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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님도전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 교편생활을 하신 학교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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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12 조회4,1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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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역사연구팀

  

  도전님께서는 유년시절에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시고 보통학교를 졸업하셨으며, 20세 이후에 몇 년간 교편생활을 하셨다. 이번에 도전님 행적을 조사하던 중 교편생활과 관련된 지역을 답사하게 되었다. 답사한 장소는 괴산군 장연면 광진리의 진대사립학교터와 연풍면 유하리 내응마을에 있는 신흥서당터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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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풍면 신흥서당 5주년 기념사진(1939년)

  

진대사립학교 교편생활 
  도전님께서는 1917년에 박달산 앞자락에 위치한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서 탄강하셨다. 이는 조부께서 일제강점기 이전에 괴산군 청천면 덕평리 요평마을에서 사시다가 살미면 문강리로 오실 때 차남이셨던 부친께서 인근 마을 방곡리에 터를 잡으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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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전님께서는 유년시절에 방곡리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시고 17세에 수안보 보통학교를 졸업하셨다. 장남이셨던 도전님께서 이 무렵에 딸만 있는 백부댁에 양자로 가시게 됐다. 당시 백부께서는 문강리에서 700여 평의 밭농사를 짓고 계셨다. 도전님께서는 백부댁에 계시면서 농사일보다는 학문에 정진하셨으며, 글 외에도 그림을 잘 그리셨다. 도전님께서 21세 되던 1937년 봄에 연풍면 유하리 경씨부인과 성혼을 하시고01 방곡리에서 생활하셨으며 그 후 진대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02
  우리는 도전님께서 교편생활하셨던 지역 중 먼저 진대사립학교터를 답사하고자 도장을 나섰다. 출발한지 한 시간여 후에 괴산IC를 통과하여 장연면 방곡리에 들어섰다. 박달산 아래 도전님 탄강지인 방곡리를 바라보며 방곡교차로를 지나 진대마을로 향했다. 날씨는 흐렸지만 7월 중순이라 은근히 후덥지근하였다.
  진대마을에 위치하고 있었던 진대사립학교는 남쪽으로 방곡리, 북쪽으로 문강리에 인접하고 있었다. 1914년에 광석과 진대의 이름을 따서 광진리로 장연면에 편입되었다가 1975년에 진대리로 분리되었다. 현재 법정리(法定里)로는 광진리로 되어 있으며 광진, 진대, 광석 등의 세 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진대리 앞뜰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군사들이 진을 치고 왜병과 호병을 막았던 장소여서 이 마을을 진대리(陣垈里)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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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전님께서는 1930년대 당시 지식인으로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인망을 얻으셨다. 그래서 진대마을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진대사립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신 것으로 추측된다. 도전님께서 1938년에 교편을 잡으셨을 당시 진대사립학교를 다녔던 진대마을 주민 정○○(1931년생) 씨 증언에 따르면, 진대사립학교는 옥답산을 뒤로 하고 동쪽을 바라보는 초가집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교실은 2개, 교사 휴게실이 1개 있었으며 복도 앞쪽에 운동장이 있었다. 교사 두 분이 산수, 음악(창가), 국어독본을 40여 명 정도의 학생들에게 가르치셨다. 당시 도전님께서는 방곡리에서 출퇴근하셨으며, 진대사립학교는 1939년에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하였다.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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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달산과 방곡리 (2016년 7월 촬영)

 
  진대마을 앞쪽으로 논과 밭이 펼쳐져 있고 진대골짜기 주변에 이삼십여 채의 집들이 모여 있다. 진대사립학교가 있었던 터는 현재 인삼밭으로 이용되고 있어서 학교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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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대리는 마을 건너편의 오가천 일대에 형성된 까치소 때문에 논과 밭이 비옥해져서 대대로 풍요로운 마을로 이름이 높았다. 진대사립학교 학생들의 소풍장소로도 이용되었던 까치소를 찾아가 보았다. 소(沼)에 까치가 날아왔다는 작담(雀潭)마을 쪽을 거쳐서 까치소로 갔다. 길가에 수풀이 우거져 있고 오가천을 가로질러 건너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물을 건너서 50여 m 위로 올라가니 까치소가 나왔다. 그런데 까치소는 다름 아니라 진대사립학교 맞은편 과수원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소[웅덩이]가 새의 모습처럼 하고 있었다. 당시 학생들이 까치소에서 수영을 하였는데, 까치소의 물이 깊어서 선생님들이 항상 같이 가셨다고 한다. 도전님께서도 이곳에 오셨으며 평소에 학생들에게 정서교육과 신체단련을 위한 재미있는 운동을 잘 가르쳐주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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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진리 오가천에 형성된 까치소(2016년 7월 촬영)

 
  도전님께서 교편생활을 하셨던 1930년대 후반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간섭과 탄압이 심했던 시기였다. 일제는 1937년 이후 조선에 황국신민화 강화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 때문에 문을 닫는 사립학교가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하였다. 진대사립학교도 당시 학생들에게 아침 조회시간마다 운동장에서 동쪽을 향해 묵념을 시켰다. 1930년대 초에는 장연면에 공립초등학교가 없었으며 유일하게 진대사립학교만 있었기에 일정 기간 일본의 간섭을 받아왔던 것이다. 당시 공립학교는 모든 과목을 일본말로 가르쳤으나 사립학교 및 기타 학교는 우리말과 글로 수업을 진행하였다. 1939년에 일본은 우리말을 사용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립학교 폐교정책의 일환으로 진대사립학교를 폐교했다. 그래서 도전님께서 교사생활을 하시다가 어쩔 수 없이 그만두셨던 것이다. 
 
신흥서당 교편생활
  우리 일행은 광진리에서 출발하여 20여 분 거리의 신흥서당터가 있는 내응마을에 도착하였다. 도전님께서는 진대사립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접으시고 처가가 있는 연풍면 유하리 내응마을로 오시게 되었다. 유하리에 오신 것은 청주 경씨 집안의 요청이 있어서였다. 도전님께서 내응마을에 오신 이후 경씨 집안에서 운영하는 신흥서당에서 1939년도에 다시 교편생활을 하시게 되었다. ddb225676802483dbb50057511cbf0e1_1541985 

▲ 연풍면 유하리 내응마을 전경(2016년 7월 촬영)

  

  연풍면은 경북 문경시와 괴산군 장연면과 충주시 수안보면 등과 인접한 곳으로 신선봉, 피란봉 등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1914년 괴산군에 병합되면서 괴산군의 연풍면, 장연면, 충주시 상모면으로 갈라졌다. 현재 이곳은 유하리를 포함한 9개 리로 개편하여 괴산군에 편입되었다.
  300년 넘게 내응마을에서 살아온 청주 경씨는 이곳에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신흥서당이라는 사설교육기관을 세우고 그 주변 마을의 학생들을 받아들여 계몽을 위한 교육을 했다. 당시 이곳에는 교육열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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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전님 교편생활하실 때 심어진 느티나무(2012년 8월 촬영)

 

  신흥서당에 오는 학생들은 7세부터 12세 정도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개량서당이 많이 건립되어 아이들이 많이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개화가 되어 형편이 어려워서 공립학교에 못 갔지만  배움에 뜻이 있는 아이들이 수업료가 거의 없는 개량서당에 다녔기 때문이다. 당시 신흥서당 수업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만 하였다. 국어와 산수를 가르쳤으며 한문은 가르치지 않았다. 교재는 철필로 써서 인쇄하여 만들었으며 당시 교육방식은 개별학습이었다.
  신흥서당 설립자 경성중 씨의 아들(1932년생)로부터 신흥서당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이가 많으면 이곳에서 2년 정도 배우고 연풍초등학교 5~6학년에 편입학하였으며 학생 수는 40~50명 정도로 남녀 비율은 거의 1 대 1이었다. 신흥서당은 30여 평 정도의 초가지붕 형태의 건축양식을 하고 있었으며, 내부바닥이 마루인 교실이 있고, 그 옆에 교사들이 쓰는 방이 하나 더 있었다. 신흥서당 뒤쪽에 있는 우물을 식수원으로 썼다. 그리고 앞마당 쪽에 도전님께서 교편생활하실 때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심어졌으며, 학생들이 두 나무 사이에서 공놀이를 하였다. 이곳을 다닌 학생들이 다른 학교에 가서도 공부를 잘하였다04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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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흥서당터에 들어선 창고 (2015년 1월 촬영)

 
  현재 신흥서당터에는 커다란 내응새마을 창고가 들어서 있었다. 내응새마을 창고 앞쪽에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또 다른 한 그루는 최근에 죽었다고 한다. 수령이 80년 정도 되는 느티나무는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제법 넓은 응달을 제공하여 마을 주민들이 이 주변에 모여 휴식을 취하곤 하였다. 2013년에 경성중 씨 아들은 도전님과 자신의 여동생이 함께 찍은 ‘연풍신흥서당 5주년 기념’ 사진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이번에 그의 소개로 기회가 되어 이 사진 속에 나오는 여동생(1933년생)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여동생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연풍신흥서당 5주년 기념’ 사진은 내가 7살(1939년) 때 찍은 것으로 부친의 권유로 신흥서당에 다니게 되었어요. 이곳에서 8살까지 다니다가 9살부터 공립학교인 연풍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이 무렵 신흥서당이 폐교되어 이곳에서 학생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항상 도전님께서 웃음을 지으셨으며 저를 만나실 때마다 ‘서울구경 시켜 줄게’ 하시며 번쩍 들어 올리시곤 하셨습니다.”05 그의 여동생은 사진 속에 신흥서당 설립자의 옆쪽에 앉은 학생(맨 앞줄 오른쪽에서 열 번째)으로 당시 나이가 어려서 ‘도전님께서 수업하실 때의 기억이 거의 없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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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전님께서 언제부터 신흥서당에서 교편생활을 하셨는지 궁금했는데, 경성중 씨의 따님과의 만남으로써 풀리게 되었다. 이는 그녀가 부친이 간직했던 사진을 물려받아서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때에 따라서 사진 한 장 한 장이 우리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음에 새삼 놀랐다. 다음으로는 신흥서당 근처에 위치해 있던 도전님 살림집을 찾아가 보았다. 현재는 다른 집이 들어서 있었다. 도전님께서는 보수가 거의 없이 교편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생활은 넉넉하지 못하셨다. 어려운 시기에 학생들에게 항상 희망을 심어주셨던 도전님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번 답사를 통해서 도전님께서 1937년과 1938년도에는 진대사립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시고 1939년과 1940년에는 신흥서당에서 교편생활을 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전님께서 민족 계몽을 위하여 교편생활을 하시다가 일제의 황극신민화 교육방침에 따라 두 번이나 교직을 멈추시게 되셨다.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도전님께서 훈시하신 “이 나라의 청소년들은 장차 국가와 종단을 이끌어 갈 인물이기에 학교교육은 민족주체사상이 투철하고 애국애족하는 공민육성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06는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대순회보>  1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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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2016년 7월 15일 백00 씨 인터뷰
02 2016년 7월 15일 정00 씨 인터뷰
03 2012년 8월 27일, 2016년 7월 15일 정00 씨 인터뷰.
04 2013년 1월 30일, 2016년 7월 15일 경성중 씨 아들 인터뷰.
05 2016년 7월 31일 경성중 씨 딸 인터뷰.
06 『대순지침』,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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