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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성리학의 집대성자 주자(朱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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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3 조회4,5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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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집대성자 주자(朱子)

선생은 편벽된 생각에 만족치 않고 조그마한 성공에 급급하지 아니한바도의 전통이 여기에 살아있게 되었다.           

 

<연구실>

                      

  유교(儒敎)는 동양의 문화권에서 약 팔백년이란 장구한 세월에 걸쳐 그 나라 국민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 및 그 나라의 문화발전에 - 장점과 단점을 같이 포함하여 -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조선시대 국가건설의 지도적 이념이 되었고, 예와 효를 숭상하는 우리나라의 가족제도를 발달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한 유학자인 주자(朱子)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주자(1130 ~ 1200)는 중국 남송시대의 철학자로 이름은 희(憙), 자는 중회(中晦), 호는 회암(晦庵)이며, 정호(程顥) ∙ 정의 형제의 정통학파를 계승하여 성리학을 완성시킨 분이다. 가문은 유도(儒道)로서 이름이 났고 대대로 위인이 나왔다. 부친 이부공(吏部公)은 문장(文章)과 행의(行義)로 학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위재(韋齋)선생이라 불리웠고, 문집도 널리 세상에 전해졌다. 주자는 1130년 9월 15일 남검우계(南劍尤溪)의 우사(寓舍)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정중하였다. 겨우 말을 하기 시작하였을때, 위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것이 하늘이다」하자 반문하기를 「하늘 위에는 무엇이 있지요?」하였다. 위재는 이를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스승을 따라 효경(孝經)을 배우게 되었다. 한번 열독(閱讀)하고는 책을 덮어 놓고 그 책머리에 「이렇지 않고서는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써놓았다. 일찍이 여러 아이들을 따라 모래 위에서 논 일이 있었다. 혼자 단정히 앉아서 손가락으로 모래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살펴본 즉 팔괘(八卦)였다 한다. 차차 자라면서 성현(聖賢)이 되는데에 뜻을 두고 학문에 힘썼으며, 과거 공부 따위에는 처음부터 뜻을 두지 않았다. 14세때(1143) 부친이 별세하였다. 부친의 유언에 따라 호원중(胡原仲), 유치중(劉致中), 유언충(劉彦冲)을 스승으로 삼고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14의 나이인데도 크게 분발하여 도(道)를 구하려고 뜻을 세운 바, 그 도를 널리 경서(經書)와 그 주석서에서 구하였다. 또 그 당시에 이름난 유식한 선비들과도 고루 교제를 맺고, 노 ∙ 장자학(老莊子學)에 까지도 반드시 그 근본취지를 규명하여 그 옳고 그름을 밝혔다. 연평(延平)의 이통(李侗) 선생은 선친과 동문 친우였다. 주자는 수백리의 길을 멀다고 생각지 않고 보행으로 연평까지 달려가서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그는 주자에 대하여 「선(善)을 즐기고 의(義)를 좋아함에 있어서 그 비류(比類)를 보기 드문 자이다.」고 하였고 「두뇌의 명철함을 겨눌 바 없고, 힘써 실행함은 경외할 만하다」하였고 또 「그의 의론(議論)은 체험을 기반으로 하여 적절함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그때 부터 수년간, 그는 연평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정밀한 사색과 실천적 체험을 통하여 학문의 조예가 점점 깊어갔다. 

  주자의 학문방법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그 궁구한 바에 따라 지식을 완성하며, 자신을 반성하고 그 반성한 바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 거경(居敬)이라는 것은 성학(聖學)의 알파요 오메가인 시종일관하는 근본적 태도로서 지식을 완성하되 경(敬)에 의해 완성하지 않으면 마음이 혼미 하여지고 문란이 일어나 의리(義理)가 돌아갈 곳을 통찰하지 못하며, 실천궁행(實踐躬行)하되 경에 의해 하지 않으면 태만하고 방자하여 져서 의리를 실현할 수가 없다. 

  그러면 거경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주일(主一) 즉 하나를 주로 하여 다른 것에로 옮겨 가지 않는 것(無適)이다. 선생은 이 주일 즉 거경(居敬)을 잠언(箴言)으로 삼아 스스로 경계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루종일 엄연한 태도로 방안에 단정히 앉아 경전의 뜻을 깊이 궁구하되 일찍이 조금도 쉬는 일이 없었다. 지식이 완성되면 행동에 나타나게 되는 바 항상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더욱 엄숙하고 공경하게 되는 것이고 은밀히 혼자 있는 곳에서도 더욱 성찰하여 정밀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사려가 아직 시작하기 전에라도 지각은 어둡지 않았고 사물에 접하여 등차(等差)를 세울 때 착오를 일으키지 않았다. 인욕(人欲)이라는 사심(私心)이 침입할 여지가 없었고 그래서 천리(天理)의 바른 것을 온전히 하였다. 선생은 편벽된 생각에 만족치 않고 조그마한 성공에 급급하지 아니한 바 도의 전통이 여기에 살아 있게 되었다. 선생의 행동 중에 훌륭한 것을 말하면 몸을 수양한 바 그 안색은 장중하였고 그 말씨는 엄격하였으며, 행동거지는 유연하며 정중하였고 그 앉은 자세는 단정하고 곧았다. 해돋기 전에 일어나서 몸을 단정히 하고 가묘(家廟)에 가서 조상들과 다음에는 옛 성현들의 영전에 예배하고 자기 서재로 들어가서 책을 읽었다. 가정에 있어서의 행동은 어버이에게는 효양(孝養)을 다하고 수하들에게는 자비스러웠다. 가정에서는 안팎을 매양 질서정연히 하고 누구에게나 자애심이 깊고 온화한 기운이 떠돌았다. 길사(吉事)나 흉사(凶事)나 경사나 조위의 예를 빠지지 않고 빈궁한 자들에게도 빠짐없이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나 일단 자신을 받드는 것은 의복은 몸을 가리고 음식은 배를 채우면 족하였고 거주하는 곳은 풍우를 막을정도였다. 아무도 견뎌낼 수 없을 만큼 검소한 생활에도 그는 만족한 기색이었다. 

  주자의 학문적 기초가 확립된 때 그것이 근사록(近思錄)에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주자는 「성현의 바른 도의 전통은 많은 서책(書冊) 속에 산재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성인이 저술한 경전의 내용이 분명치 못하면 곧 도의 전통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모든 정력을 기울여서 옛 성현이 남긴 경전의 뜻을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사서(四書)의 신주(新註)가 완성되었다. 60세때에는 「중용장구」에 서문을 붙여 상고에서 후대까지 도학을 전한 성현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더욱이 71세로 생애를 마치던 해의 3월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개정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사서집주에 대한 열의가 어느 정도임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사람을 가르칠 때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순서로 공부하는 것으로 도를 수행하는 순서를 정하고 그 다음에야 다른 경서에 착수하도록 지도하였다. 대학을 처음에 배우지 않고는 그 강령을 파악하여 논어와 맹자의 정미하고 미묘한 것을 다 알 수 없고 논어와 맹자를 참조하지 않고는 곧 융합하고 관철하여 중용의 진미를 다 해득할 수 없다. 그런데 중용의 극의(極意)를 이해하지 않고서 어찌 인간 지상의 대본(大本)을 세우며 인간행위인 오륜(五倫)의 길을 체득하며 천하의 서적을 읽고 천하의 일을 논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 서적들을 읽힐때는 반드시 글자의 음과 뜻을 명백히 하고 문장과 문귀를 바르게 하고 말을 익히고 문리(文理)를 구하고 정밀히 연구하고 깊이 사색하여서 이해하기 어려운 곳을 더 연구하고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기를 안정시켜서 자득하는 바를 기다렸다. 열심히 공부할때는 희색이 만면하고 도에 나아감이 어려울 때는 곧 걱정하는 안색을 보였다. 거의 한밤중에 이르도록 경전을 강의하고 고금의 역사를 토론하였다. 병으로 몸이 불편할 때라도 학생들이 와서 질문하면 자기의 신병(身病)을 완전히 망각하였고, 하루라도 학문을 강구치 않으면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걱정하였다. 사라지게 된 옛 성인의 업적의 실마리를 계승하여 앞서간 현인들이 아직 발전시키지 못한 기틀을 열고 모든 유자(儒者)들의 득실을 분변(分辨)하고 이단의 그릇됨을 밝히고 천리를 명백히 하고 인심(人心)을 바르게 한 그 업적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만년에 권신들 특히 한탁주(韓侂胄)의 미움을 사 주자의 학문이 위학(僞學)이라 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다. 학문이란 거짓이고 탐욕과 방사(放肆)가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 하고 결백하고 예의를 좋아하는 것은 모두 다 거짓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우둔하고 염치가 없는 무리들만이 왕왕 재상같은 높은 자리에 등용되었다. 그 행위에 규범이 있고 조금이라도 유자(儒者)로서 이름이 알려진 자는 은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자는 매일 죽림정사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며 그의 해금이 있기 전에 죽었다(1200). 그 후 학문이 인정되어 문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유언을 수록한 것으로 그의 막내 아들 주재(朱在)가 편찬한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 문인과의 평생문답을 수록한 주자어류(朱子語類)가 있다.

  주희를 유교종장으로 삼은 것은 해원시대를 맞이하여 그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고 억울하게 박해받으며 살다가 죽은 주자의 원(冤)을 풀어주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대순회보》 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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