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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님도주님의 구국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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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0.24 조회4,2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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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도주께서는 경술년에 어린 몸으로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에서 일본 군병과 말다툼을 하셨으며 이듬해 청조(淸朝) 말기에 조직된 보황당원(保皇黨員)이란 혐의를 받고 북경(北京)에 압송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엄친의 파란곡절의 생애에 가슴을 태우고 고국만이 아니라 동양 천지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구세제민의 큰 뜻을 가슴에 품고 입산 공부에 진력하셨도다. (교운 2장 5절)

 

  이번 호에서는 도주님께서 구세제민의 뜻을 품고 입산 공부를 하시기 전에 만주 봉천지방에서 겪으셨던 일을 정리해보려 한다. 『대순진리회요람』은 이에 대해 “동지(同志)들과 구국운동(救國運動)에 활약(活躍)하시다가 도력(道力)으로 구국제세(救國濟世)할 뜻을 정(定)하시고”라고 설명하고 있다.01 이것은 도주님께서 입산 공부 전까지 단순히 수동적으로 어떠한 일을 겪으셨던 것이 아니며, 실제로 구국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신 것임을 말해준다. 하지만 도주님의 구국운동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에, 이에 대해 직접적이고 자세한 설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주님께서 도력으로 구국제세하실 뜻을 세우신 계기가 된 당시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만주 봉천지방의 사정과 사료가 남아있는 관련 독립 운동가들의 활약상을 통할 수밖에 없다. 먼저, 당시의 만주 사정을 간략하게라도 알아보자. 

  19세기 말엽은 제국주의가 극에 달하여 약소국을 수탈하던 시대였다. 동북아시아도 예외가 아니어서, 북쪽의 러시아는 만주지역의 자원과 부동항(不凍港)을 확보하려고 무력하기 짝이 없었던 중국(청나라)을 압박하여 1896년에 ‘중러밀약[中俄密约]’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조약으로 러시아는 하얼빈에서 장춘을 지나 대련까지, 만주를 동북에서 서남으로 길게 가로지르는 중동철도(中東鐵道)를 놓고 여순 항구를 조계지(租界地)로 빌려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러시아는, 중국의 산동·화북 등지에서 청 황실을 돕고 외세를 물리치자는 의화단운동이 크게 일어나자 1900년에 의화단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만주지역을 거의 장악해버렸다. 

  한반도를 교두보로 하여 대륙으로 진출하려던 일본은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는 러시아를 방치할 경우, 차제에는 자국까지도 침략당할 수 있음을 직감하고, 국운을 건 총력전의 체제로 러시아와의 대결에 돌입했다. 그것이 곧 1904년 2월에 발발한 러일전쟁이다. 일본군은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른 끝에 간신히 전쟁의 우위를 점하였고, 전쟁은 미국의 중재로 1905년 9월 포츠머스 강화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 결과 일본은 한국 지배권을 완전히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주의 남부지역에 진출해있던 러시아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물려받게 되었다.02 

  몇 달 뒤인 1905년 12월, 일본이 청과 ‘회의동삼성사의정약(會議東三省事宜正約)’을 체결하였던 것은 본격적인 대륙 진출에 시동을 건 사건이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러시아가 점령했던 만주지역을 청나라에 돌려준다는 모양새를 취하면서도, 안동(지금의 단동)과 영구, 여순에 조계지를 두면서 러시아에 의해 건설된 중동철도 중에서 남쪽 부분, 그러니까 장춘에서 여순까지 이르는 구간인 남만철도(南滿鐵道)의 운영권을 획득하고, 봉천과 안동을 연결하는 군용철도를 운용하며, 그 철도들의 인근에 철도 수비를 위하여 1㎞당 15명 정도의 일본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일본은 1906년 여순에 관동도독부(関東都督府)를 설치하고 군대 본부를 둔 뒤, 그곳으로 하여금 군사·행정·사법의 권한을 통괄하게 하였다.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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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이 만주 일부에 주둔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만주는 청나라의 통치 지역이었다. 특히 청나라는 러시아와 일본이 연달아 만주로 진입하자 만주의 소유권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기 위하여 그 지역의 행정제도 개편을 단행하였다. 청은 만주를 자신들의 발원지라고 하여 장군(將軍)들로 하여금 그 순수성을 지켜가며 통치해 오던 오랜 전통을 가져왔으나, 1907년이 되면 총독이 군대와 행정을 총괄하는 체제로 바꾸었다. 당시 위세가 등등했던 원세개(袁世凱)의 죽마고우 서세창(徐世昌)이 초대 총독(1907.6∼1909.2)으로 부임을 하였으며, 석량(錫良, 1909.2∼1911.4), 조이손(趙爾巽, 1911.4∼1912.2)이 차례로 그 자리를 이었다. 이들은 봉천(심양)에 거주하며 동북 3성으로 구성된 만주를 다스렸는데, 현지에서는 주로 봉천독군(奉天督軍)으로 불렸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이 망하자, 만주지역은 지역 군벌들이 난립하며 통치하는 혼란기를 거쳐 1916년 무렵부터는 장작림(張作霖, 1875~1928)이 그 지역 전체를 장악하게 된다. 

  간단히 당시 역사를 살폈는데, 정리하자면 만주 전체 지역은 여전히 청 혹은 중국의 통치하에 놓여있었으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만주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1906년부터는 장춘∼여순, 봉천∼안동을 잇는 철도 부근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고, 안동(단동)과 영구, 여순을 조차지로 하여 통치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도주님께서 망명을 하던 당시의 만주는 이러한 격동의 세월을 겪고 있던 중이었다.

  『전경』에 따르면 도주님께서는 경술년(1910)에 일본 군병과 말다툼을 하셨다고 한다. 『실기(實記)』에는 이 내용의 배경과 맥락이 조금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참고할 만하다. 『실기』는 도주님의 행적을 간단히 적은 짧은 문헌인데, 도주님의 사위이자 시봉이었던 배문걸의 집안에서 전해지는 것이다. 저자를 확실히 알 수 없고 일부 정확하지 않은 내용도 있어서 그 전체를 다 신뢰할 수는 없지만, 도주님의 일본 군병과의 말다툼과 관련된 구체적 정황이 기록된 유일한 문헌이라는 점과 그 문체와 내용 및 형태로 볼 때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1960년대 이전에  직접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기에, 잠시 이 부분을 소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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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에 도주께서 부친을 모시고 만주에 들어가시니 나이가 15세셨다. 부친을 돕는데 계책을 꾸밈에 빈틈이 없으니, 군막에 함께 있던 여러 사람들이 온갖 말로 칭찬하였다. 하루는 봉천(심양)으로부터 돌아오시는 길에 일본군에게 억류되어 그 일본군 본부에 연행되시니, 일본군 장교 한 사람이 “너는 조선인으로서 우리가 나라를 보호해준 은혜에 보답해야 하는데 어찌 여기에 반대하고 반역을 꾀하느냐!” 하고 크게 소리쳤다. 도주께서 곧 “사람마다 각자 자기 나라를 생각하거늘, 그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라고 꾸짖으시니, 그가 화를 내며 권총을 뽑아서 쏘려고 하였다. 도주께서 가슴 앞섶을 열고 “쏘고 싶거든 쏘아라. 사람이 각자 자기 나라를 위하는 것이 충(忠)이라. 너는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죽이려 하니, 천신(天神)이 두렵지 않느냐!” 하고 대항하시니, 일본군 장교는 총을 내리고 “○○○○○로서 생사가 달린 순간에 이처럼 태연하니 참으로 비범하고 뛰어난 사람이라.” 하고 돌려보내니 도주의 나이 16세 때의 일이었다.04

 

  위의 기록을 감안한다면, 도주님께서는 부친을 도와 애국지사들과 어울려 나라를 위한 계책을 도모하셨던 것 같다. 이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대순성적도(大巡聖蹟圖)에도 나타난다. 경술년인 1910년에는 구국운동을 하시다가 망명지로 돌아가시는 길에 일본군에 억류되는 고초도 겪으셨다. 당시 일본군은 장춘∼여순 구간, 봉천∼안동 구간의 철도 인근에만 주둔하고 있었고 도주님의 망명지로 추정되는 유하현에는 주둔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주님께서는 봉천(심양)에서 유하로 돌아오시는 길에 봉천(심양) 인근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에게 구금되셨던 것 같다. 그러나 16세에 불과한 소년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총으로 생명을 위협하는 일본군에게 굴하지 않으시고 사리에 합당한 웅변으로 당당하게 맞서셨으니, 그 기개에 감탄한 일본군은 도주님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더 이상의 자료가 없기에 도주님께서 어떤 애국지사들과 더불어 구국운동을 하셨는지, 그 자세한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다만, 도전님께서 태극도를 이끌고 계시던 무렵에 간행된 『수도요람』(1963년 초판 간행)과 도주님 집안의 족보인 『함안조씨 두암공파 세보』에서 구국운동의  흔적을 약간 더 찾아볼 수 있다. 


  도주님 역시 유시(幼時)부터 이와 같은 부조전래의 사상을 견지하시고 국가대세가 이미 한일합방의 결정단계에 있음을 개탄하시다가 서기 1909년 기유(十五歲時) 四月에 침략자들에 의한 신변의 위험을 느끼시고 부친 숙부 등과 같이 만주 봉천지방으로 망명하시어 후사를 대비하며 동지인 이석대(李錫大) 이태기(李泰基) 등 수십여 명과 구국운동에 활약하시다가 다시 대사(大事)에는 도력이 필요함을 통감하시고 입산수도하시던 중 …05  

 

  (도주님의 부친께서는)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문예가 숙취하니 원근 석학들이 문의 질정하여 명성이 들났고 부공께서 순국함에 학문을 그만두고 개연히 구국에 뜻을 두고 통영 통제사 등 무리들과 방도를 모색하였으나 보이지 않고 국정이 날로 위험이 더해감으로 아우 두 가족과 함께 만주에 들어가서 이대계(李大溪) 승희(承熙) 류의암(柳毅庵) 인석(麟錫)과 결탁하고 국내지사 배정산(裵定山) 문창(文昶) 조서천(趙西川) 정규(貞奎) 조일헌(趙一軒) 병택(昺澤)들과 엄격히 설계하여 광복을 도모코자 연병제무를 둘째 아우에게 맡겼다. 당시 청국의 국운이 다 되어 원세개가 총통이 되어 보황당을 제거하려는 때에 공 역시 북경에서 거사하려는 혐의를 당함에 구국충정이 담긴 장서를 올리니 원씨가 인견하고 감탄하여 면케해 주었다.06 

  

  이에 따르면, 도주님 집안과 같이 구국운동에 동참한 인물은 이석대(李錫大, 1879~1918), 이태기(李泰基), 배문창(裵文昶, 1864∼1928), 조정규(趙貞奎, 1853∼1920), 조병택(趙昺澤, 1855∼1914) 등이었고, 류인석(柳麟錫, 1842~1915) 등과도 교류관계가 있었던 듯하다. 이들 중 그 활약상이 소상하게 전해지는 이는 이석대와 류인석이다. 

  대한 독립장을 추서 받은 이석대의 활동에 대해서는 국가보훈처에서 제공하는 자료와 여러 관련 사료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07 이석대는 본명이 이진룡(李鎭龍)으로서 석대는 자이다. 유명한 독립군 대장으로 황해도 평산(平山) 출신이며 류인석의 제자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무력 항일투쟁을 시작하여 평안·경기·강원 3도로 그 활동 범위를 넓혀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일제의 강력한 압살정책으로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1911년 10월에 지휘권을 위임하고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인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홍범도 등과 같이 백두산 인근의 무송현(撫松縣)으로 옮겨 독립군을 양성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일제는 신출귀몰하는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밀정을 시켜 중국 경내 압록강 일대를 3년간이나 조사케 하였고, 결국 그는 1917년 5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구금 중 일본경찰이 직업을 묻는 물음에 거침없이 “왜적을 토멸하여 나라를 구함이 직업이다.”고 하였으며, 그해 말에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5월 1일에 평양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죽음 직전에 유언을 묻자, “유언이라고 지금 새삼스러운 말은 하기 싫으나, 장남에 대하여 나 죽은 뒤에 나에게 큰 은혜 있는 선생(류인석)의 사당에 참례하여 아비 죽은 것을 고하라고 전하여 달라.”고 말하고, 웃으며 교수대에 올라 죽음을 맞았다.

  이태기는 어떤 인물인지 그 내력을 알 수 없고, 배문창과 조정규, 조병택은 모두 경남 김해 및 함안 출신의 유학자들이다. 이들은 고향에서 후배들을 양성하고 있다가, 나라가 망하자 분격하여 가산을 정리하고 압록강을 건너 자리를 잡아 황무지를 개간하며 항일운동을 하였다.08 

  이처럼 이석대(이진룡)와 배문창, 조정규, 조병택은 1910년∼1911년을 전후한 시기에 유하와 그 인근의 남만주 지역에서 군자금을 만들어 항일을 위한 독립군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도주님 집안 역시 만주 유하에서 많은 땅을 매입하여 농사를 지음으로써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군자금 조달과 관련한 구국운동을 하셨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도주님 집안은 류인석과도 교유하였다고 한다. 배문창 역시 류인석과 교유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09 류인석은 도주님 집안을 비롯하여 당시 만주 남부지역의 인사들과 접촉이 잦았던 듯하다. 류인석은 구한말의 유학자로서 한반도 중부지역의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다가 1908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으며, 그곳에서 1910년에 연해주 의병들의 통합체인 13도의군(十三道義軍) 도총재(都總裁)로 추대되기까지 한 인물이었다. 일제의 공작으로 13도의군이 와해되자 1914년에 연해주를 떠나 봉천성의 서풍현(西豊縣: 유하현에서 서북으로 약 100㎞ 거리)으로 옮겼다가 얼마 뒤 압록강변에 위치한 관전현(寬甸縣)으로 옮겨 그곳에서 죽었으니,10 류인석은 1914년부터는 연해주(북간도 지역)에서 서간도 지역으로 옮겨와 만주 남부지역에서 거주하였던 것이다. 도주님 집안은 바로 이분과 교유하면서 구국운동에 매진하였다. 

  도주님과 집안의 독립운동은 이에 대한 자세한 행적이 전하지 않기에, 위에 기술한 그 주변 동지들의 활동 상황으로만 짐작할 뿐이다. 도주님께서 당신과 집안의 자세한 구국운동 행적을 말씀하지 않으셨던 것은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일 것이니, 이러한 일은 상제님께서 당신이 타인에게 도움을 베푸실 때 그 사람이 모르게 하셨고,11 또 “덕은 음덕(陰德)이 크니라.”12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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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무렵에, 도주님의 부친께서 보황당(保皇堂) 당원이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중국에는 신해혁명(1911)으로 청 왕조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새로 건국되는 정치적 격변이 있었는데, 그때 권력을 장악한 인물이 원세개였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청 왕조의 부흥을 목적으로 하는 보황당은 말살시켜야 하는 정치단체였다. 그러므로 여기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잡아들였는데, 만주 남부지역에서 구국운동에 열을 올리시던 도주님의 부친께서도 그런 혐의를 받아 체포되셨던 것이다. 

  만주는 청 황실의 발원지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서 청 왕조의 부흥운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던 만큼, 중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보황당 운동에 대한 감시와 의심이 더 심했을 것이다. 더구나 도주님 부친과 같이 교류하며 구국활동을 했던 류인석, 이석대, 배문창, 조정규, 조병택 등은 모두 전통 유학자 출신들이었고, 특히 류인석은 외세에 반대하며 위정척사를 부르짖던 화서학파의 마지막 계승자이기도 하였다.13 중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보수적인 성향의 이들이 서양식 정치제도인 공화제를 추구하는 근대 개화인들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었다. 도주님 부친께서 그런 사람들과 모여 어떤 정치적인 목적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면, 그 내용을 전혀 모르는 만주의 중국인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전통 복고를 도모하려는 보황당의 혐의를 씌울 수도 있는 것이었다. 위에서 인용한 도주님 집안의 족보에 의하면, 도주님 부친께서는 보황당 당원이라는 혐의를 받아 북경까지 압송되셨지만, 그곳에서 당신 활동의 참뜻, 그러니까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할 뿐 중국 내의 정치적 상황에 간섭하려는 게 아님을 분명히 밝히셨다고 한다. 그 구국충정에 감동한 원세개는 드디어 도주님의 부친을 방면해주었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 그러니까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를 써 보았지만 일본의 막강한 무력에 짓눌려 그것이 여의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결국 강제병합에 의해 나라가 없어지는 경술국치에까지 이른 당시의 상황, 일제의 위협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피해왔던 만주이건만 그곳마저 일본의 침략 야욕에 크게 위협받고 있었으며, 일시 후퇴했던 러시아가 또다시 밀고 내려와 만주가 언제 아비규환의 각축장으로 변할지 모르는 현실, 본토 침공을 받는 중국은 권력 다툼으로 내부싸움만 격화되고 있었던 당대의 실정은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으로는 구국, 더 나아가 제세를 이룰 수 있는 해결의 방책으로 충분치 않음을 보이고 있었다. 이에 이미 봉천명을 하신 도주님께서는 도력이 아니면 구국과 제세를 이룰 수 없음을 통감하시고 입산 공부를 실행하시게 된다.  

<대순회보> 1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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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대순진리회요람』, p.12

02 러일전쟁에 대한 자세한 정황은 김성수, 「『언덕위의 구름』을 읽고」, 『상생의 길』 2 (2004), pp.95-125 참조

03 [네이버 지식백과] 관동군(關東軍) (일본사, 2009. 4. 20, 미래엔)

04  其時에道主侍父公而入滿洲하니年이十五歲러라協贊父公하야規劃이甚密하니同帳諸公이極口稱詡러라一日

에自奉天으로還行途中에被日兵所制하야連行彼軍本部則將校一人이勵聲大叫曰汝而朝鮮人으로圖報護國之恩

而反依不軌오卽應之曰人各爲其國이어늘胡爲此言고하니彼大怒하야卽拔拳銃而欲射之어늘道主卽披胸衿而抗之

曰欲射어든射하라人各爲國은忠也라汝殺忠良하니天神이不畏乎아彼漢이卽下銃而歛容曰以○○○○○死生之間

에泰然若此하니眞天人也라하고卽送還之하니時年이十六이러라. 『실기』 (필사본, 간행년 미상), 2쪽

05 『수도요람』 재판 (1967), p.14.

06 도주님 부친의 묘갈명인 「복우공용모묘갈명(腹宇公鏞模墓碣銘)」에 등재된 기록이다. 『함안조씨 두암공파 세보』 卷之一 (부산: 아름기획, 1996), pp.180-181.

07 국가보훈처에서 제공하는 자료를 주로 하여 이진룡의 일대기를 재편집하였다. 국가보훈처는 다음의 문헌을 근거로 이진룡의 일대기를 구성하고 있다. 『매천야록』,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한국독립사』(김승학)

08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참조.

09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배문창’ 참조.

10 『한국민족대백과』 참조.

11 상제께서 타인에게 도움을 베푸셔도 그 사람이 알지 못하는도다. 이 일을 언제나 마땅치 않게 여겨 오던 형렬이 상제께 아뢰기를 “상제께서 자식을 태어주시고도 그 부모에게 알리지 않으시오니 무슨 까닭이오니까.” 상제께서 가라사대 “내가 할 일을 할 뿐이고 타인이 알아주는 것과는 관계가 없느니라. 타인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소인이 하는 일이니라.” (교법 3장 11절)

12 교법 2장 18절.

13 이황직, 「초기 근대 유교 계열의 민족주의 서사에 대한 연구: 유인석의 『우주문답』을 중심으로」, 『문화와 사회』 11 (2011),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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