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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정역(正易)』의 저술자 김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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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6 조회5,3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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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구 내주동을 떠나신 상제께서는 익산군 이리(裡里)를 거쳐 다음날 김일부(金一夫)를 만나셨도다. 그는 당시 영가무도(詠歌舞蹈)의 교법을 문도에게 펼치고 있던 중 어느 날 일부가 꿈을 꾸었도다. 한 사자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일부에게 강사옥(姜士玉)과 함께 옥경(玉京)에 오르라는 천존(天尊)의 명하심을 전달하는도다. 그는 사자를 따라 사옥과 함께 옥경에 올라가니라. 사자는 높이 솟은 주루금궐 요운전(曜雲殿)에 그들을 안내하고 천존을 배알하게 하는도다. 천존이 상제께 광구천하의 뜻을 상찬하고 극진히 우대하는도다. 일부는 이 꿈을 꾸고 이상하게 생각하던 중 돌연히 상제의 방문을 맞이하게 되었도다. 일부는 상제께 요운(曜雲)이란 호를 드리고 공경하였도다. (행록 2장 2절)  

 

  김일부(金一夫; 1826년 10월 28일∼1898년 11월 25일)는 황산군 모곡면 담곡리(현 충남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에서 부친 김인노(金麟魯)와 모친 대구서씨(大邱徐氏)의 사이에 맏이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이름은 항(恒)이고, 자(字)는 도심(道心)이며 호(號)는 일부(一夫)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덕기도골(德器道骨:어질고 너그러운 도량과 재능)로 모습이 비범하고 배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의 용모는 손을 드리우면 팔이 무릎을 넘고, 음성은 철성(鐵聲)으로 매우 기이했다고 전한다.   

  20세에 민씨(閔氏)와 결혼하여 한 명의 딸을 두었으나 가사에는 별 뜻이 없고 글공부에만 전념하였다. 유소년시기와 청장년기에 있어서의 학문수업에 관한 이야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의 학풍과 문중의 영향을 미루어 볼 때 36세 이전에는 주로 문사(文詞)와 예법(禮法)에 대한 공부에 힘썼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30살 이전에 유학(儒學)의 학문적 성과를 이미 쌓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나이 30살이 넘어 40살에 이를 때까지도 명망이 높은 스승을 만나 학문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36살 때 당시 서울에서 하향한 북학계의 연담(蓮澤) 이운규(李雲圭)01를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하였으며, 그가 그 지방을 떠나게 되자 당시 호남의 거유(巨儒)로 알려진 인산(仁山) 소휘면(蘇輝冕)02에게 수학하였다. 두 스승 가운데 특히 연담 이운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학문적 진로가 일대 변천의 결과를 일으키게 된다.  

  일설에 따르면 연담이 최제우(崔濟愚)와 김광화(金光華)와 김일부(金一夫)를 차례로 불러 제우와 광화는 각각 떨어져가는 선도(仙道)와 불도(佛道)를 대표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니 그 일을 잘 하라고 당부하고, 일부에게는 “그대는 쇠(衰)하여가는 공부자(孔夫子)의 도(道)를 이어 장차 크게 천시(天時)를 받들 것이니 이런 장할 데가 없다. 이제까지는 ‘너’라 하고 ‘해라’를 했으나 이제부터는 ‘자네’라 하기도 과만한 터인즉 ‘하소’라 할 것이니 그리 알고, 예서(禮書)만 너무 볼 것이 아니라 『서전(書傳)』을 많이 읽으소. 그렇게 하면 자연감동(自然感動)이 되어 크게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때 연담에게 받은 시 한수가 “맑은 것을 보는 데는 물만 같은 것이 없고, 덕을 좋아함은 어짐을 행함이 마땅하다. 달빛이 천심월에서 움직이니 그대에게 권하노니 이 진리를 찾아보게나[觀淡莫如水 好德宜行仁 影動天心月 勸君尋此眞].”라는 글이다.   

일부는 연담의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이라는 명제로 피 나는 노력과 끊임없는 정진을 거듭하게 된다. 그리하여 일부의 36세 이후의 학문은 『서전』과 『주역(周易)』에 대한 새로운 연구에 열중하는 한편 ‘음·아·어·이·우’라는 다섯 자의 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오음주송(五音呪頌)에 따라 춤을 추었는데, 그 도약(跳躍)이 얼마나 심했는지 인내강변과 용바위 근처에는 풀 한 포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 일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노래[음·아·어·이·우]를 부르면서 춤을 추는 것이 일과였다고 한다. 이때 사람들은 그를 ‘음아생원’이라 하며 광인(狂人)으로 여겼고, 문중에서는 족보에서 지워질 정도로 온갖 수모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광경을 본 권종하(權種夏: 일부의 고종제(姑從弟)로서 후에 제자가 됨)는 노래와 오음성의 곡조에 맞춰 돌아가는 춤 맵시가 흡사 선인이 옥적(玉笛: 청옥이나 황옥으로 만든 피리의 일종)을 희롱하는 듯하고 백학(白鶴)이 공중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아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하게 하는 ‘영가무도(詠歌舞蹈)’라고 하였다.  

  일부가 오음주송으로 심기의 수련을 쌓으면서 역리의 연구에 정진한지 19년 만인 54세 되던 해(1879년)였다. 수련 중에 눈에 이상한 괘획(卦劃)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전에 보지 못한 팔괘의 획으로 뒤덮여 보였다는 것이다. 일부는 가무(歌舞)에 너무 열중하여 자신의 기력이 쇠하여 나타난 현상이라고 의심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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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주역』 「설괘전」에 “神也者 妙萬物而爲言者也…故 水火相逮 雷風不相悖 山澤通氣然后 能變化 旣成萬物也”03라고 한 구절에서 자기의 눈에 나타난 팔괘가 이 설괘에서 말한 것과 부합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눈앞에 떠오르는 팔괘도를 그림으로 옮겼더니 공맹(孔孟)의 영상이 나타나 일부에게 “내가 일찍이 뜻하면서도 이루지 못한 것을 그대가 이뤘으니 이런 장한 일이 있나” 하면서 ‘일부(一夫)’라는 호칭까지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전에 없었던 새로운 역의 팔괘도를 그려내고 이에 『정역(正易)』을 찬술하였다. 일부는 자기가 찬술한 『정역』이 복희씨(伏羲氏)가 지은 ‘제일역’과 문왕(文王)이 지은 ‘제이역’에 따르는 제삼역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역은 문왕이 지은 ‘선천역’에 뒤따르는 ‘후천역’이라고 하였다. 일부는 복희·문왕의 역은 모두 선천시대의 것으로 보고 자신의 정역은 후천시대의 것으로 보았다.  

  일부의 정역이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56세(1881년)에 정역팔괘도(正易八卦圖)와 「대역서(大易序)」를 얻고, 3년 뒤에 『정역』의 상편인 「십오일언(十五一言)」에서 「무위시(無位詩)」까지 찬술하고 다음 해에 「정역시(正易詩)」와 「포도시(布圖詩)」를 비롯하여 그 하편인 「십일일언 (十一一言)」에서 「십일음(十一吟)」까지 저술하여 60세(1885년)에 『정역』을 완성하였다. 스승인 연담이 일부에게 학문을 권장한지 25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일부가 매부(妹夫)인 최형석(崔泂奭)의 집(논산시 부적면 부황리 다오개)에 거처할 때 주야로 제자들과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일부는 여간하여 눕는 일은 거의 없고 대개 두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항상 의관을 정제하여 위의(威儀)를 잃는 일이 없었다 한다. 새벽이면 뒷동산에 올라가 송림 사이에서 “복 받아 가거라.”고 외친 일화가 전해온다.  

  당시 김일부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정역의 원리와 오음정의에 의한 수행을 권장하였다. 이때 정역은 앞으로 맞이할 후천 세계의 개벽을 논한 것이라 하고, 이 후천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수양법이라 하여 연담으로부터 받은 오음주송을 제창하였다. 이러한 오음의 주송공부는 노래와 춤으로 인해 마음이 화평하게 되고, 병이 치유되는 기적이 나올 뿐만 아니라 신화영통(神化靈通)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고 한다. 당시 따르던 제자와 신도들이 정역을 공부하였고, 뒤에 이들이 일부계(一夫系) 신종교의 창시자들이 되었다.  

  1893년 2월 일부와 제자들은 당시 재기를 모색하던 동학의 난을 피하여 계룡산의 남쪽에 위치한 국사봉(國師峰)에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일부는 이곳을 중심으로 포교에 전념하다 1898년 71세에 생을 마쳤다.  

 

참고자료

• 이정호, 『正易硏究』, 국제대학 인문과학연구소, 1976.

• 이정호, 『정역과 일부』, 아세아문화사, 1985.

• 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람』, 대흥기획, 1993. 

<대순회보> 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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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생몰년 미상. 본관은 전주(全州), 본명은 수증(守曾), 호는 연담(蓮潭). 운규(雲圭)는 별칭이다. 이서구(李書九)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문참판(文參判)의 벼슬을 한 적이 있다. 일부가 연담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특별한 기록은 없다. 서울에서 낙향한 연담이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군 양촌면 모촌리[띠울]에 은거하였는데. 거주기간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 다만 연담이 말년에 무주, 용담을 거쳐서 고향인 천안의 목천으로 떠났다는 기록과 연담과 일부가 사돈 간이라는 사실을 볼 때 짧지 않은 만남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신문화연구원, 2002)  

02 1814~1889.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순여(純汝), 호는 인산(仁山). 익산에서 출생하고 홍직필(洪直弼)을 사사(師事)하였다. 1881년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제수 받았으며 곧 전설시별제(典設寺別提)에 제수되었다. 그 뒤 전라도사와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후배들을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는 『인산문집』 17권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신문화연구원, 2002)  

03 신이라는 것은 만물을 묘하게 함을 말한 것이니… 그러므로 물과 불이 서로 잇고 천둥과 바람이 서로 어그러지지 않으며, 산과 못이 기운을 통한 뒤에라야 변할 수 있어서 만물을 이룬다. (이기동 역해, 『주역강설』,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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