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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석가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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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3.20 조회5,2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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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께서 교운을 펼치신 후 때때로 자기를 좇는 종도들에게 옛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니라. 그 사람들 중에는 강태공ㆍ석가모니(釋迦牟尼)ㆍ관운장ㆍ이마두가 끼었도다. (교운 1장 10절)

 

 

 

석가모니01는 기원전 7세기경 지금의 북인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불교(佛敎)의 창시자이다. 석가모니란 명칭은 사캬(sakya)족의 대(大) 성자[muni]란 뜻이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싯달타’로 ‘목적을 완성한 사람’을 의미한다. 흔히 ‘깨달은 자’란 뜻으로 붓다(Budda)라고 일반적으로 불리워진다.

 

그는 당시 수많은 중생들이 브라만의 신(神)들을 맹신(盲信)하고 또한 현실세계의 계급적 구조 속에 속박을 받고 고통을 당하는 현실을 보고 큰 발심을 하여 도를 깨달았다. 그 후 불교의 진리로써 중생구제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였다. 그는 일견(一見) 어리석어 보이는 중생들도 내면에는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는 ‘개유불성(皆有佛性)’의 선언으로 암흙 속에 사는 중생들에게 광명을 비춰주었다. 이는 곧 인간 존엄의 선언이기도 했다.

 

석가모니는 기원전 624년02(남방불기) 네팔 남부지방인 따라이 지역의 한적한 농촌마을에서 슈도다나왕(정반왕)과 마야왕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왕비가 아이를 낳으러 친정으로 가다가 룸비니 동산03에 이르러 산기를 느껴 그곳에서 해산하게 되었는데, 그의 탄생소식을 듣고 멀리서 온 아시따 선인(仙人)은 그의 관상을 보고 그가 전륜성왕(轉輪聖王)이나 부처님이 될 것을 예언했다. 싯달타는 7세부터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교육으로서 힌두교 철학서인 베다와 우파니샤드, 수학, 병법과 무예뿐 아니라 각종의 문자와 군사학 외에 교양으로서 철학, 논리학, 언어학, 시, 법전 등을 공부하였다. 그는 당시 검술과 궁술에서 그와 상대할 자가 없을 정도로 발군의 기량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의 가르침 가운데 열반(涅槃)ㆍ해탈(解脫)ㆍ업(業)ㆍ윤회(輪廻) 등의 교설은 이때 배운 우파니샤드의 내용 속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서 이때 공부한 것이 훗날 그의 설법에 영향을 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어릴 때 그는 조용하고 사려 깊은 성격이었다. 12세 되던 날 그는 부왕(父王)과 함께 농경제에 참석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초췌한 모습으로 일하는 농부와 개구리가 벌레를 잡아먹고 그 개구리를 뱀이 잡아먹는 것을 보게 된다. 약육강식의 비정한 현실과 존재의 괴로움을 목격한 그는 큰 충격을 받고 깊은 사색에 빠져든다. 왕자가 자주 명상에 잠기는 것을 본 왕은 왕자가 예언대로 세속을 떠날까 걱정이 되어 17세 되던 해에 ‘야소다라’라는 규수를 맞아 결혼을 시킨다. 그러나 왕자로서 세속적인 모든 것을 갖춘 왕자는 더더욱 세속적인 쾌락에 무의미함을 느끼게 되고 그러던 중 아들 라훌라04의 탄생이 싯달타의 출가를 재촉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하여 29세 되던 해 야밤에 담장을 넘어 궁을 나온다.05

 

그 후 그는 6년 동안 그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온갖 고행 수도를 한다. 이는 단식·조식 등으로 스스로의 육체에 의식적으로 고통을 가하고 물질적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고도의 정신 집중을 꾀하는 수행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행법으로는 몸만 야위어갈 뿐 깨달음에는 큰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12살 때 자연스럽게 고요한 경지에 들어간 적이 있음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고행수도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다른 방법을 찾기로 하였다.

 

마음속에서 큰 사상적 변환이 일어난 석가모니는 이제까지의 고행(苦行)을 포기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인근의 나이란자라 강변에 가서 몸을 씻었다. 그러나 그간의 극심한 고행은 강가에서 나올 마지막 힘조차 소진시켜 버렸다. 겨우 나뭇가지를 잡고 올라온 그는 ‘수자타’라고 하는 여인으로부터 우유죽을 받아먹고 기력을 회복하였다. 석가모니의 이러한 파격적 행동은 다섯 명의 동료들을 크게 실망시켜 그를 떠나게 한다. 석가모니가 당시 오랜 전통이었던 고행 수도를 포기한 것은 당시의 수행자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이는 새로운 수행법의 출현(出現)을 의미하는데, 불교 교리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 중도(中道)06라고 한다.

 

기력을 회복한 그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결코 일어서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심을 하고 인근에 있는 핍팔라수 나무 아래에 앉는다. 그러나 마계07의 온갖 시험과 유혹이 명상에 잠긴 석가모니를 괴롭힌다. 하지만 이를 다 이겨낸 그는 마침내 흔들림 없는 정각(正覺)을 이루게 된다.08

 

이때 그 아래 앉아 깨달음을 성취했던 핍팔라수 나무는 이후 ‘보리수’라 칭해지고 그 나무가 있는 곳은 지금까지 가장 신성시하는 장소의 하나가 되었다.

 

전해 내려오는 경전에 의하면, 깨달음을 얻은 후 바로 전도를 한 것이 아니라 49일간 그는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이때 석가모니는 깨달은 자신의 진리가 너무 심오하여 일반인들이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울 것을 염려하여 전도나 설법을 주저하였다고 한다. 탄하등 마왕의 세 딸이 애욕의 고삐로 석가모니를 유혹하려 했던 것도 이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악마도 이때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설법하지 말고 그대로 입멸할 것을 권유한다.09 이때 세계의 주도자 격인 브라흐마 신이 나타나서 중생들의 구원의 기회가 영원히 없어질 것을 우려하여 깨달은 진리를 설법할 것을 청원한다.10

 

마침내 전도를 결심한 석가모니는 그를 비웃고 떠났던 다섯 동료에게 처음으로 설법하기로 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석가모니가 우유죽을 마시고 파계했다고 생각하여 그를 냉담하게 대했지만 그의 설법을 듣고는 곧 최초의 제자가 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녹야원(鹿野園)에서의 초전법륜(初轉法輪)이다. 이후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설법을 하였고 그의 설법을 듣는 자는 즉시 해탈하여 아라한11의 경지에 이르곤 했다.

 

그리하여 그는 수많은 곳을 다니면서 설법을 하였고 그 설법지는 지금까지도 신성(神聖)한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당시에 부처가 출현했다는 소식을 들은 뜻 있는 자들이 앞을 다투어 설법할 장소를 기증했다.12

 

그가 교화하는 방식은 상대방의 처지를 살펴 근기(根機: 종교적 자질이나 능력)에 따라 비유나 방편으로 법(法)을 설(設)하여 미혹에서 벗어나 본성을 밝히게 하는 방식이다. 현학적이고 난해하지 않고 알기 쉬운 비유로 교화하였다. 또한 그의 교화 대상에는 빈부나 귀천의 구분이 없었다.

 

그 중에 가장 이례적인 것은 여성을 출가시킨 것이었다. 그때까지 인도에는 여성이 성직자가 된 예가 없었다. 남녀평등이 법적으로 보장된 오늘날도 성직의 문이 여성에게는 차별이 있는데 2,500년 전에 여성의 출가가 허락된 일은 불교의 평등 지향성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카스트 제도로 계급사회가 정착된 당시의 인도 사회제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카스트제도를 합리화시키는 논리는 윤회와 업(業) 사상이다. 그것은 계급의 높고 낮음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전생에 공덕을 많이 쌓으면 높고 악행을 많이 쌓으면 천한 계급으로 태어나므로 현실을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에 지배적인 이러한 논리를 혁파(革罷)하는 것이 그의 독창적인 공(空)과 연기(緣起) 사상이다.

 

공(空)과 연기(緣起) 사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는 삶을 고(苦)라 규정하고 고통의 원인을 찾던 중 그것은 “실체(實體)가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錯覺)하여 그것을 집착하는 데 있다”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진실은 ‘모든 현상은 고정 불변적인 것이 아니고 인연(因緣)의 모임에 의해 잠시 나타났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소멸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정된 자기실체는 없다[무아:無我]’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해탈(解脫)이며 이때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의 세계로 들어간다(이고득락:離苦得樂)고 하였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주체인 마음자리를 불성(佛性)이라고 하여 이는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또한 당시의 계급적 구조 속에서 암흙과 같은 삶의 고통 속에 있었던 중생(衆生)들에게 삶의 큰 서광(瑞光)이 되었다.

 

한편 일찍이 대각(大覺)을 연 석가모니는 자신을 불법과 일체임을 밝히는데, 석가모니의 수려한 외모에 반해 참선은 하지 않고 석가모니만 우러러 보다가 중병에 걸려 죽어가는 비구가 있었다. 석가모니는 죽기 직전의 그를 문병 가서 설법(說法)했다. “비구여! 마침내 죽어 썩게 될 나의 몸을 보아서 무엇하겠다는 것이냐? 설사 어떤 사람이 나의 옷자락을 잡고 수백 리를 따라온다고 해도 그가 불법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나와 멀리 있는 것이요, 비록 나를 보지 못한 자라도 불법을 보았으면 나와 함께 있는 자니라. 불법을 보는 자가 곧 나를 보는 자이니라.” 깨달음을 얻은 성자(聖者)를 인식한다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형체 만으로는 불가능하고 그의 정신이나 영혼의 세계 즉 그가 깨달은 진리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를 참으로 인식했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석가모니는 여든이 되자 몸이 많이 쇠약해 있었다. 더구나 ‘춘다’라고 하는 여인이 공양한 식사로 병이 더욱 위중해져 최후를 맞이하기 위해 도읍지 쿠쉬나가라 근교의 사라수 숲을 향했다. 석가모니는 아난을 시켜 두 그루의 사라수 사이에 누울 자리를 준비시켜 자리에 누웠다. 아난이 슬퍼하여 “세존이 가시면 누구를 의지하여 수행해야 합니까?” 물으니 “불법과 자신을 등불로 삼아 수행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리곤 곧 열반의 경지에 들어 80년간의 생애를 마쳤다.

 

석가모니 사후(死後) 7일째 되던 날 아난은 관(棺) 위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아무리 붙여도 불이 붙지 않았다. 이때 석가모니의 사망 소식을 들은 가섭은 서둘러서 장지(葬地)로 왔는데 사망 후 7일이 지난 후였다. 가섭이 도착하여 관에 예(禮)를 올리려고 보니 마중이나 나온 듯이 발이 관 밖으로 나와 있었다. 이윽고 예배가 끝나자 저절로 관에 불이 붙었다. 옆에 있던 아난은 아직 아라한이 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를 보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 한다.13

 

석가모니의 사후 AD 1세기경 불교는 크게 두 파로 나뉘어졌다. 석가모니가 설법한 교리에 충실한 근본불교는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쪽으로 퍼져나가 남방불교라 칭해졌고, 반면에 석가모니의 설법의 근본취지를 대자대비(大慈大悲)라고 하는 중생구제에 있다고 보아 일반 신도들도 쉽게 불법에 접근할 수 있도록 수행방법을 참선만이 아니라 염불(念佛) 수련으로도 해탈할 수 있다고 본 북방불교가 중국·한국·일본으로 퍼져나갔다. 석가모니 사후 2,500여 년간(남방불기 기준)14 불교는 크게 성장하여 그의 교설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고 오늘날 세계 3대 종교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참고문헌>

 

ㆍ톰 로웬스타인, 『붓다의 깨달음』, 도서출판 창해, 2002

ㆍ김정빈·최병용, 『부처의 생애』, 책있는 마을, 2001

ㆍ김정빈·최병용, 『불교의 근본교리』, 책있는 마을, 2001

ㆍ성열, 『고따마 붓다』, 문화문고, 2008

ㆍ『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CD GX』, 2004

ㆍ원나시리, 『아난존자 일기 1, 2』, 운주사, 2008

ㆍ중촌원(中村元), 『불타의 세계 1, 2』, 김영사, 1999

 

 

 

 

01 본명은 고다마 시다르타(Gautama Siddhartha)이다. 석가모니라 칭할 때 석가(釋迦)는 북인도에 살고 있는 샤키아(Sakya)라 불리는 한 부족의 총칭이며, 모니(牟尼)는 성자를 의미하는 무니(muni)의 음사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이다. 그는 세상의 진리를 깨달아 성자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세존(世尊)으로도 불리운다. 그 중에 가장 일반적인 것은 ‘붓다’인데, 중국에서는 이를 음사하여 ‘불타(佛陀)’라 하고 또는 ‘불(佛)’이라 한다. 이는 ‘깨달은 자’란 뜻이다. 남방불교에서는 ‘고타마 붓다’라고 부르는데 고타마는 석가모니의 성(姓)이다.

02 그러나 남방불기는 북방불기나 전교(傳敎)에 기록된 석가탄생과 거의 500년이나 차이가 난다. 북방불기는 기원전 1027년이고, 전교(傳敎)에 따르면 실제의 석가 탄생 년도는 이보다 1년이 빠른 기원전 1028년임을 알 수 있다.(『상생의 길』 3호 p.156 참조)

03 훗날 아소카왕이 이곳에 석주(石柱)를 세웠는데 그 내용은 “위대한 분이 태어났음을 알리기 위해 이곳에 석주를 세우게 되었다. 룸비니 마을은 토지의 세금을 면제한다.”는 것이다.

04 라훌라는 ‘속박(束縛)’이라는 뜻으로 부인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석가모니는 하늘을 쳐다보며 “라훌라(속박)가 태어났어!”라고 소리쳤다고 한다.(팔리어 사회 교과서 『Jataka』vol. p.60)

05 그의 출가의 직접적인 동기는 여러 설이 있다. 부왕과 농경제에 참석하여 생명의 무상함을 느끼고, 궁성의 동서남북의 사문을 나가 산책을 하며 늙은 사람·병든 사람·죽은 사람 그리고 출가한 사람을 만나 인간세속의 괴로움과 그로부터의 이탈을 생각하게 된 것이 주된 동기이며 직접적인 동기는 즐거운 연회가 끝난 후 잠에 골아떨어진 궁정미녀들의 추한 모습을 본 것이라고 한다.

06 불교의 근본원리로서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정(中正)의 도에 바탕을 둔 사상. 즉, 즐거움과 괴로움, 있음과 없음. 생(生)과 멸(滅)등 상대적인 어떤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07 『잡아함경』에는 육신이나 감정에 집착하는 것을 악마라 하였고, 눈 코 귀 등 감각기관이 그 대상에 집착하는 것을 악마의 갈고리라 했다.

08 북방불교에서는 성도일을 35세 되던 음력 12월 8일로, 남방에서는 5월 보름으로 보고 있다.

09 보리수 나무 아래서 정각을 얻은 후 마왕이 나타나서 붓다에게 말한다. “세존이시여, 길고 긴 세월에 걸쳐 애써 고행하여 이제 붓다가 되셨으니 이제 대열반에 드소서, 지금이 바로 그때이오니, 원컨대 붓다께서 대열반에 드소서.” 이때 붓다는 “일체 중생이 아직 나의 법안에서 이익을 얻지 못했거늘 어찌하여 나에게 속히 대열반에 들라고 하느냐?”고 하자 마왕은 지팡이로 땅을 그으면서 “이 욕계는 더 이상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괴로워했다.(『방광대장엄경』)

10 이는 당시의 민중들 사이에서 최고의 신이 석가모니에게 간청했다는 것은 가르침 법의 탁월성과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스님이 설법을 하기 전에 대중들이 설법해 줄 것을 요청하는 ‘청법가’를 부르고 나서야 설법을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1 ‘고귀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완전해진 사람, 존재의 참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열반(涅槃) 또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을 일컫는다.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다시는 생(生)을 받아 태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12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수닷타가 기증한 기원정사이다. 불교의 미술, 특히 불교의 전설을 소재로 한 부조(浮彫)에는 기원정사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13 불신간아족지각(不信看我足知覺).[공사 3장 3절]

14 북방불기로는 3,000년.

 

 

<대순회보 1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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