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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만인을 살리시는 상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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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08 조회3,8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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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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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戊申]년 6월의 어느 날, 태인 관왕묘(關王廟)에서 제를 올리는 일을 맡고 있던 신경원(辛京元)이 보낸 심부름꾼이 상제님을 배알하고 급한 소식을 전했다. 그것은 태인읍의 순검이 날마다 신경원의 집에 와서 상제님께서 계신 곳을 캐묻는다는 것이었다. 상제님께서 그 심부름꾼을 보시고, “급한 일로 오는 사람이 도중에서 지체하다가 늦어진 것은 무슨 일이뇨⋅” 하고 보신 듯이 꾸짖으시니, 깜짝 놀란 심부름꾼은 “오는 길에 당화주역(唐畵周易)01으로 운명을 비판하는 자가 있으므로 잠깐 지체되었사오니 용서하소서.” 하고 죄송스러워 하였다. 상제님께서 그 심부름꾼에게 곧 글을 써 주시며 “이 글을 경원에게 주고, 보고 난 후에 곧 불사르게 하라.” 이르시니, 그는 급히 신경원의 집으로 출발하였다. 이때 상제님께서 써 주신 글은 다음과 같았다. 

  

天用雨露之薄則必有萬方之怨
地用水土之薄則必有萬物之怨
人用德化之薄則必有萬事之怨
天用地用人用統在於心


心也者鬼神之樞機也門戶也道路也

開閉樞機出入門戶往來道路神
或有善或有惡

善者師之惡者改之

吾心之樞機門戶道路大於天地   

 

  상제님으로부터 글을 받은 신경원은 이 글을 읽은 뒤에 명받은 대로 불살랐다. 이로부터는 더 이상 순검이 신경원의 집을 찾아오지 않았다. 

  이때 가뭄이 계속되어 곡식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전주에 사는 김병욱이 친척 김윤근(金允根)을 상제님께 급히 보내어 백성들의 어려운 상황을 알리게 했다. 상제님께서는 그 사정을 전해 들으시고, 전주 용머리고개에 사는 김덕찬(金德⋅, 1861∼1938)의 집에서 그가 기르는 돼지 한 마리를 잡고 삶게 하셨다. 상제님께서 그 고기를 종도들과 함께 나누어 드시니, 갑자기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일면서 폭우가 쏟아져 말라가던 논밭이 해갈되었다. 이를 보고 크게 놀란 김윤근은 “선생이 곧 만인을 살리는 하느님이시라.” 하며 감동하였다. 

  상제님께서는 용머리고개 주막에 계속 묵으시면서 여러 공사를 처결하셨다. 하루는 김광찬에게 한방(韓方) 의서인 『방약합편』02을 사오게 하시고, 그에게 “병욱의 집으로 가서 주묵(朱墨)으로 이 책 중에 있는 약명에 비점을 찍으라.” 이르셨다. 김광찬은 명대로 시행하여 상제님께 책을 다시 올렸더니, 상제님께서는 그 책을 열람하시고 불사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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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상제님께서는 김광찬에게 “네가 나를 어떠한 사람으로 아느냐⋅”고 물으시니, 그가 “촌 양반으로 아나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다시 상제님께서 “촌 양반은 너를 어떠한 사람이라 할 것이냐⋅” 하시니, 그는 “읍내 아전이라 할 것이외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의 말을 들으신 상제님께서는 “촌 양반은 읍내의 아전을 아전놈이라 하고, 아전은 촌 양반을 촌 양반놈이라 하나니, 나와 네가 서로 화해하면 천하가 다 해원하리라.”고 일러주셨다.

  아전은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을 보좌하며 행정실무를 담당하던 지방 관리를 말한다. 이들은 16세기 이후 양반 사대부 계층으로부터 차별을 받아 품관 진출이 억제되고 급료도 받지 못하는 중인층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더구나 각 고을에서는 지방 양반들이 수령을 돕기 위해 향청(鄕廳)을 만들어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면서 아전을 단속했다. 지방 양반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아전은 더 이상 아전 생활을 못하게 하는 등 아전에 대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자, 아전들은 양반들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아전들은 능력이 없으면서도 신분만으로 자신의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양반을 ‘양반놈’이라 욕했고, 양반들은 신분이 자신들보다 낮은 아전이 고을 백성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꼴 보기 싫어 ‘아전놈’이라 욕했다. 김광찬은 원래 아전 출신이었고, 상제님께서는 14대조인 강이온(姜利溫)이 도승지로 재직하다가 연산 10년(1504)에 연산군이 집현전에서 놀이한 일을 직언하여 효수를 당하는 참화를 입은 뒤로 낙향한 집안에서 탄강하셨기 때문에 인세에서는 몰락한 지방 양반의 신분이셨다. 상제님께서는 지방 양반들과 아전 사이의 갈등이 신분과 계급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므로 이들의 해원공사를 김광찬의 대화를 통해 보신 것이었다.03 

  이 무렵 백남신의 친척인 백용안(白龍安)이 술 도매 주점을 경영하면서 관부로부터 술 도매 독점권을 받아내니, 전주에 있는 수백 개의 작은 주막들은 술을 빚으면 불법으로 처벌받게 되었다. 이 소식에 상제님께서 묵고계신 전주 용머리고개 주막의 주인 김주보(金周甫)의 아내가 가슴을 치며 “다른 벌이는 없고 겨우 술장사하여 여러 식구가 살아왔는데, 이제 이것마저 폐지되니 우리 식구들은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울분을 터뜨리며 통곡하였다. 상제님께서는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어찌 남장군(男將軍)만 있으랴⋅ 여장군(女將軍)도 있도다.” 하시며 종이에 ‘女將軍’이라 써서 불사르셨다. 그러자 갑자기 김주보의 아내가 온 몸에 기운이 넘쳐서 바깥으로 뛰어나가며 호령하더니 수백 개의 주막 주모들을 일순간에 모아 백용안의 집을 습격하였다. 험악해진 사태에 깜짝 놀란 백용안은 당황하여 김주보의 아내를 포함하여 모여든 모든 주모들에게 사과하고 술 도매 주점을 당장 폐지할 것을 단단히 약속하였다. 그 다짐에 주모들은 각자 주막으로 돌아갔고, 백용안은 곧 술 도매 주점을 닫았다.  
  6월의 어느 날 밤, 한 도적이 백남신(白南信) 부친의 묘를 파고 두골을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백남신은 늦은 나이인 36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뒤로, 궁내부 주사, 전주진위대 향관, 탁지부 감관 등의 직위를 겸직하면서 단기간에 엄청난 재산을 끌어 모은 전주 제일의 부자였다.04 원래 가난한 아전 집안출신이었던 그가 단기간에 벼락출세를 하면서 엄청난 재물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배경은 그가 가진 뛰어난 수완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부친 묘가 명당이다 보니 그 발복(發福)을 보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던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도적이 자신의 부친 묘를 도굴하여 두골을 훔쳐갔으니, 백남신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백남신은 자신의 옛 부하였던 김병욱을 상제님께 보내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도록 간청 드렸다. 상제님께서는 촛불을 밝히시고 초상난 집과 같이 꼬박 사흘을 지새우신 뒤에, “두골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한적한 곳에 거처하되 다른 사람의 왕래를 끊고 기다리면 처서절에 그 도적이 두골을 가져오리라.”는 말씀을 백남신에게 전하게 하셨다. 상제님의 말씀을 전해들은 백남신은 전주 완산칠봉에 있는 백운정(白雲亭)에 올라가 명에 따랐다.  
  상제님께서는 한동안 머무시던 전주 용머리고개를 떠나 정읍 대흥리로 향하셨다. 이곳에서 상제님께서는 박공우로 하여금 각처의 종도들을 방문하여 21일 동안 매일 새벽 한 시간씩만 잠을 자도록 하라는 명을 전하게 하셨다. 종도들은 상제님의 명을 받고 잠을 줄이고 있었는데, 날짜가 흘러갈수록 점점 괴로워했다. 그중에서 차경석이 출타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부족한 잠 때문에 의식이 혼미하여져 집 문 앞 모시밭 가에서 쓰러졌다. 이를 보신 상제님께서는 단호하게 “천자(天子)를 도모하는 자는 모두 죽으리라!”고 경고하셨다.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의 천자가 되려고 하는 야망을 경계하신 것이었는데, 실제로 차경석은 훗날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후 천자가 되려고 도모하였다. 그는 1921년에 경남 함양군 덕유산 기슭 황석산(黃石山)에서 대규모의 제단과 제수(祭需)를 갖추어 고천제(告天祭)를 올리며 국호(國號)를 ‘시국(時國)’, 자신이 만든 종교의 이름을 ‘보화교(普化敎: 뒤에 보천교라 개칭)’라고 선포하였다. 또 자신이 천자(天子)로 등극할 것이라고 선언까지 했는데, 이로써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차천자(車天子)로 불렀다.05 물론 상제님의 말씀은 차경석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헛된 야망을 품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다 해당되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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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戊申]년 7월이 되었다. 아직도 백남신은 상제님의 명을 받들어 부친의 유골을 찾기 위해 백운정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백남신 부친의 묘 아래에 있는 동네의 동장(洞長)이 동회를 소집하여, 남의 묘가 도굴되었는데도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은 안 되는 일이니 모두들 두골을 찾아 나서되 만약 찾게 되면 백남신에게 말하여 상을 받게 하자고 마을 사람들과 결의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서 유골을 찾으러 다니고 있는데, 이때 굴총을 했던 도적이 지금 자기가 두골을 찾았다고 나서면 상을 타리라 생각하고 스스로 나타났다. 상제님의 말씀대로 과연 이 날은 처서절(음력 7월 27일)이었다. 이 도적은 상을 타기는커녕, 두골을 찾은 경위를 추궁 당한 끝에 도적임이 밝혀져 경무청으로 끌려갔다.  
  김병욱은 상제님을 찾아뵙고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아뢰었다. 상제님께서 김병욱에게 “그 도적을 어떻게 하려느냐⋅” 물으시니, 그는 “이미 경무청에 보냈나이다.” 하고 여쭈었다. 다시 상제님께서 “사람을 잘 타일러서 돌려보낼 일이거늘 어찌 그렇게 하였느뇨⋅ 속히 푸른 의복 한 벌을 지어 오라.”고 하시니, 김병욱은 상제님의 말씀을 백남신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백남신이 푸른 옷 한 벌을 급히 지어 상제님께 올렸더니, 상제님께서는 그 옷을 불사르시며 “이것으로써 그 사람을 징역에나 처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훗날에 종도들이 유골을 처서절에 다시 찾게 된 연유를 여쭌 일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상제님께서는 “모든 사사로운 일이라도 천지공사의 도수에 붙여두면 도수에 따라서 공사가 다 풀리니라.”고 일러 주셨다. 
  이 무렵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의 집 서쪽 벽에 이십사장(二十四將)과 이십팔장(二十八將)을 써 붙이시고, 박공우의 왼팔을 잡고 “만국대장(萬國大將) 박공우(朴公又)”라고 음성을 높여 부르신 일이 있으셨다. 이후에 공우가 상제님 심부름을 가려고 문밖을 나서면 갑자기 방포성(放砲聲)이 울리곤 하였다. 

 <대순회보> 1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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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주역의 효사(爻辭)를 풀이하여 사람의 운명에 대한 판단을 그림으로 설명한 책. 주로 평생 사주점(四柱占)을 칠 때 사용하며 당사주책(唐四柱冊)이라고도 한다.
02 1884년에 황도연(黃度淵:1807∼1884)이 그의 아들 황필수(黃泌秀)로 하여금 간행하게 한 의서(醫書). 황도연은 철종 이래로 무교동에서 찬화당(贊化堂)이라는 약국을 개설하여 당대 명의로서 소문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그는 『동의보감』을 기본으로 방대한 의서를 편찬하였는데, 1855년에는 『부방편람(附方便覽)』 14권을, 1868년에는 『의종손익(醫宗損益)』 12권과 이에 따른 부록 『손익초본(損益草本)』1권을, 1869년에는 『의방활투(醫方活套)』 1권을 편술하였다. 말년에 『의방활투』와 『의종손익』을 합본하여 새로운 체재로 엮어『방약합편』을 편찬할 것을 아들 황필수에게 명했는데, 황도연은 책이 간행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방약합편』에는 종래에 실용되어 오던 많은 처방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이해가 쉽도록 하였으며, 지금도 한의사들이 상비하는 의서 중 하나이다.
03「‘양반놈, 아전놈’」,『대순소식』 25호, 2005, 10쪽 참조.
04 백남신이 부자가 된 경위에 대해서는「신배 화재와 백남신의 관액」,『대순회보』 100호, 2009, 25-29쪽 참조.
05 차경석의 헛된 야망에 대해서는 「27년 동안의 헛도수」,『대순회보』 68호, 200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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