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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의암(義菴) 손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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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5 조회4,3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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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한국 민족주의의 위대한 지도자중의 한 사람이며 한국 독립운동을 낳게 한 1919년 3월 1일 봉기의 선두적 지도자로서 손병희 선생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천도교의 3대 성사라는 사실과 종교의 지도자로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제3대 교주로서의 일을 맡은 지 100주년이 지난 지금 그에 대해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선생의 일대기와 사상관 그리고 민족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살펴보기로 한다. 

 

  선생의 성은 손(孫)이요, 名은 병희(秉熙)요, 자(字)는 응구(應九)이며 호는 의암(義菴)이니 철종 12년(1861년) 4월8일 충북 청원군 북이면(北二面) 금암리(琴岩里)에서 탄생하였다. 두흥(斗興)의 큰아들로 어머니는 둘째 부인 최씨이며 방정환(方定煥)은 사위이다. 서장의 신분으로 어린 시절부터 약하고 불우한 이웃을 도우려는 마음이 남달리 강하였다. 22세 때인 1882년(고종 19년)10월 5일 큰조카인 천민(天民)의 노력과 서접주의 권유로 입교하게 된다. 서접주가『동학은 사람을 한울같이 섬기고자 하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도이니 양반과 상놈, 적자와 서자, 빈부의 차별이 없는 새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목적이요, 이처럼 동학은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장생, 지상천국건설의 후천 오 만년 무극 대도이니 한번 같이 믿어봅시다』고 하는 말을 듣고 선생은 무릎을 치면서『동학이 그런 도라고 하면 믿고 말고 여부가 있소』하며 즉석에서 입교식을 행하고 그 날부터 수도에 전념하였는데 매일 주문을 독송하였다.

  그는 동경대전 논문학에「차제도법이 유위(猶爲) 이십일자이사 (二十一字而巳)」란 대목에 이르러 무엇을 한참 생각하는 듯 하더니 책을 덮어두고 『경전 공부는 그만 두겠소, 주문 공부만 해서 나의 마음이 어느 정도 바로 잡힌 뒤에 하겠소』하고는 순전히 주문만 정독 하였다고 한다. 입교 3년 만인 갑신 9월에 최시형을 처음 만났는데 최시형은 선생의 과거를 듣고 매우 기뻐하며『수운께서 무극한 이내 도는 삼년불성(三年不成)하게 되면 그 아니 헛말인가 하신 말씀이 오늘 그대를 보니 과연 적중하였다.』하시고 대도의 종지와 수도 수행의 절차를 상세히 말하였다.

  1892년에는 최시형 등 간부들과 함께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하였고, 동학대표 40여명은 서울 광화문 앞에서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하며 척왜척양(斥倭斥洋)을 부르짖었다. 1894년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혁명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자 탄압의 손길이 적게 미쳤던 함경도와 평안도지방에서 피신하여 교세확장에 힘썼다. 이러한 그의 활약이 인정되어 최시형에게서 의암(義菴)이라는 도호를 받게 되었으며 1897년 12월 24일 실제적인 3대 교주가 되었다. 1899년 각세진경(覺世眞經)이라는 새 교리에 관한 교서를 저술했는데 인내천 원리를 인간의 마음과 정신과 마찬가지로 사물에도 적용했다. 선생은 1901년 일본 오사카에 머물렀는데 망명생활 중 본국과 연락하며 교세의 재건에 힘쓰는 한편 새로운 문명학술을 배우게 하고자 일본 유학을 알선하여 유학생이 상당히 배출되었다. 1903년 일본에 있는 동안 손병희 선생은 러일전쟁의 가능성을 알게 되었고 일본의 승리를 확고하게 점쳤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후 1904년 4월에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했다. 새로운 단체의 회원에게 단발령을 명령했고 7월에는 단체 명을 중립회(中立會)라고 고쳤다가 다시 진보회로 변경하고 기본 취지 및 강령과 규칙을 제정했다. 

  한편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고 알려진 또 하나의 개혁모임이 독립협회의 여당(餘黨)으로 설립되었다. 그 협회는 1896년 개화파 인사들로 조직되었는데 나중에 일진회(一進會)로 개명했고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다. 일진회의 지도자들은 진보회에 의해 이루어진 발전에 기쁨을 표시하고 또 두 회의 목적이 유사함을 들어 합병을 제의했다. 그 단체는 일진회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으나 선생의 수석부관이며 진보회의 회장이었던 이용구가 새로운 회의 실질적인 영도자가 되었다. 선생은 이용구 일파를 동학에서 축출하는 한편 동학의 이용을 막고자 정교분리와 사후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래서 1905년 12월 1일에 동경대전의 「도즉천도(道則天道)」를 인용하여 동학을 천도교라 개칭하면서 동학의 참신한 정신을 되살리고자 본래의 종교운동으로 돌아갔다.

  이때 동학의 본지(本旨)인 인내천 사상을 일깨워 『사람이 곧 하늘이니 지금의 세상이 이와 같이 혼란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혼란한 때문이라 먼저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1906년 1월 일본에서 귀국하여 2월 16일에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반포하고 천도교중앙총부를 서울 다동(茶洞)에 설치하였다. 1907년 선생은 처음으로 서울에서 청년들을 천도교 교리로 훈련시키기 위해 교리강습소를 세웠다. 선생은 일본 망명 중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함양 시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임을 깨닫고 학교 운영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1910년 초 중앙교당 옆에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여 천도교 월보 1호를 내고 뒤이어 보성사와 병합하여 시설을 확충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의 탄압은 강도를 더해 만 갔다. 탄압 속에서도 포교에 더욱 힘쓰고 교당 건립에 진력하였으며 민족의식의 고취에 열의를 더해갔다.

  제 1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이른 1916년 민중봉기를 건의하는 천도교인의 건의가 나오기 시작하고 1918년 민족자결주의의 영향과 연합국의 승리에 의한 국제정세의 변화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1919년 2월 27일 밤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을 인쇄, 이튿날 가회동 자신의 집에서 민족대표 23인이 모여 거사를 재확인하고 파고다공원 부근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그는 3월 1일 기념식을 마친 뒤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독립선언서를 읽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민족주의와 독립이라는 대의(大義)에 대한 조선인의 불굴의 정신은 총칼로써 위협할 수 없었다. 일본 무관의 위협 아래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비무장, 평화적 민족주의의 표현은 조선 민족주의의 영원한 횃불이 되어 타오르고 있으며 일본 식민지 수법에 반대하는 세계 여론을 환기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후 세계적으로 독립운동이 활발해 졌으니 4월 6일 인도 간디의 불복종운동이 개시되었고 5월에는 북경에서 5·4 학생 운동이 있었고 아프가니스탄이 독립운동을 개시하여 8월에 독립하였다. 알바니아가 1920년 1월 독립을 선언하였고 3월 7일 시리아·이라크가 독립을 선언하였다. 1922년 이집트와 1923년 네팔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손병희 선생은 천도교 교단 내부의 조직과 도의 사업에서 매우 큰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는 정치적 재능과 행정적 능력을 지닌 지도자이었으며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민족주의자의 선봉장이었다. 상제께서는 손병희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대인의 행차에 삼초가 있으니 갑오(甲午)에 일초가 되고 갑진에 이초가 되었으며 삼초를 손병희가 맡았나니 삼초 끝에 대인이 나오리라.』하시고 그의 만사를 다음과 같이 지어서 불사르셨다. 지충지의군사군 (知忠知義君事君) 일마무장사해민 (一魔無藏四海民) 맹평춘신배명성 (孟平春信倍名聲) 선생대우진일신 (先生大羽振一新)」(예시 59절) 또 「손병희가 영웅이라. 장차 난리를 꾸미리니 그 일을 말함이나 그가 선진주(先眞主)라 박절하게 성돌 밑에서 턱을 괴고 앉아서 거의(擧義)하므로 성사치 못하리라.」하셨다.(예시 60절) 비록 선생의 도모했던 일이 실패했더라도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일을 했음 에는 틀림이 없다.

  《대순회보》 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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