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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성이야기도주님 탄강치성(道主任 誕降致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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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1.11 조회5,0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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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교무부   


  오는 12월 28일은 구천상제님(九天上帝任)의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이으신 도주님께서 탄강하신 날이다. 도주님께서는 구한말(舊韓末)인 1895년[乙未年] 12월 4일[陰]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01에 인간의 몸으로 탄강하셨다. 함안 조(趙)씨 29대손이신 도주님의 존휘는 철제(哲濟)요, 자함은 정보(定普)이시고 존호는 정산(鼎山)이시다. 

  조부이신 조영규(趙瑩奎, 1861~1905)께서는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승정원주서(承政院主書) 등을 역임하셨으며 일본과의 통상조약에 반대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하셨으나,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심화(心火)로 토혈 서거(吐血逝去)하셨다. 이러한 조부의 뜻을 받들어 도주님의 부친과 숙부들도 반일운동에 힘을 기울일 만큼 민족정신과 애국심이 투철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도주님께서 이 땅에 탄강하신 것은 위기에 처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구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상제님의 뜻을 받들어 상극(相克)에 지배되어 진멸지경에 처한 온 세상을 바로잡아 상서(祥瑞)가 무르녹는 지상선경(地上仙境)을 건설하고자 오신 것이다. 즉 상제님의 종통(宗統)을 계승하여 삼계(三界) 개벽공사(開闢公事)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나가기 위해 오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연원(淵源)은 강증산 상제의 대순(大巡)하신 유의(遺意)의 종통을 계승한 조정산 도주의 연원이라 한다.”(『道憲』제13조)라고 하신 도전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종통이란 도의 생명이며 진리인데, 이 종통이 바르지 못하면 법(法)이 있을 수 없고 경위(經緯)가 바로 설 수 없으며, 그 속에서는 생명이 움틀 수도 만물만상을 이루어낼 수도 없다.02 일찍이 상제님께서 “속담에 ‘맥 떨어지면 죽는다.’ 하나니 연원(淵源)을 바르게 잘하라.”(교법 2장 43절)고 하신 연원과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 바로 종통이다. 따라서 대순진리(大巡眞理)를 신봉하는 도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종통에 대한 바른 이해이며, 이것이 바탕이 되었을 때 진정한 대도(大道)의 진법(眞法)을 닦아나갈 수 있다. 이번에 “도주님 탄강치성”을 맞이하여 상제님의 말씀과 도주님의 행적을 통해 종통계승의 천부적(天賦的) 신성성(神聖性)에 관한 내용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상제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난 도주님의 종통계승 


  1903년 어느 날 상제님께서 “내가 하는 일이 어찌 이렇게 더딜까.” 하고 한숨지으시니, 시좌하고 있던 김보경이 상제님께 그 연고를 여쭤보았다. 상제님께서는 “내가 신명을 시켜 진인(眞人)을 찾아보았더니, 이제 겨우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지라. 내 일이 이렇게 더디구나.”라고 하시자 종도들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때에도 그 때가 있고, 사람 중에도 그 사람이 있노라(時有其時 人有其人).”고 하시며 그들을 타이르셨다.03 물론 이때 상제님께서 진인이 누구라고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으셨지만 당시 도주님의 춘추가 9세셨던 것을 감안하면 상제님의 공사를 이어가실 진인이 바로 도주님이심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908년에는 상제님께서 ‘무내팔자 지기금지 원위대강(無奈八字至氣今至願爲大降)’의 글을 지으셨는데 그 내용 중에 “十二月二十六日再生身 ○○”(공사 3장 41절)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에 관해 도전님께서는 12월 26일 재생신은 12월 4일로서 1년 운회의 만도(滿度)를 채우실 도주님의 탄생을 뜻하는 것이라고 밝혀주셨다.04 12월 26일에 4일이 더해지면 1년 12달의 운회가 꽉 차는 만도수(滿度數)가 된다. 1년 12달, 24절후, 360일의 변화는 도(道)를 상징하는데, 이러한 1년의 완성은 곧 상제님께서 짜놓으신 도수(度數)를 풀어나가 진법을 완성하실 분이 12월 4일생임을 예시해 놓으신 것이다. 

  상제님께서 1909년 4월 28일에는 이치복과 김보경 등 몇몇 종도들을 데리고 대전 신탄진(新灘津)의 철로 주변에 가셔서 “올 때가 되었는데”라고 혼자 말씀을 하시며 멀리 바라만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남쪽에서 기차가 달려오는 것을 보시고 무척 반기시며 “이제 나의 일은 다 되었도다. 남아 15세면 호패(號牌)를 찬다 하나니 무슨 일을 못하리오.”05라고 말씀하셨다. 이 일화는 도주님의 부친과 숙부들이 일본 경찰을 피해 창원역에서 신의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족과 함께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하는 길에, 당시 15세시던 도주님께서 봉천명(奉天命)하신 일과 부합한다. 

  상제님께서 화천(化天)하시기 며칠 전에는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너라.”(행록 5장 29절)고 말씀하셨다. 이로 인해 상제님을 따르던 종도들 중에는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후 모악산(母岳山) 금산사(金山寺)에 머물고 계신다고 믿고 이곳을 중심으로 교단을 형성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8세기 중엽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금산사를 중창할 때 미륵과 지장 두 보살의 계시를 받아 용추[龍沼]를 숯으로 메우고 솥을 올려놓은 위에 미륵불을 봉안한 것은 증산(甑山) ? 정산(鼎山) 양산(兩山)의 진리를 암시하여 도의 근원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06 그러므로 상제님의 말씀은 증산에서 정산으로 이어지는 천부적인 종통계승의 이치를 밝혀놓으신 것이다.    


도주님의 종통계승 


  도주님께서는 15세 되시던 해인 1909년 4월 28일에 일제의 압박을 피해 부친, 숙부 등과 함께 고국을 떠나 만주 봉천으로 망명길에 오르셨다. 그 과정에서 구천상제님의 천명(天命)을 받들고 인류와 신명계의 겁액을 풀어나갈 천지공사를 위한 공부를 시작하셨다. 도주님께서 우주 변화의 기준이 되는 수(數)07인 15세 시에 봉천명하심은, 진주(眞主)로서 상제님께서 새롭게 짜놓으신 우주 조판의 도수(度數)를 풀어나갈 참된 주인이 바로 도주님이심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만주 봉천에서 도주님께서는 동지들과 구국운동에 활약하시다가 조선뿐만 아니라 동양 천지가 거대한 혼란 속에 빠져 있음을 절감하시고,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세워 입산 공부에 진력하셨다. 그러다가 9년의 공부 끝인 정사년(丁巳年: 1917)에 태을주(太乙呪)로 본령합리(本領合理)를 이루시고 상제님의 삼계대순(三界大巡)의 진리를 감오(感悟)하셨다. 이때 도주님의 춘추는 23세셨는데, 이것이 태을주 23자(字)와 일치함도 여합부절(如合符節)한 천부적 종통의 이치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후 도주님께서는 정화수 한 그릇을 받들고 밤낮으로 공부에 진력하시던 중 상제님의 계시를 받고 가족들과 함께 만주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셨다. 원평 황새마을에 자리를 잡은 도주님께서는 1919년 정월 보름에 이치복을 앞세우고 전북 정읍 마동(馬洞) 김기부의 집에 거쳐하고 계시던 상제님의 모친과 누이동생이신 선돌부인, 그리고 따님 강순임(姜舜任)을 만나셨다. 그분들 중에서 선돌부인은 특히 도주님을 반겨 맞으며 “상제께서 재세 시에 늘 을미생(乙未生)이 정월 보름에 찾을 것이로다.”라고 하셨다며 도주님께 상제님께서 남기신 봉서(封書)를 내어드렸다.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이후 지난 10년간 많은 사람들이 선돌부인을 찾아왔지만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 조건(을미생, 정월 보름)을 만족시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도주님께서는 그러한 조건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선돌부인이 상제님의 유지와 종통이 담긴 봉서를 흔쾌히 전해드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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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전북 구태인의 무극도본부(無極道本部) (전일희 소장, 『井邑郡誌』, 1936년)

  
  또 하루는 선돌부인이 도주님께 상제님께서 동곡(구릿골) 약방에 비치하셨던 둔궤(遁櫃)08가 천지도수의 조화둔궤임을 고하고 하루속히 그것을 찾도록 권하였다. 이에 도주님께서는 1919년 9월 4일에 몇몇 종도로 하여금 정읍 대흥리의 보천교(普天敎) 본부에 있는 둔궤를 찾아 통사동(通士洞) 재실로 옮기게 하셨다. 다음 해 도주님께서 재실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면불식(不眠不食)으로 공부에 임하시자 둔궤가 봉안된 곳에서 벼락 소리가 나더니 저절로 열렸다. 이전까지 둔궤는 자물쇠로 잠겨 있어서 차경석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열지 못해 단지 보관만 했었다. 그런데 도주님께서 둔궤를 찾아 공부에 임하시자 주인을 만난 듯 저절로 열린 것이다. 이것 또한 도주님께서 상제님의 종통을 이으신 진주(眞主)이심을 분명히 드러내주는 사건이었다. 
  1921년 9월 5일에는 도주님께서 권태로 외 네 사람에게 상제님의 성골(聖骨)을 동곡에서 통사동 재실로 모셔오게 하셨다. 당시 상제님의 성골은 동곡 뒷산 솔개봉 기슭인 장탯날에 초빈(草殯)09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것은 상제님께서 화천하실 때 “내가 … 죽은 후에는 묶지도 말고 널 속에 그대로 넣어두는 것이 옳으니라.”(행록 5장 35절)고 하신 유언이 계셨기 때문이다. 그 후 도주님께서는 13년 만에 상제님의 성골을 모시고 와서 장자(長子)의 예로써 장례를 치르셨고 강세일인 9월 19일에는 치성을 모셨다. 결과적으로 상제님의 유언은 종통을 계승하여 천지공사를 이어가실 도주님에 대한 안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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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도주님께서 종통을 계승하신 일들 외에도 도주님의 정통성을 드러내주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하나는 도주님께서 상제님께서 49일 동안 공부하셨던 대원사(大院寺)에 들어가셔서 백일공부를 마치신 날, 종도들에게 “이곳이 바로 상제께서 천지신명을 심판한 곳이니라. 아직 응기하여 있는 것을 내가 풀었노라”(교운 2장 21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도주님께서는 삼계대권을 주재(主宰)하시는 권능의 소유주이신 상제님께서 대원사에서 천지신명(天地神明)을 심판하셨음을 최초로 밝히심과 동시에 종통계승자로서 아직 그곳에 응기해 있던 신명들을 백일공부를 통해 풀어놓으셨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도주님께서 1925년 전북 구태인 도창현(道昌峴)에 도장을 마련하시고 무극도(无極道)를 창도하시면서 영대(靈臺)에 상제님의 신위(神位)를 봉안하신 일이다. 이때 상제님의 신격이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上帝)’이심을 만천하에 공포하시고 종지(宗旨)와 신조(信條) 및 목적을 밝혀주셨다. 상제님을 따르던 종도들이 만든 교단에서는 상제님의 신격을 천사(天師), 성사(聖師), 대선생(大先生), 옥황상제(玉皇上帝), 미륵세존(彌勒世尊) 등 제각기 호칭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의 신격을 분명히 밝히셨을 뿐만 아니라 강세 이전의 신격이 ‘구천대원조화주신(九天大元造化主神)’이셨음도 밝혀주셨다.10 이러한 상제님의 신격에 대한 파악은 오직 종통을 계승하신 진인(眞人)이라야 가능한 일인데, 이것 또한 도주님의 종통계승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지금까지 상제님의 말씀과 도주님의 종통계승의 과정을 통해 상제님께서 광구천하(匡救天下)와 광제창생(廣濟蒼生)하시고자 이 땅에 강세하셔서 행하신 천지공사를 이어가실 유일한 분이 도주님이란 사실을 확인해 보았다. 상제님의 유지(有志)를 받들어 종통을 이으신 도주님께서는 종단을 건립하시고 전무후무한 대도(大道)의 진리를 선포하셨으며, 50년간의 공부(工夫)를 통해 도인들의 각종 수도방법과 의식행사 및 준칙 등을 마련해 놓으셨다. 이러한 도주님의 진법(眞法)은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이으신 도전(都典)님께 고스란히 전해져 오늘날 대순진리회의 수도법방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도주님께서는 대도의 진법을 마련하시기 위해 인간의 언어로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상제님께서 짜놓으신 도수를 풀어나가시며 50년공부를 완성하셨다. 따라서 도주님 탄강치성을 맞이하는 모든 도인들은 종통에 담긴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도주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법방을 수행함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힘써 나가야 한다. 또한 도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그것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겠다는 심정으로 포덕 · 교화 · 수도에 성경신(誠敬信)을 다해야 할 것이다. 

 

 《대순회보》 1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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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현재의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會山里) 회문(會文)마을.
02 「종통(宗統)은 도(道)의 생명」『대순회보』5호, p.2 참고.

03 『증산의 생애와 사상』(1989), pp.103~104.
04 『대순지침』, p.13.
05 「문답으로 알아보는 종통」 『대순회보』111호, p.101 참고.
06 『대순지침』, p.15.
07 약 4,000년 전 우(禹)가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령스러운 동물인 신구(神龜)의 등에 낙서(洛書)가 그려져 있었다. 그 수리를 보면 중앙(5)을 중심으로 좌우(3과 7), 상하(9와 1), 양 대각선(4와 6, 2와 8)의 합은 각각 15가 된다. 이것은 만물이 15에 의해 생장염장(生長斂藏)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조석(潮汐)이 15일을 기준으로 움직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만물의 근원인 수(水)는 15를 기준으로 변화한다. 하늘 360 주천(周天)을 15로 나누면 24가 되고 이것은 시간으로는 24절기, 공간으로는 24방위가 된다.(「문답으로 알아보는 종통」 『대순회보』111호, p.106.) 
08 이 궤는 상제님께서 1907년 4월에 동곡약방을 여실 때 만든 것으로,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이후 김형렬의 셋째 딸인 김수부(金首婦, 1890~1911)가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수부가 죽을 때 차경석의 이종매(姨從妹)인 고수부(高首婦, 1880~1935)가 이 궤를 가져갔고 다시 보천교의 교주 차경석에게 넘어 가 있었다.(「문답으로 알아보는 종통」 『대순회보』111호, p.102.)

09 사정상 장사를 속히 치르지 못하고 주검을 방 안에 둘 수 없을 때, 한적한 곳에 관을 놓고 이엉 따위로 그 위를 이어 눈비를 가릴 수 있도록 덮어 둔 것.(「네이버 국어사전」 참고) 

10 『대순진리회요람』, 대순진리회출판부, 2010,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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