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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야기사명당(四溟堂)에 얽힌 일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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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3.24 조회5,0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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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

 

  유점사터에서 개울을 따라 가다 보면 왼쪽 구연동과 앞쪽의 효운동에서 흘러내리는 두 개울이 합쳐지는 곳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구연동 쪽으로 약 500m쯤 올라가면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푸른 물을 담고 있는 선담(船潭)이 자리하고 있다. 개울 양쪽을 가로지른 큰 바위벽 아래 가로로 길게 패인 곳에 물을 담고 있는 모양이 마치 배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선담을 끼고 계곡을 따라 오르면 고산식물인 만병초(萬病草)이 자라고 있어 이 일대의 기후가 몹시 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곡 안으로 들어설수록 눈처럼 희게 빛나는 바위들과 수정처럼 맑은 물줄기가 흐르는 가운데 흰비단폭포와 두줄폭포, 구련폭포 등이 있고 그 아래에 드리운 소(沼)들이 구연동의 계곡미를 더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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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폭포들을 지나 계곡 깊은 곳에 이르면 우거진 숲 위로 꼭대기가 둥그스름하게 생긴 향로봉(香爐峯)이 보인다. 비단 위에 보석을 드리운 듯한 향로봉을 바라보며 조금 더 올라가면 금강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인 중내원(中內院)이 나타난다. 중내원은 구름 위에 떠서 잠자고 여름철에도 솜옷을 입고 수도하는 곳으로, 여기서 겨울을 난 사람은 어떤 노승과 선객(仙客) 둘뿐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수도하던 사명당 유정(惟政, 1544~1610)은 전란이 일어나자 급히 유점사로 내려가 승병(僧兵)을 조직했다고 한다. 그래서 임진왜란과 관련해 사명당의 행적을 다룬 이야기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으니, 그 일화(逸話) 몇 가지를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오랜 기간 유점사에서 살던 사명당이 여러 제자들과 함께 미륵봉 아래에 있는 중내원에 들어가 지낼 때의 일이다. 1592년 왜군은 우리나라의 국방이 소홀해진 틈을 타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두 달도 채 못 되는 사이에 도성(都城)까지 진군한 왜군은 강원도 땅에도 진출하였다. 이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은 금강산 유점사까지 쳐들어왔다.

  당시 중내원에 있던 사명당은 젊은 스님 한 사람을 유점사에 내려 보내 적군의 동정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곳에 다녀온 스님이, “왜군들이 유점사에 들어오자 미처 피난하지 못한 스님 수십 명을 결박해 놓고 금, 은을 비롯한 값비싼 보물을 내놓으라고 다그치며 그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사명당은 우선 사람 목숨부터 살려야겠다고 하면서 서둘러 유점사로 가려고 했다.

  그러자 여러 스님들이 그의 앞을 막으면서 “스님께서 동료들을 구하시려는 뜻은 더없는 자비심의 발현입니다. 그렇지만 범의 수염을 건드리는 것은 무익한 일이며 오직 화(禍)만 불러올 뿐입니다.”며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사명당은 주저 없이 유점사로 내려갔다.

  사명당이 유점사 근방에 이르니 왜군들이 사방에서 떼를 지어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자기 곁에 아무도 없다는 듯이 정문을 향해 나아갔다. 왜군들은 더러운 몰골을 한 채 정문 주변 풀밭에 앉아 있기도 하고 누워있기도 하였으나, 칼과 창을 늘어세워 놓은 것이 보는 이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사명당은 곁눈을 팔거나 멈춰서는 일도 없이 지팡이를 휘저으며 정문 계단을 거쳐 안으로 들어갔다. 적들은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그를 쳐다볼 뿐 감히 막아서지는 못했다. 산영루를 지나 법당 앞으로 다가가니 스님들이 모두 섬돌 아래에 묶인 채 계단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그런데도 사명당은 그들을 본체만체하며 앞으로만 걸어갔다.

  이때 법당 앞에 있던 왜군들은 문서를 다루고 있었다. 잠깐 살펴보니 군사들의 명단 같은 것이었는데 잘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적장들이 의자를 좌우에 늘여놓고 앉아있었으나 사명당은 아랑곳 하지 않고 법당 안을 왔다갔다 거닐면서 왜장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러자 적장 한 사람이 일어서서 사명당 앞으로 다가오더니 글자를 써서 보였다.

   “그대는 글을 아는가?”라고 묻는 것이었다. 사명당이 “대강 볼 줄 아오.”라며 글로 답하니 그가 또 묻기를, “당신네 나라에서는 칠조(七祖)를 숭상한다는데 그것이 사실인가?”라고 하였다. “육조(六祖)은 있지만 어찌 칠조가 있겠소.”라고 답하니 “그렇다면 어디 육조의 이름을 써보라.”고 하였다.

  사명당이 육조의 이름을 하나하나 써서 보여주었는데, 그 글씨가 활달하고 자유분방하면서도 상당한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사명당의 인품과 높은 식견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왜장은 금강산의 스님 가운데 이런 고매한 인격과 식견을 갖춘 스님이 있음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그러면서도 “이 절의 금은보화를 다 내놓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살아서 나가지 못할 줄 아시오.”라고 위협했다.

  그러자 사명당은 “우리나라에 금, 은이 산출되지 않아 쌀과 베를 돈으로 쓰고 있고 금은보화는 나라창고에도 조금밖에 없소. 더구나 산골에 있는 우리 중들은 부처님께 공양을 할뿐 산나물이나 먹고 삼베옷을 걸치고 다니며 이따금 마을을 돌아 밥을 빌어먹는 것이 고작이오. 그러니 어찌 금, 은과 같은 보물을 가지고 있겠소. 좀 전에 법당에 들어오면서 보니 아무 죄 없는 스님들이 섬돌 아래 묶여있던데 아무리 그들의 살을 도려내고 뼈를 추린들 어찌 일호(一毫)의 보배가 있으리오. 그러니 그들을 놓아주는 것이 상책일 듯하오.”라고 했다.

  그 왜장은 사명당의 글을 읽고 크게 감동한 모양인지 옆에 있던 동료들에게도 돌려 보이면서 그 내용을 설명했다. 그러자 왜군들의 기색이 달라졌고 왜장이 수하들을 불러 무어라 지시하니 곧 섬돌 아래 있던 스님 20여 명이 풀려났다.

  사명당은 지팡이를 흔들기도 하고 끌기도 하면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가 가고 난 후 절의 정문에는 왜장이 쓴 다음과 같은 글이 나붙었다.

   “이 절에는 도를 아는 도승(道僧)이 계시니 여러 군대들이 다시는 들어오지 말지어다.” 다음날 왜군들은 유점사에서 물러갔고 이후 다시는 그곳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대순회보>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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