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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신명추분(秋分) 절후를 관장하는 정지절(程知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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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8.27 조회4,9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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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武勇)이 뛰어났던 정지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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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절(程知節, ?~665)은 제주(濟州) 동아[東阿, 현재 산동성(山東省), 아성(阿城)] 사람으로 원래 이름이 교금(齩金)이었는데 지절로 바꾸었다. 정지절은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말 타고 창 쓰기를 잘했다.

 

 

 

수나라는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의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을 재통일했다. 하지만 양제(煬帝)의 고구려 원정이 처참한 실패로 귀결되고 원정의 실패는 전국적인 반란으로 이어졌다. 혼란을 수습할 의지를 상실한 양제는 아무런 대책을 시행하지 않았고, 이후 수나라는 중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였다. 중국은 이제 거대한 도둑의 소굴로 전락했다. 정지절은 이러한 시기에 수백 명의 무리를 모아 자신의 고향을 지켰다.

 

천하대란의 혼란기에 정지절은 이밀(李密, 582~618)01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이밀은 자신의 휘하 병사들 중 팔천 명을 뽑아 네 명의 표기장군(驃騎將軍)에게 예속시키고 이를 다시 좌, 우로 나누어 자신을 보위케 하였다. 이밀은 이들을 내군(內軍)이라 불렀는데 “이로써 백만 군대를 당해낼 수 있다.”고 자랑했다.

 

정지절은 이 네 명의 표기장군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때 이밀은 왕세충(王世充, ?~622)02과의 결전에 대비하기 위해 북망산(北邙山)에 진영을 쳤는데 내군이었던 정지절이 이밀을 수행했다. 이밀은 단웅신(單雄信)에게 외마군(外馬軍)을 맡게 하여 언사(偃師) 지역에 진영을 치도록 했다. 왕세충이 단웅신을 습격하자 이밀이 정지절과 배행엄(裴行儼)을 보내 돕도록 했다. 그런데 배행엄이 날아온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다. 정지절이 그를 구하러 달려가 적병 수 명을 물리치고 배행엄과 함께 귀환하려 했다. 왕세충이 추격병을 보내 이들을 쫓았는데, 정지절이 추격병의 창을 빼앗아 이들을 물리치고 위기를 모면했다.

 

정지절은 이밀이 왕세충에 패배하자 포로로 잡혔다. 왕세충은 정지절과 진숙보[秦叔寶, 대설(大雪) 절후를 관장]를 장군으로 삼아 그들을 후대했다. 하지만 정지절은 왕세충의 위인됨을 싫어했다.

 

정지절이 진숙보에게 말했다.

 

“왕세충은 그릇과 도량이 얕고 좁으며 망령된 말을 많이 하고 저주하거나 맹세하는 것을 좋아하니 이는 늙은 무당일 뿐입니다. 어찌 난세를 평정할 주군(主君)이겠습니까?”

 

왕세충이 당의 군사와 구곡(九曲)에서 싸우는데 정지절과 진숙보가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진(陣)에 있었다. 정지절과 진숙보는 왕세충을 찾아가 말에서 내려 인사하고 말했다.

 

“우리들이 공의 특별한 예우를 받아 깊이 그 은혜에 보답하려 하였는데 공의 성격은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참소하는 말을 좋아하니 저희가 몸을 의탁할 곳이 아닙니다. 청컨대 여기서 작별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정지절과 진숙보가 말에 올라 좌우 수십 명의 기병과 함께 당에 투항하니 왕세충이 이들을 감히 추격하지 못했다. 보통 사람이 이런 경우에 처한다면 몰래 그 사람을 떠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典經』에도 ‘고인절교불출오성(古人絶交不出惡聲)’이라는 말이 있는데, 정지절은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밝히고 소신대로 행동하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를 잊지 않았다.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은 투항한 정지절과 진숙보를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에게 배속시켰다. 이세민은 평소 이들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후하게 예우하고 정지절을 좌삼통군(左三統軍)으로 진숙보를 마군(馬軍)총감으로 삼았다.

 

진왕부(秦王府)에 소속된 정지절은 이후 이세민과 더불어 송금강(宋金剛, ?~620)03, 두건덕(竇建德, 573~621)04, 왕세충을 무찌르는데 선봉에 섰다. 정지절은 얼마 있다가 좌일마군총관(左一馬軍總管)을 맡았는데 적의 깃발을 빼앗고 적의 성에 제일 먼저 오른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 공로로 숙국공(宿國公)에 봉해졌다.

 

변치 않는 충성으로 당태종을 보좌한 정지절

 

당이 중국을 재통일하자 내부의 권력 투쟁이 전개되었다. 권력 투쟁의 당사자는 태자 이건성과 이세민이었다. 이들은 고조 이후의 황제 자리를 놓고 치열한 암투를 전개하였다. 자기 세력을 확장하고 상대방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금의 양보도 없는 싸움이었다.

 

진왕부에서 이세민의 핵심 측근이었던 정지절은 태자 이건성의 참소로 강주자사(康州刺史)에 임명되어 외지로 나가게 되었다. 이에 정지절이 이세민에게 말했다.

 

“대왕에게 양팔과 같은 신하가 없다면 비록 몸을 오래토록 보전코자 하신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지절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감히 대왕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원컨대 스스로를 보전하소서.”

 

626년[무덕(武德) 9] 6월 4일 이세민이 태자 이건성과 제왕 이원길을 현무문(玄武門)의 정변(政變)을 통해 타도하였다. 6월에 황태자가 된 이세민이 8월 고조 이연의 양위(讓位)로 황제에 오르니 그가 당의 2대 황제인 태종이다.

 

이세민이 태자가 되자 정지절은 태자우위솔(太子右衛率)을 배수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으로 옮겨졌는데 실제 봉읍(封邑)이 칠백 호(戶)에 달했다. 정지절은 당태종 제위(帝位) 중에 노주(瀘州) 도독, 좌령군(左領軍) 대장군을 역임했으며 노국(盧國)으로 고쳐 봉해졌다.

 

657년[현경(顯慶) 2] 정지절은 총산도(怱山道)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에 임명되어

 

하로(賀魯)를 토벌했다. 정지절의 군대가 달독성(怛篤城)에 주둔해 있을 때에 오랑캐

 

수천 명이 나와서 항복하였는데 지절이 그 성주를 잡아 죽이니 하로가 이 때문에 멀리 달아났다. 이 일로 정지절은 군대가 돌아온 후 면직 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지절은 기주(岐州) 자사에 다시 임명되었는데 늙음을 이유로 사양했다가 665년[인덕(麟德) 2]에 죽었다. 뒷날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익주대도독(益州大都督)에 증직(贈職)되고 당태종과 문덕황후의 합장릉인 소릉(昭陵)에 배장(陪葬) 되었다.

 <대순회보> 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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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밀은 아버지 이관(李寬)의 포산공(蒲山公) 지위를 세습하여 수양제(隋煬帝)의 친위부대도독에 임명되었다. 613년 수양제의 2차 고구려 원정 중에 발생한 예부상서(禮部尙書)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에서 큰 역할을 했으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고 도망자의 신분이 되었다. 양현감의 반란이후 중국은 대혼란기에 접어들었다. 617년 여러 군도(群盜)들 중의 하나였던 적양(翟襄)의 추천으로 그들의 주군이 되어 자신을 위공(魏公)이라 칭했으나 618년 왕세충에 패하여 당에 귀순하였다. 그러나 이후 당에 반기를 들었다가 당의 복병에 의해 죽었다.

02 경사(經史)에 밝고 병법에 정통하였으며 수(隋) 양제(煬帝)의 신임을 얻어 강도통수(江都通守)가 되었다.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이 위험해지자 양제의 명으로 낙양을 구원하였다. 618년 양제가 죽자 낙양에서 월왕(越王) 양통(楊?)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후 강력한 반군이었던 이밀(李密)을 패퇴시키고 다음해인 619년 양통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정(鄭)’이라 했다. 621년 이세민이 이끈 당군에 패하여 투항하였으며 장안으로 압송된 후 원한을 품은 사람들에게 피살되었다.

03 상곡[上谷, 현재 하북성(河北省) 역현(易縣)]사람. 수나라 말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위도아(魏刀兒, ?~618)가 두건덕(竇建德)을 공격하다가 위기에 빠지자 위도아를 구원하러 나섰다가 패하여 남은 무리를 이끌고 유무주(劉武周)의 부하가 되었다. 유무주는 송금강을 신임하여 군사의 일을 맡기고 송왕(宋王)이라 칭했다. 또한 서남도대행대(西南道大行臺)에 임명하여 당의 기반이 된 산서성(山西省) 일대에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들은 619년(무덕 2) 병주(幷州), 회주(澮州)에서 당군(唐軍)에 연승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이세민에게 패하여 유무주와 함께 돌궐에 투항하였다. 이후 돌궐에서 다시 상곡으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계획이 누설되어 잡혀 죽었다.

04 수(隋)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들 중의 하나로 양자강(揚子江) 이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다. 무리를 모아 618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하(夏)’라 하고 스스로 ‘하왕(夏王)’임을 선포했다. 621년 당(唐)이 이세민을 보내 낙양(洛陽)의 왕세충(王世充)을 공격하였는데, 왕세충이 두건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세충을 구원하기 위해 병사를 움직였으나 호뢰관(虎牢關)에서 당군(唐軍)에게 패하고 장안에서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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