들이고, 헌강왕의 동생이다. 

06 쌍계사에서 500m 거리의 암자로 뜰에는 진감국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살아서 되었다는 천년이 넘은 느릅나무 사천왕수(四天王樹)가 있다. 

07 신라의 원효와 의상이 도를 닦았고 1205년(희종 1) 보조국사가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그 시호를 딴 암자이다.  

08 신라 후기의 스님(774~850). 속성은 최(崔). 법명은 혜소(慧昭).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者). 중국 당나라에 가서 범패(梵唄)를 배우고 돌아와, 지리산에서 옥천사(玉泉寺)를 창건하고 수도하였다. 

09 목압사는 현 목압마을에 있었던 사찰로 그 창건연대와 폐사연대는 미상이다. 다만 쌍계사에 있는 용담선사의 비에 보면 「…육조정상탑을 중건하려 하였으나 탑석이 없어 7일간 발원하였는데 그 회향일(回向日) 밤에 한 노인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사라졌다 한다. “옛 목압사터에 탑이 있으니 옮겨와 굳게 세우라”…」고 기록되어 있고 동치 3년(同治 3년, 1864)에 탑을 현 위치인 쌍계사의 금당으로 옮겼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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