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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상제님의 주유천하 1 - (1)김일부와 만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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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0.23 조회4,9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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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주유천하(周遊天下)를 위해 김제 내주동01을 떠나신 상제님께서는 이리(裡里)02를 거쳐 다음 날 충남 향적산(香積山, 574m)에서 김일부(金一夫, 1826~1898)를 만나셨다. 김일부는 정역(正易)을 창시한 인물로 영가무도(詠歌舞蹈)의 교법을 펼치고 있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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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유천하를 하신 상제님의 첫발걸음 

 

  ‘영가무도’란 음(吟)·아(哦)·어(唹)·이(咿)·오(唔)의 다섯 가지 소리로 구성된 오음주(五音呪)를 송주(誦呪)하며 춤을 추는 수련법이다. 이 다섯 개의 모음을 노래 곡조와 같이 크게 소리 내어 부르는데 계속해서 외우면 손발이 저절로 움직여 춤이 나오게 된다고 한다. 이때 부르는 노래를 영가(詠歌)라 하고 자동적으로 나오는 춤을 무도(舞蹈)라 부른다. 
  상제님의 방문이 있기 직전에 김일부는 신이(神異)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는 꿈에 천존(天尊)의 명을 받들어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자(使者)를 따라 상제님과 더불어 옥경(玉京)에 올라갔던 것이다. 사자는 높이 솟은 주루금궐(珠樓禁闕)03 요운전(曜雲殿)에 상제님과 김일부를 안내하였다. 그랬더니 천존께서 상제님께 광구천하(匡救天下)하시려는 뜻을 상찬(賞讚)04하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꿈을 꾸고 어리둥절해 있던 김일부는 돌연 상제님의 방문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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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부의 고향 당골의 최근 모습. 이곳에서 정역(正易)을 완성하였다.

  

  상제님을 알아본 그는 반가이 맞아들이면서 신인(神人)이라 하여 공경하였다. 그리고 요운(曜雲)이라는 호도 지어 올렸으나 상제님께서 이 호를 쓰신 적은 없으셨다. 

  김일부는 훗날 상제님께서 명부공사(冥府工事)를 처결하실 때 청국(淸國) 명부(冥府)를 관장하도록 명을 받든 인물이다.05 따라서 김일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 여겨져 여기에 잠시 지면을 할애해 보고자 한다. 

  김일부는 본관이 광산(光山)이고 이름은 항(恒), 초명은 재일(在一)이었다. 부친은 김인로(金麟魯), 모친은 대구 서씨(徐氏)이며 1826년에 충남 논산 당골(침골 혹은 沈洞이라고도 함)06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현재 당골 뒤쪽에는 수백 평의 대나무 밭이 있는데, 여기가 김일부가 태어난 생가가 있던 곳이다.

  그는 조선 전기의 뛰어난 문신 김국광(金國光, 1415~1480)07의 후예였으나, 집안은 이미 몰락하여 무척 가난하였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학문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평생 책을 끼고 살았다. 김일부는 키가 컸으며 용모도 비범하였고, 특히 상체가 길어 팔을 드리우면 무릎을 넘었다고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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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골 뒤쪽의 대나무 밭. 김일부 딸의 증언에 따르면 이곳에 김일부의 생가가 있었다고 한다.  

 

<대순회보> 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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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現 전북 김제시 봉남면(鳳南面) 내광리(內光理) 내주(內主)마을.

02 1995년 5월에 전북 익산군과 합쳐 익산시로 되었다.
03 구슬로 화려하게 장식한 높이 솟은 궁궐. 주루(珠樓)는 ‘식주지루대(飾珠之樓臺)’라 하여 구슬로 장식한 높은 누각을 뜻하고, 금궐(禁闕)은 궁궐을 말한다.
04 기리어 찬양함.
05 조선명부(朝鮮冥府)를 전명숙(全明淑)으로, 청국명부(淸國冥府)를 김일부(金一夫)로, 일본명부(日本冥府)를 최수운(崔水雲)으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노라.(공사 1장 7절)

06 現 충남 논산시 양촌면 남산2리. 마을의 뒷산이 남산이며, 마을 뒤로 흐르는 물이 한 여름에도 차고 맑다고 하여 ‘당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07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적절한 조치로 난을 평정하였고, 좌찬성을 거쳐 광산군에 봉해졌다. 세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경국대전』 편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470년에는 좌의정에 올랐고 1471년에는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의 작위를 부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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