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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2.15 조회4,9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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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1638m로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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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의 북부 고성군에 위치한 명산으로 이곳은 흑운암(黑雲岩)과 화강암(花崗岩)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기암괴석(奇岩怪石)이 많으며 1만 2천 봉의 곳곳에 폭포, 못, 절 등이 있어 그 경치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위치상으로 내무(內霧)재의 서쪽을 내금강(內金剛), 동쪽을 외금강(外金剛), 바다에 솟아 있는 샘물을 해금강(海金剛)이라 부르며 특히 외금강에는 신만물초(新萬物草), 구만물초, 내만물초가 있다. 또한 워낙 명산(名山)이라 금강산의 이름도 많다. 문헌에 나오는 이름만도 여덟 가지나 된다.

  먼저 상악(霜岳)산, 풍악(楓岳)산, 개골(皆骨)산 처럼 자연계통의 이름이 셋이요. 금강(金剛), 열반(涅槃)산, 지달산, 중향(衆香)산 같은 불교계통의 이름이 넷이며, 봉래(蓬萊)산 같은 도교계통의 이름이 하나다. 이중 가장 오래된 이름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상악산이다. 신라 제사지(祭詞志)에 보면 고성(高城)군의 상악이라 나온다. 그 아래에 있는 설악(雪岳)산과 대조되어 흥미롭다.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 설악산의 산봉들은 완만한 육산(肉山)이라 눈이 오래 남아 있어 눈 산으로 보이고, 금강산 산봉들은 들쑥날쑥한 골산(骨山)이라 눈이 흘러내려 서리산으로 보인다. 풍악산은 가을 단풍이 유별났기에 얻은 이름일 것이고, 개골산은 산 체 모두가 살은 없고 온통 뼈(骨=岩)로 이루어 졌기에 얻은 이름일 것이다. 속세(俗世)의 모든 속사(俗事)가 살(肉)이요, 사람의 사람다운 순수한 본질이 뼈(骨)라 하고 이산에 드는 것으로 본질환원이 된다 하며 개골산이라 했다는 이설도 있다.

  세조때 생육신 가운데 한분인 남효온은 『유금강산기』에서 스님뿐만 아니라 불도들도 이산에 들어가 죽어야 열반에 이른다 하며 열반산이라 불린다 했다. 불교에 있어 최고신이 제석(帝釋)이요 바로 제석이 사는 우주의 중심 성산이 수미산이며 수미산이 다른 이름이 금강산이다. 부처님의 몸을 금강신이라고 하고 부처님의 지혜를 금강지라 함은 이에서 비롯한 말이다. 전기 남효온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이래로 금강산이 중향산(衆香산)으로 불렸다던 데 중향은 모든 산수와 누각에서 향기가 난다 하여 중향산이라 불리워진 것이고 스님이 수도할 때 네 구석에 탱자나무칼이라 하여 가시 돋친 궐은 세워놓고 외부의 유혹과 내부의 사심을 경계한다던데 금강산에 들면 그 탱자나무 궐 속에 드는 것이라 하여 지달산이라 했을 것이고, 산해경(山海經)에 동해의 동족에 불사약이 자라고 선인(仙人)이 있는데 영주산이 한라산이요, 방장산이 지리산이며 봉래산이 금강산이라 하여 봉래산으로 불려졌을 것이다. 또한 철에 따라 분류한다면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금강산이 얼마나 명산인지 그를 예찬해 놓은 글들을 모아보는 것도 무위하지 않을 것 같다. 먼저 외국 사람들이 예찬한 것부터 들추어 보면 이미 당나라 때부터 「고려 국에 태어나 금강산 한번 구경하고 싶다」(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는 것이 중국 사람들의 소원으로 전해 내려왔다. 얼마나 금강산이 소문나 있었기에 원(元)나라 황제 영종(英宗)은 살았을 때 금강산에 사신을 보내어 시주를 했고 죽어서는 넋만이라도 혼여(魂與)를 태워 금강산을 구경케 했을까? 표훈사에 영종의 시주비가 서훈사에 영종의 시주비가 서 있었다던 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지 모르는 일이다. 도취한 것은 동양사람뿐이 아니다. 1890년대 금강산을 구경했던 이사벨라 비숍여사는 『금강산은 두 눈으로 보여지는 산이 아니다 서양언어로는 이를 표현하는데 한계를 느꼈다. 그러하니 어떤 뭣을 어떤 말과 어떤 글로 표현할 수 있으랴』했다. 제3의 심안(心眼)으로 보여진다는 그야말로 언설을 초월한 예찬이다.

  고려 때 대문가인 이인로(李仁老)는 금강산을 이렇게 읊었다. 「가경(佳境)을 두고 가기만 하는 내 발이 야속하기만 하다. 사람이 뒤로 걷지 못함을 금강산이 나로 하여금 한탄케 하는구나」즉 사람은 뒤에 눈이 안 달렸을까 하는 말이다. 얼마나 경치가 좋아 뒤로 걷고 싶었을까. 또 고려 삼은중 한 분인 이색의 아버지 이곡의 예찬을 보면 『왜 좋은 경치가 이토록 한데로 모여 있어야 하나 읊을 시어(詩語)가 다하여 종이를 비워두고 엉엉 통곡한다』라고 하였다. 조선의 손꼽는 유학자 송시열까지도 다음과 같이 읊지 않을 수 없게 한 금강산이다. 『구름이 산과 더불어 일어 구름과 산의 한계를 모르겠더니 구름이 돌아가 산이 홀로 서니 일만 이천 봉이라』한말의 기인 정수동이 아내가 진통을 하자 순산제인 불수산(佛手散) 약을 지으러 가는데 금강산 구경간다는 친구를 만나 불수산 약은 까맣게 잊고 유람길을 떠난다. 한 해 동안 금강산을 유람하다.

  유점사(楡岾寺)에서 천불수(千佛手)를 보고야 불수산 약이 생각나 부랴부랴 집에 돌아오니 그날이 바로 낳은 아기의 돌날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금강산의 매력을 행동으로 예찬한 것이다. 육당 최남선이 『금강산 예찬 첫머리에서 중국의 곤륜산, 인도의 설산(에베레스트산), 유럽의 알프스산, 미국의 록키산 등 세계 명산들이 모여 이 세상의 산왕(山王)을 뽑는데 금강산이 대관 하는 과정을 희곡으로 꾸미고 있다』 금강산 예찬치고는 압권이 아닐 수 없다.

  이상은 문헌에 남긴 예찬인데 지금 금강산 비로봉(1천6백38m)에 『금강산은 세계의 명산입니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미시령 고개를 넘어 금강산 첫 봉우리가 신선봉이라 금강산을 한 발자국 디뎠으니 포덕천하에 더욱 정진해야 할 것이다. 

<대순회보> 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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