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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황제 헌원씨(皇帝 軒轅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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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5 조회5,1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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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 헌원씨는 염제를 대신해 B.C 4617년 등극 천문·지리·인사 등의 가르침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래서 문명의 개조로 위대한 성인으로 그리고 성·웅을 겸비한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황제(皇帝)의 성은 공손(公孫)인데, 희(姬)라고도 하며 이름은 헌원(軒轅)이다. 토덕(土德)의 천자로 토(土)는 황(黃)으로 황하(黃河)의 빛이며 황토의 평야로, 위대한 천자를 표현하여 황제라고 한 것이다. 유태국(有態國)의 제후 소전(少典)의 아들이며, 현재 중국의 하북성인 탁록(啄鹿:상곡(上谷))에 도읍 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북두칠성의 첫째별(樞星:추성) 둘레를 커다란 번갯불이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이에 감응(感應)해서 임신하여 낳은 것이 황제였다고 한다. 낳은 지 칠십일이 채 못 되어 능히 말을 하였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 나이가 들어 장성하매 더욱 총명하고 민첩하여 주위 사람들의 촉망을 받았다. 「전경」을 보면 『난을 짓는 사람이 있어야 다스리는 사람이 있나니 치우(蚩尤)가 작란하여 큰 안개를 지었으므로 황제가 지남거(指南車)로써 치난하였다. 난을 짓는 자나 난을 다스리는 자나 모두 조화로다.』 (교법 3장 30절) 라는 구절이 있는데 역사적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염제 신농씨의 자손의 덕이 점차 쇠퇴해서 제후들이 서로 침략하고 공격하게 되었으므로 백성들은 괴로운 생활을 보내야 했다. 이에 황제 헌원은 처음으로 창과 방패를 만들어 침략을 일삼는 제후들을 정복했다. 마침내 황제와 염제유씨(炎帝楡氏)는 무력에 호소하여 판천(阪泉)의 들에서 싸웠다. 처음에는 쌍방이 서로 고전하였으나 3번의 싸움 끝에 황제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치우(蚩尤)만은 가만있지 않았다. 치우는 구리쇠(銅鐵)의 이마를 가진 사람으로서 곧잘 큰 안개를 일으켰다. 처음에는 황제가 불리하였지만 제후들과 연합하여 탁록(啄鹿)에서 결전을 벌였다. 치우는 짙은 안개를 일으켜 황제의 군대를 어지럽혔으나, 황제는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탁록의 들에서 싸워 그를 사로잡아 죽였다.

  또한 「전경」에 『4617년 전 정사년에 황제 헌원이 왕위에 올랐으니 원의 시작이다. 만상만사가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모든 법과 모든 글의 근원이 된다. 천문·지리·인사 모두가 황제 때부터 가르침이 시작되었고, 또 사기에서 역시 기록하기를 황제부터 시작되었다. 四千六百十七年前丁巳 軒轅立極肇斯元 萬像萬事皆有是 諸法諸書 總此源 天文地理 人事 皆黃帝之所始敎而 史記記年亦自黃帝始也(사천육백십칠년전정사 헌원입극조사원 만상만사개유시 제법제서 총차원 천문지리 인사 개황제지소시교이 사기기년역자황제시야)』 (교운 2장 26절) 라는 내용이 있듯이 황제는 문명의 시조로 손꼽힌다.

  황제는 염제를 대신하여 기원전 4617(1923년 기준) 천자로 등극하여 토덕의 왕이 되었다. 그가 입극할 때 오색구름의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났기 때문에 벼슬 이름에 운(雲)자를 붙였다. 그는 산림을 개척하고 도로를 개통시키는 등 하루도 편안히 지낸 적이 없었다. 동쪽으로는 해변까지 이르러 환산(丸山:山東省(산동성))에 올라 대종(岱宗:泰山(태산))에 미치고 서쪽으로는 공동(空桐:甘肅省(감숙성))에 이르러 계두산에 올랐으며 남쪽으로는 양자강(揚子江)에 이르러 웅산(熊山:호남성(湖南省))과 상산(湘山:湖南省(호남성))에 올랐으며 북쪽으로는 훈육(흉노의 별명(別名))을 쫓아버렸다.

  천지산천(天地山川)의 신(神)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봉선(封禪:천자가 태산에 올라 토단(土壇)을 쌓고 天神(천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태산 아래의 소산(小山)인 양부(梁父)에 내려와 땅을 청소하고 山川神(산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은 황제 때에 가장 성행했다고 한다. 일찍이 구리를 캐서 솥(鼎)을 만들었는데, 세 발과 두 귀가 있는 그릇으로서 천자(天子)의 존위(尊位)를 상징하는 보배로운 솥으로 그 겉면에 만세의 교훈과 법칙을 새겨 두었다. 또한 배와 수레를 발명하고 집을 짓는 법과 옷 짜는 일을 발명했으며, 약초를 조사 분석하여 의료기술을 폈다. 풍후(風后)를 재상(宰相)으로 삼고, 역목(力牧)을 장군으로 임명하였으며 문자(文字)를 제작하게 하였다.

  어느 날 황제는 꿈에 황하에 큰 물고기가 그림을 등에 지고 있는 것을 보고 일월성진(日月星辰)의 형상을 알았다. 대요(大橈)에게 십간 십이지(十干 十二支) 60갑자(甲子)를 만들게 하였으며 용성(容成)은 역서(曆書)를 만들었고 예수(隸首)는 산수(算數)를 고안하여 농업과 제사에 쓰는 물건의 장단, 대소, 경중 따위를 명확하게 하여 백성들을 크게 이롭게 하였다. 그리고 영륜은 해곡(곤륜산의 북쪽지명)의 대나무를 써서 12율(律)의 대나무 피리를 만들었는데 피리는 봉황 수컷의 울음소리 여섯, 암컷 울음소리 여섯으로 되어있다. 음양십이율(陰陽十二律)의 음계(音階:중국악기 발달의 기초) 또 육율(六律)의 으뜸소리인 황종(黃綜)의 궁(宮)의 음에서 육려(六呂)가 생기고, 이것을 열두 달에 해당되어서 기후의 관측을 했다. 또 열둘의 종을 만들었는데(十二律에 배합시켜) 어느 것이나 다섯 가지의 협화음(協和音)이 되도록 만들어 졌다.

  황제가 구(丘:河南省(하남성))에 있었을 때 서릉씨(西陵氏)의 딸 유조를 얻었다. 그에게 2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성을 이어받은 (제후가 된) 사람은 14명이었다. 그는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여러 신하들과 후궁들도 뒤따라갔다. 천자의 상(喪)을 가리켜 분검지통(分劍之痛)이라고 하는데, 유래된 말이라 한다. 그가 붕어하자 협서성(陜西省)에 묻혔으며, 황제의 능이 있는 고을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서 황능현(黃陵縣)이라고 불리고 있다.

 《대순회보》 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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