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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만동묘로 황극신을 옮기시는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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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09 조회3,9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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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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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戊申]년 10월 하순, 상제님께서는 중국 해원공사에 뒤이어 우리나라에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오는 공사에 착수하셨다. 상제님께서는 덕두마을에서 와룡리(臥龍里)01로 자리를 옮기시고는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루려면 황극신을 옮겨와야 한다. 황극신은 청국 광서제(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 오게 될 인연은 송우암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종도들로 하여금 밤에 시천주를 염송케 하시면서, 친히 그 음조를 불러 알려주셨다. 이어 “이 소리가 운상(運喪)하는 소리와 같도다. 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 어로는 곧 군왕의 길이로다. 이제 황극신이 옮겨져 왔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때 광서제의 숨이 끊어졌으니, 10월 21일(양력 11월 14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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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서제는 불과 4세에 청나라의 11대 황제가 되었고, 그에 따라 황극신이 응기되었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고, 장성한 후에는 혼란한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충신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1898년에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을 추진하는 등 개혁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보았으나, 이미 그동안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유린해 온 이모 서태후에게 밀려 궁궐 안의 중화전에 유폐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는 서양의 군대를 피해 잠시 서안으로 피신한 적도 있었지만, 황제 재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좁은 중화전에 갇혀 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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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서제가 서태후에 의해 개혁에 실패하고 쫓겨나 유폐되었던 중화전(中和殿). 중국 북경 고궁(故宮)의 태화전(太和殿) 뒤편에 있다. 

  

  이런 정황에서 상제님께서는 광서제에게 응기하여 있었던 황극신을 거두시어 조선으로 불러들이셨다. 그 방법은 장례 때 상여를 메고 가는 노랫가락으로 시천주를 읽는 것이었다. 운상할 때 부르는 노래는 지방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개 상여 앞에 선 사람이 “북망산천 멀다더니 내 집 앞이 북망일세.”, “이제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이나 일러주오.”라고 선창을 하면,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어∼노, 어∼노, 어∼노, 어∼노, 어∼어, 어∼, 어∼노.”02 하면서 그 뒤를 받는 형식이다. 상제님께서는 이 ‘어∼노’를 두고 ‘어로(御路)’라 하셨다. 즉 상여 메고 가는 노랫가락으로 시천주를 부르자 그로 인해 곧 군왕이 가는 길이 만들어졌고, 그 길을 따라 황극신이 광서제를 떠났으며 자연스레 광서제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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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중국 당국은 광서제의 유골을 조사하여 독약인 비상(砒霜) 성분이 다량 검출되었음을 확인하였고, 그에 따라 광서제는 병사한 것이 아니라 독살 당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광서제의 의복에도 다량의 비상 성분이 함유되어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광서제는 비상을 한 번에 많이 먹고 죽은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음식물을 통해 조금씩 먹었고 그것이 누적되면서 점차 병약해져 죽어갔음이 분명하다. 당시 광서제는 황제라고는 하나 아무런 실권이 없었으며, 유폐된 채 좁은 건물 밖으로는 아예 나오지도 못하였고, 음식물에 몰래 섞여 들어오는 비상 때문에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으며, 그나마 사랑했던 단 한 명의 여인 진비(珍妃)마저 서태후에게 죽임을 당한 후여서 삶에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던 광서제는 하루라도 빨리 죽고 싶었다. 광서제가 겪는 모든 고통의 배후에는 황제 위에 군림하는 서태후가 있었다. 그런데 광서제가 죽은 바로 그 다음날, 필적할 라이벌이 없었던 당대 최고의 권력자 서태후도 죽어버렸다. 따라서 이 일 역시 상제님의 공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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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된 화양서원과 만동묘의 조감도. 사적 제417호.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소재. 

  

  또 상제님께서는 황극신이 우리나라로 오게 될 인연은 송시열의 만동묘에서 비롯된다고 밝혀주셨다. 송시열은 명나라의 후계자인 조선이 명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을 연호로 사용하고, 만동묘를 지어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 준 명나라 14대 황제인 만력제(萬曆帝)와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의 신위를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송시열은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군신관계로 파악하고 명이 멸망한 이후에는 조선이 중화문명의 계승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03 송시열이 죽은 뒤,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는 1703년에 스승의 유지(遺志)를 이어 충북 괴산에 만동묘를 세우고 명 황실에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만동묘의 위세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만동묘의 제사는 화양서원에서 주관하였는데, 그 서원에서 ‘아무 날 아무 시에 만동묘에서 제사를 거행하니, 제수전에 필요한 얼마를 당장 갖다 바쳐라.’는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송하면, 이유 불문하고 전답을 팔아서라도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여 무조건 대어야 했다. 화양묵패는 벼슬아치에게든 양반에게든 서민에게든 신분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발송되었고, 이에 불응하면 당장 끌려가 협박과 폭언을 듣고 매를 맞는 등 심한 능욕을 당했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 서원의 행패야 심했던 것이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만동묘를 등에 업은 화양서원의 횡포야말로 가장 극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출세하기 전 이곳저곳을 떠돌던 젊은 시절에 만동묘 화양서원을 지나다가 그곳의 유생들에게 잡혀 큰 봉변을 당했던 일이 있었고, 그 치욕을 결코 잊을 수 없어 정권을 잡자마자 1865년에 만동묘에 모셔진 명 황실의 신위를 서울로 옮겨버리고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아예 폐쇄시켜버렸던 사건은 꽤나 유명하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유림들은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다시 복원시켰으나 일제는 1942년에 강제로 철거해버렸고, 그 후 한동안 터만 남아 있다가 최근에 다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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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곡과 청도원의 위치(지도 출처: 포털사이트, 다음)

  

  명나라 황실의 신위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라는 존재는 중국을 사대한다는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지 간에 지난 날 명 황실을 제사 지내왔다는 사실은 황극신이 우리나라로 넘어올 수 있게 되는 인연을 만들어주었고, 그것은 우리나라가 중국을 능가하는 문명을 지니는 상등국이 될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다시 상제님께서는 와룡리에서 동곡으로 돌아오셔서 “청주 만동묘(萬東廟)에 가서 청국(淸國) 공사를 행하려 하나 길이 멀고 왕래하기 어렵고 불편하므로 청도원(淸道院)에서 공사를 행하리라.” 하시고 동곡과 이웃하고 있는 마을인 청도원으로 가셨다. 그때 청도원에는 류찬명(柳?明)과 김송환(金松煥)이 살고 있었다. 상제님께서는 류찬명의 집에서 천지의 대신문(大神門)을 여시고 공사를 행하셨으니, 김송환 역시 옆에서 상제님의 시중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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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청도원 / 現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대순회보> 1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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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01 現 전북 정읍시 정우면 회룡리 괴동(槐洞)마을. 와룡마을과 신기(새터)마을이 합쳐져서 괴동마을이 되었고, 와룡마을은 괴동 남쪽에 있었다.『한국지명총람12-전북편(하)』, 한글학회, 2003, 447쪽 / 임남곤, 『향리지』, 2002, 552쪽)

02 지방에 따라 말이 다르기 때문에 ‘오~호~오’, ‘어~너’, ‘어~허’ 등으로 이 소리가 표기 되기도 한다. 상제님께서 주로 활동하신 전라도, 그리고 충청도에서는 이 소리를 ‘어~노’ 라고 했다.

03 김준석, 『조선후기 국가재조론의 대두와 그 전개』(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231∼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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