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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단종(端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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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5 조회4,4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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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맺힌 단종, 숙모전에 모셔져  

도주께서 神明解寃공사를 행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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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종의 위패가 묘셔진 있는 숙모전

            

  『전경』교운 2장 57절에는 도주님께서 동학사 경내에 있는 동계사(東雞詞). 삼은각(三隱閣)과 단종왕의 숙모전(肅慕殿)을 찾으신 일이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병신년 3월에 박한경은 도주의 분부를 좇아 류철규·박종순과 함께 정하신 바에 따라 공주 동학사(東鶴寺)에 이르렀도다. 이 절의 경내에 동계사(東雞詞) 삼은각(三隱閣)과 숙모전(肅慕殿)이 있고 생육신과 사육신을 추배한 동묘 서묘가 있으니 신라 고려 조선의 삼대충의 지사를 초혼한 곳이로다.   

  이곳의 관리자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이고 정기적으로 청주에서 내왕하면서 관리하고 있었도다. 그러므로 평상시에는 문이 닫혀 사람들이 출입할수 없는데 이날 따라 그 후손이 도주께서 불러 나온 듯이 미리 와서 문을 여니 도주께서는 배종자들을 데리시고 이곳을 두루 살피셨도다.  

  그리고 동학사 염화실에서 이레 동안의 공부를 마치시고 말씀하시길 「이번 공부는 신명해원(神明解冤)을 위주한 것이라」고 이르셨도다.』 

  이처럼 도주께서는 염화실에서 행한 공부를 신명 해원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비운의 왕으로 기억되고 있는 단종에 대한 기록과 사육신과 생육신을 중심으로 당시의 정황과 군신간의 충성과 의리 그리고 선비로서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삶을 조명하고자 한다.  

  세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전에 문종은 자신이 병약하고 세자가 나이 어린것을 염려하여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등에게 세자가 즉위하여 왕이 되었을 때의 보필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집현전의 학사인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등에게도 좌우협찬(左右協贊)을 부탁하는 유언을 내렸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은 비록 총명하다 할지라도 정사를 제대로 처리하기에는 미흡했다.  

  그러나 신하들이 황표정치를 함으로써 자기들 마음대로 관리를 임명하고 파면하는 정치를 하였고 이것이 종친 가운데서도 특히 임금의 숙부가 되는 수양대군에게는 크나큰 불만이었다.  

  더욱이 수양대군은 「분경은 금한다」는 말을 듣고 화를 냈다. 분경이란 분주히 경쟁하여 드나든다는 뜻으로 권세 있는 집에 드나들며 벼슬을 얻는 것을 금한다는 말이다.   

  이는 수양대군을 위시한 왕족의 권력개입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개국공신인 청주 한씨의 한상질의 손자 한명회가 집현전 학사인 권람의 추천으로 수양대군을 보필하면서 권력의 중심이 단종에서 수양대군으로 옮겨가는 일이 시작되었다.  

  수양대군의 집에 들어간 한명회는 본격적으로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1453년 늦가을, 수양대군의 집에서는 활 쏘기를 한다는 구실로 무사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으니 수양대군을 비롯하여 권람, 한명회 등 60여명이 술잔을 기울이며 거사에 필요한 계획을 세웠다.   

  제일 먼저 백두산 호랑이로 알려진 김종서를 수양대군이 무사를 데리고 가서 죽이고 곧장 대궐로 들어가서 단종에게 김종서를 죽인 이유를 설명하고 역적모의를 한 신하들의 처벌을 강요한다.  

  단종은 김종서가 역적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였고 또 역적의 무리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수양숙부의 지시대로 역적의 무리를 잡아죽이라는 영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수양대군은 어명을 핑계 삼아서 승지 최항에게 정승, 판서급의 각 대신들을 모조리 대궐로 들도록 했다.  

  한명회는 생살부를 쥐고 홍윤성 구치관등과 함께 쇠뭉치를 쥔 채 대궐 문 앞에서 지키고 섰다가 들어오는 순서대로 대신을 죽이니 김종서와 함께 10년 동안 북쪽 국경의 개척에 공이 큰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우찬성 이양이었다.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은 감옥에 갇혔으며, 병조판서 민신은 능 공사장에서 감독하다가 수양대군이 보낸 서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조극관의 아우인 조수량도 파직 시켜 귀양을 보내고, 충청감사 안완경도 귀양을 보냈다가 죽였다. 모든 일을 끝낸 수양대군 일파는 새 조정을 이끌어갈 사람을 뽑았다.   

  수양대군은 뒤에서 조정하고 권람과 한명회가 승지 최항을 시켜서 임명을 단종에게 허락 받도록 하였다.   

  어린 단종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들이 가지고 온 문서에 옥새를 찍고 교지를 내렸다.   

  수양대군은 영의정과 이조, 병조판서를 겸하고 경연의 영사까지 겸했으므로 정권과 군사권을 한 손에 쥔 절대군주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양대군 일파가 모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황표정치는 막을 내렸다.  

  권람과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왕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대군과 군들과의 장애물을 없애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수양대군 일파는 대군과 군들을 여러 가지 구실로 트집을 잡아죽이거나 귀양 보내고 그와 친하거나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힘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극도의 정신적 고통을 겪은 단종은 왕비와 의논하여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하고, 내시 전균을 불러 그 뜻을 전했다.  

  1453년 단종을 보필하는 중신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던 한명회, 권람 등에게 강요되어 단종은 문무백관 백 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새 임금이 된 세조는 여러 교지를 발표하고 단종 임금을 상왕으로 하여 창덕궁 동쪽에 있는 수강궁에서 지내도록 하고 단종비 송씨는 의덕대비로 호를 올렸다. 그러나 자신들을 아껴주던 세종대왕과 어린 단종의 뒷일을 부탁하던 문종을 생각하는 신하들은 세조와 그 세력들의 처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된 후 1457년에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그런데 수양대군의 동생이며 노산군의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순흥(順興)부사 이보흠과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사(賜死)되자 노산군은 다시 강등이 되어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 당하여 1457년(세조 3년)10월 24일에 영월에서 죽었다. 단종이 승하했을 때 시신을 치우는 이가 없자 영월 호장 엄홍도가 시신을 거두어 강릉에다 모셨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과 강봉은 200여년 후인 1681년(숙종 7년)에 신원(伸寃)되었는데, 이해에 그는 대군(大君)에 추봉되었으며, 1698년(숙종 24년)에는 임금으로 복원되어 묘호(廟號)를 단종이라 하였다. 

 《대순회보》 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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