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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제갈공명(諸葛孔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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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3 조회5,3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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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공명(諸葛孔明) 

「제갈공명의 정대(正大) 함을 본받아야….」

공명의 뛰어난 「재조」는 조조로 하여금 화룡도에서 관우를 만나게 한다.

마속을 휘루참지했던 고사는 「공명정대」했던 그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경원<연구위원>

      

  제갈공명은 그의 신출귀몰한 지략과 우국충정의 절개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제갈공명의 활약상은 「삼국지」에서 가장 자세히 알아 볼 수 있는데, 삼국지의 시대적 배경은 중국이 삼국시대, 남북조시대를 거쳐 수(隨)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분열 시기에 해당된다. 이 때 지방 호족들이 많이 나와 활약하게 되는데, 공명도 그 호족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면 제갈공명의 생애에 나타난 그의 지략과 충정 어린 인간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제갈공명이 태어난 해는 서기 181년(光和 4年)이며, 공명이 한창 활약한 2 ~ 3세기는 약 4백년간 계속되어온 한(漢)왕조에 의한 통일 지배가 마지막 고비에 이른 시기였다. 공명의 본명은 량(亮), 자(字)가 공명이며 시호는 충무(忠武), 낭야군 양도현 (琅耶郡 陽都縣 : 山東沂水縣)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제갈규(諸葛珪)와 어머니 장씨(章氏)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의 이름은 근(瑾)이라 했고 공명과는 7살 차이가 난다. 공명의 얼굴은 길어서 말상이었다고 한다. 공명은 열살 때 어머니를 잃었으며 몇 해 되지 않아 아버지 또한 사별하게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공명은 아우 균과 함께 형주(荊洲:湖北省)에 있는 숙부인 제갈현에게 가서 그의 밑에서 자랐는데 후한 말의 전란으로 그의 숙부와도 사별하게 된다. 숙부 제갈현이 죽자 공명은 양양(湖北省) 북서 20리에 있는 융중(隆中)에서 살게 된다. 그는 17세부터 약 10년 동안 청년이 될 때까지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하여 벼슬하지 않고 청경우독(晴耕雨讀:날이 개일 땐 밭을 갈고 비가 오면 책을 읽음) 하였으며, 때로는 집 서쪽에 있는 낙산(樂山)에 올라 유랑하면서 시를 읊기도 했다. 이 때부터 양양지방에서는 공명의 호연지기한 명성이 널리 알려졌으며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공명은 27세 되던 해 세상에 나올 계기를 갖게 된다. 당시 유비는 왕족의 일족으로서 환관 세력인 조조에게 쫓겨 형주에 있으면서 천하평정의 뜻을 두고 있었다. 유비는 용맹성과 인자함으로 인해 널리 백성들의 인망에 올라 있었으며, 오직 한가지 아쉬운 점은 모신(某臣)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를 깊이 통감한 유비가 당시 지방 유지를 통해 추천 받은 사람이 바로 제갈공명이었다. 유비는 공명이 살고 있는 초려를 세 차례나 내왕한 끝에 겨우 공명을 만나게 되는데이것이 유명한 「삼고초려(三顧草廬)」이다. 이 만남에서 공명은 유비의 열의와 성심에 감동하여 결국 유비를 섬기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때 공명이 유비에게 들려준 것이 「초려대(草廬對)」로써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이다. 이것은 평소 공명이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던 생각으로써, 그 내용은 당시 유비가 머물고 있던 형주와 익주를 손에 넣고 그 국경을 굳게 지키며 이어 동쪽의 오나라 손권과 손을 잡은 뒤 북쪽의 조조와 대립하는 계책이었다.

  이로써 공명은 유비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신임은 「군신수어지교 (君臣水魚之交:유비와 공명의 사이가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긴밀함)」라고 불리 정도로 두터운 관계가 되었다.「전경」에 보면 다음과 같은 공명의 활약상이 나오고 있다. 『모든 일을 알기만 하고 쓰지 않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하리라. 그러므로 될 일을 못되게 하고 못될 일은 되게 하여야 하나니 손빈(孫臏)의 재조는 방연(龐涓)으로 하여금 마능(馬陵)에서 죽게 하였고 제갈량(諸葛亮)의 재조는 조조(曹操)로 하여금 화용도(華容道)에서 만나게 하는데 있느니라.』 (교법 3장 28절)의 내용 중 제갈공명에 대한 부분은 서기 208년「적벽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싸움은 유비가 吳의 손권과 동맹하여 유비가 머물고 있는 형주를 점령하기 위해 남진한 조조와 양자강 북쪽 적벽에서 대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싸움에서 오와 촉의 동맹군은 조조군에 비해 숫자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는데 공명의 지략으로 화공법(火功法)을 쓰게 되었다. 여기서 공명은 조조가 진을 치고 있는 쪽으로 동남풍을 불게 하기 위해 칠성단(七星檀)을 만들어 칠일칠야 동안 공을 들였으며 이 기도는 효험이 있어 사흘째 되던 날 드디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를 기회로 동맹군은 적의 수군을 향해 화공을 퍼부은 결과 조조군은 대패하고 말았다는 싸움이다. 한편 이 대전에서 공명은 조조를 사로잡는 데 있어 신출귀몰한 계책을 발휘함으로써 조조를 궁지에 몰아넣게 된다. 동맹군에 쫓긴 조조는 패잔병들을 이끌고 그의 본거지인 강릉으로 패주 할 때 가는 곳마다 산골짜기에 숨어 있던 복명을 만나게 되는데 모두가 조조의 예상을 뛰어넘은 습격이었다. 쫓고 쫓긴 조조는 어느 갈림길에 이르게 되는데, 한쪽은 폭 넓은 평지 길이며 한쪽은 골짜기가 심한 「화룡도」로 가는 길이었다. 이때 화룡도 쪽은 여기저기서 희미한 연기가 올라오고 있어 적의 매복이 있음을 암시 해주고 있다.

  도리어 이 순간에 조조는 그의 지모를 살린다하여 화룡도로 가는 길을 택하게 되는데, 이것은 병서에 『허축실지하고 실측허지하라.』의 유인술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조의 지모보다 한차원 높은 공명의 재조는 기진맥진하여 화룡도로 올라온 조조군으로 하여금 관우가 이끈 유비군사들과 만나도록 만들게 된다. 여기서 조조군은 관우의 인정(人情)으로 무사히 도망하였지만 공명의 지략은 이를 계기로 조조군이나 오의 손권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전후(戰後)에 공명은 「군사중랑장」이라는 군사, 재정을 관장하는 중요한 지위에 올라 법의 적용을 아주 엄격히 하고 반면 공 있는 자에게는 관직을 두터이 하여 임금의 은혜를 받도록 하는데 힘썼다.

  「전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천지종용지사(天地從容之事)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고 천지분란지사(天地紛亂之事)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나니 공명지정대(孔明之正大)와 자방지종용(子房之從容)을 본받으라』 (교법 3장 29절) 『상제께서 김형렬을 불러 물으셨도다. 「네가 나의 사무를 담당하겠느냐」형렬이 「재질이 둔박하와 감당치 못할까 하나이다.」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꾸짖으시니 형렬이 대하여 「가르치심에 힘입어 담당하겠나이다.」여쭈니 상제께서 「무한유사지불명(無限有司之不明)하라. 마속(馬謖)은 공명(孔明)의 친우로되 처사를 잘못하므로써 공명이 휘루참지(揮淚斬之)하였으니 삼갈 지어다.」고 일러주셨도다.』 (권지 2장 38장) 이 내용들은 상제님께서 「공명」의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일 처리를 높이 평가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일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일례로 당시 공명의 형이었던 제갈근은 공명의 나라와 대립된 관계에 있는 오나라 장수였는데, 공명은 그 형과 공적인 회의석상에서나 얼굴을 대할 뿐 사적인 만남은 일체 하지 않으므로써 공사(公私)를 엄중히 하여 조금도 남에게 의혹을 사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하나의 예로 「마속」과 「공명」의 일화를 보기로 한다. 이 일화는 앞서 인용한 「전경」구절에 나오는 것이다. 서기 228년 공명이 47세 되던 해의 일이다. 삼국통일의 꿈을 이루기 위해 때를 기다리던 공명은 중원의 젖줄기라 할 수 있는 가정(佳亭)을 점령하기 위해 직접 북정(北征)의 길에 올랐다. 이때 공명이 왕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는 그의 충성심이 가장 잘 드러난 일대의 명문(名文)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훌륭한 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상황은 누가 먼저 가정을 점령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는 중대한 상황이었다. 이때 공명은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 부하 마량의 아우 마속을 선봉장으로 발탁하게 된다.

  마속은 공명으로부터 그의 재주를 인정 받았고 공명의 남정(南征)때 전략의 기본 방침을 제의하여 공명이 채용했을 정도로 공명과는 신의가 두터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봉장 마속은 의기충천하여 산 위에다 진을 치지 말라는 공명의 말을 무시하고 산 위에다 진을 쳤다. 이를 기회로 적장 사마중달이 즉각 보급로를 차단시키자, 마속은 전쟁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하게 된다. 이 한 순간의 잘못으로 공명은 삼국 통일이라는 대망을 눈앞에서 놓치게 된 것이다. 그 후 오장원 벌판에서 전쟁에 지쳐 병들어 죽을 때까지 공명은 자기가 속한 촉나라를 위해 수없이 많은 업적을 쌓았다. 전쟁에 쓸「운반구, 목우(木牛), 유마(流馬)」등을 발명하고, 고래부터 병법을 구하여 「팔진도(八陳圖), 삼면원진(三面圓陳), 연형진(連衡陳)」 등을 완성하였으며 10연발의 「연노(連駑)」와 적의 진격을 막는 「칠질려」 그리고 「통유개」와 「편수개철오」 등의 고안이 그것이다. 서기 234년 공명은 5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죽을 때까지 그는 군주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공명이 죽을 때까지 심지어 그의 후임까지 일러 주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모든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었던 막강한 실력자였지만 공명은 평소 가진 재산이 뽕나무 800그루와 자갈밭 15경이었다. 이것으로 충분히 집안 식구들이 먹고 살 수 있다고 하며 절대로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과연 그의 말대로 그 이상의 재산은 없었다고 한다. 진정으로 그의 검소함과 공리(公利)를 위하는 마음은 유구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가히 후세 사람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대순회보》 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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