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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당태종(唐太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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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3 조회4,8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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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貞觀)의 치(治)」를 이룬 당태종(唐太宗)

 

 『몸을 바르게 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인의(仁義)로써 서로 도우라』『편안할 때 위태로울 때를 생각한다』큰 것으로는 국정에 관한 중대한 일부터작은 것으로는 취미 ∙ 기호 등에 이르기까지모든 면에서 「사(私)」를 버리고 「공(公)」을 위해야 한다. 

   당태종(598 ~ 649)은 중국사 뿐만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손꼽을 만한 통치자의 한사람이다. 서양이 당시 암흑기였던 600년에 중국 대륙에서 한(漢, 206 ~ 265)이래 혼란한 시국을 수습하여 중국을 통일하고, 당나라(618 ~ 907)의 기초를 쌓은 인물이다. 전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천지에서 혼란한 시국을 광정하려고 당태종을 내고 다시 이십사장을 내어 천하를 통일하였나니∙∙∙』 (예시 66절) 그는 율령 제도를 정비하였다. 삼성(三省)과 육부(六部)의 제도를 정비하였고 과거제도를 확립시켰다. 그럼 당태종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그는 당나라의 2대 황제(재위 624 ~ 649)이고 이름은 이세민(李世民)이다. 이 이름은 「20세가 되어 제세안민(濟世安民)의 사업을 성취할 사람이다.」라는 예언에 의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598년 이 연(李淵: 고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두씨(荳氏: 후의 두 황후)이다. 그의 가계는 북방 민족의 피가 섞인 무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태종은 천성이 총명하고 사려가 깊으며, 무술 ∙ 병법에 뛰어난 동시에 결단력과 포용력도 갖추고 있었으므로, 소년 시절부터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그의 성장기는 수(隋: 581 ~ 618)말의 일대 혼란기였다. 수양제(隋陽帝: 604 ~ 618)의 폭정으로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각지에서 반란의 횃불을 들었다. 그는 617년에 태원유수(太原留守: 태원지방의 총사령관)였던 아버지를 권하여 거병을 하게 하였다. 이듬해 618년 아버지의 즉위(당의 건국)와 함께 진왕(晋王)에 봉해졌다. 그 후에도 젊어서 군정의 요직에 앉아 각지에 일어난 군벌을 토벌하면서 창업 초기 당왕조의 안정에 기여했다. 626년 그의 선망에 의혹의 눈길을 던지는 형인 태자 건성(建城)과 아우 원길(元吉)을 현무문(玄武門)에서 사살하고 그 해에 즉위하였다. 즉위하자 당태종은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정하고, 649년에 사망하기까지 23년 동안 국정을 총괄했다. 그 동안 보기 드문 성세를 이루었다고 하여 이를 「정관(貞觀)의 치(治)」라 부르고 있다. 

  태종이 즉위했을 무렵에는 이미 군웅할거의 국면에 종지부가 찍히고, 당왕조는 군사적인 면에서도 안정기에 접어들려 하고 있었다. 한때 세력을 떨치던 북방의 돌궐과 서방의 토번(吐藩)같은 이민족도 이정(李靖)과 이세적(李世勣)같은 명장의 활동으로 당에 복수하게 된다. 정복지에는 이른바 기미정책(羈糜政策)을 실행하여, 황제는 여러 수장(首將)으로부터 천가한(天可汗)의 칭호를 받아 번한(蕃漢)공통의 군주가 되었다. 국내 통치에도 주력하여 부역(賦役) ∙ 형벌의 경감, 사치의 금지, 관제(管制)의 정비, 인재의 등용에 힘을 기울였다. 수(隋) 멸망의 전철을 피하기 위해, 항상 신료(臣僚)와 치도(治道)를 논하고 황태자를 위하여 「제범(帝範)」4권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또「진서(晋書)」「양서(梁書)」「진서(陳書)」「주서(周書)」「수서(隋書)」등 전대의 역사를 편찬케 하였다. 

  한편 수말(隋末)의 내란 때 성장한 군웅(群雄)들은 어떻게 당의 조정에 심복 시키는가가 태종의 주요 문제였다. 당태종은 그들을 관료제에 의하여 흡수하려고 하여, 문학 ∙ 유학을 장려하였으며 홍문관(弘文館)을 두고 국자감(國子監)을 확장하였다. 또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케 하여 전대(前代)이래의 해석을 통일하였다. 이러한 외정 ∙ 내치에 기여한 사람들 가운데는 명장 이세적(李世勣), 이정(李靖), 명신 왕규(王珪), 위징(魏徵), 현상(賢相), 방현령(房賢齡)등이 있는데 자세한 것은 다음에 알아보기로 한다. 당태종 통치(정관(貞觀)의 치(治))기간에 국제 정세도 거의 안정되어 내외가 다 같이 태평세대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농업의 생산력도 서서히 회복되어 백성들의 생활에도 여유가 있게 되었다고 한다. 「18사략」에서 두 가지 일화를 인용해 본다. 

  정관 원년에 기근이 엄습하여 쌀 한 말이 비단 한 필 값에 맞먹는 정도가 되었다. 이듬해 2년에는 전국적으로 메뚜기의 피해가 발생했고, 3년에는 큰 수해가 있었다. 그 동안 태종은 국력 민생의 안정을 도모했기 때문에 원망을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정관 4년에 접어들자 이번에는 전국적으로 크게 풍년이 들었다. 쌀 한말이 3 ~ 4전으로 값이 떨어졌다. 그래서 먹고 사는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없어졌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하는 자도 없어서, 이 한해 동안에 죄를 지어 사형에 처해진 자는 겨우 19명이었다. 그래서 동쪽은 바닷가에서부터 서쪽은 오령(五嶺)에 이르기까지 집마다 문단속을 하지 않게 되었다. 또 여행자는 어디를 가든지 식량을 가지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 도중에 어디서든지 필요한 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자가 태종에게 도적이 횡행하지 못하게끔 형벌을 무겁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대해 태종은 『먼저 사치를 경계하고 비용을 절감하여 백성의 부역과 조세를 경감해야 한다. 또한 청렴한 관리를 골라서 채용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백성의 의식을 풍부하게 해 주면 누구든지 도둑질 같은 짓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구태여 형벌을 무겁게 할 필요는 없다.」 과연 그로부터 몇 해 후에는 길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아무도 슬그머니 집어 가는 사람도 없고, 또 도둑도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행상인과 여행자들도 안심하고 노숙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태종 이세민의 이름을 명군(名君)으로서 내외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그가 사망한 약 50년 후에 오긍(吳兢)이라는 사가에 의해 편찬 된 「정관정요」라는 책이다. 이 책은 태종과 그 신하들과의 정치 문답집인데, 「정관(貞觀)의 치(治)」를 가져오게 한 그들의 진지한 정치 자세를 상세하게 전해주고 있어서, 예로부터 제왕학(帝王學)의 교과서로서 애독되어 왔다. 이 책에 담겨 있는 최고 통치자로서의 마음가짐은, 인재의 등용에 마음을 쓰고, 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것, 스스로의 자세를 바르게 하고 사치를 삼가하고 민생의 안정에 힘쓸 것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몇가지 일화를 인용해 보기로 한다.

 

  ▶몸을 바르게 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정관 초년에 태종이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주는 무엇보다도 먼저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힘써야 한다. 백성을 착취하고 사치한 생활에 빠지는 것은 마치 자기 발의 살을 잘라 내어 먹는 것 같은 것이어서, 배가 불렀을 때에는 몸이 병신이 되어 버린다. 천하의 안태(安泰)를 원한다면 먼저 자기의 자세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몸은 곧게 서 있는데 그림자가 삐뚤어져 있거나, 군주가 훌륭한 정치를 하고 있는데 백성이 엉터리 짓을 한다는 얘기는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늘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몸의 파멸을 초래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욕망 때문이라고. 항상 산해의 진미를 먹고 음악과 여색에 빠진다면 욕망의 대상은 한없이 넓어져서 거기에 드는 비용도 막대한 것이 된다. 그런 짓을 하고 있으면 정치에 의욕이 없어지고 백성을 고통에 시달리게 할 뿐이다. 게다가 군주가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한마디라도 하면 백성들의 마음은 멀어지고 원망하는 소리가 높아지면서 반란을 획책하는 자도 나타날 것이다.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도록 애쓰고 있다.』

  측근인 위징이 대답했다. 『예로부터 성인으로 숭상을 받은 군주는 모두 그런 일을 몸소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상적인 정치를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날 초의 장왕(莊王)이 현인 첨하(瞻何)를 불러 정치의 요체를 묻자 첨하는 「우선 군주가 자기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초왕이 거듭 구체적인 방책을 물었습니다. 그래도 첨하는 「군주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있는데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일은 아직까지 없었습니다.」고 대답 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 하신 말씀은 첨하가 한 말과 똑같습니다.』 (군도편 : 軍道篇)

  ▶仁義로써 서로 도우라.  정관 4년 방현령이 태종에게 아뢰었다. 『아까 무기고를 점검해 보니 수나라 때에 비해 많이 부족해 있습니다. 곧 보충하도록 지시를 내려주시옵소서.』태종이 대답했다. 『확실히 무기고를 넉넉하게 채워서 외적에 대비하는 것은 등한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 그대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무기고를 보충하기 보다 정치에 힘써서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데 애써 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의 무기인 것이다. 수의 양제가 망한 것은 무기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스스로 인의(仁義)를 저버리고 백성들의 원한을 샀기 때문이다. 우리는 양제의 실패를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는 항상 덕으로써 나를 보좌해 주기를 바란다. 』(인의편(仁義篇))

  ▶편안할 때에 위태로울 때를 생각해야 한다.  정관 15년 태종이 측근에게 물었다. 『나라를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쉬운 일일까?』측근인 위징이 말했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태종이 반문했다.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고 그들의 의견을 잘 들으면 되지 않겠는가. 반드시 어려운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텐데∙∙∙』그러자 위징이 대답했다. 『지금까지의 제왕을 살펴보십시오.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는 훌륭한 인재를 등용해서 그 의견에 귀를 잘 기울이지만, 나라의 기반이 튼튼해지면 반드시 마음이 해이 해 집니다. 그렇게 되면 신하들도 자기 몸을 제일 소중하게 여기고 군주에게 잘못이 있어도 굳이 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국정은 날로 어지러워져서 끝내 망하게 됩니다. 예로부터 성인이 편안할 때 위태로운 때를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나라가 안태할 때야말로 마음을 다잡고 정치에 임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은 어려운 일이라고 아뢰었던 것입니다.』(군도편(軍道篇))

    

  「정관정요」에 따르면 제왕학의 요체는 자제력의 발휘, 즉 극기(克己)에 있는 것이다. 큰 것으로는 국정에 관한 중대한 일부터, 작은 것으로는 취미 ∙ 기호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사」를 버리고「공」을 위해야 한다. 태종은 이렇게도 말하였다. 『천자가 되면 남에게 허리를 굽힐 필요가 없고 두려워할 일도 없다고 말하는 자가 있지만, 나는 항상 하늘을 두려워하고 신하들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면서 애써 겸허하게 행동해 왔다. 나는 한마디 말하려고 할 때마다 또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때마다 반드시 하늘의 뜻에 합당할까. 그리고 신하들의 의향을 따르고 있을까 하고 반성하면서 신중을 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늘은 저렇게 높기는 하지만 속세의 일을 잘 알고 있고, 신하들은 끊임없이 군주의 일거일동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애써 겸허하게 행동하면서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일이 하늘의 뜻과 백성들의 의향에 합당한지 어떤지 반성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위정자로서 훌륭한 마음가짐이며 태도였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당태종은 좋은 후계자를 두지 못하였고, 만년에 대의 명분이 빈약한 고구려 원정을 감행한 것이다. 물론 이때도 방현령과 장손무기 등의 측근이 중지를 간언하고 있다. 그러나 태종은 왠지 이때만은 그들의 간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태종은 정관 23년(649년) 스스로 쌓아 올린 대당제국의 앞날을 염려하면서 도성 장안에서 사망했다. 고구려 원정에 의한 심신의 피로가 죽음을 재촉하였다고 한다.

 

《대순회보》 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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