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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신명소설(小雪) 절후를 관장하는 이세적(李世勣)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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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0.01 조회4,3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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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교무부

황실의 성을 하사받은 이세적 

  이세적(李世勣, 594~669)은 자(字)가 무공(懋功)으로 조주(曹州) 이호[離狐, 현재 산동성(山東省) 동명(東明)]사람이다. 그의 성은 본래 서씨(徐氏)인데 황실의 성인 이씨(李氏)를 하사받았다. 당의 3대 황제인 고종(高宗)이 즉위한 뒤 ‘세적(世勣)’이란 그의 이름이 2대 황제 ‘이세민(李世民)’의 ‘세(世)’와 겹친다 하여 이적(李勣)으로 불리었다. 이런 까닭으로 그는 시기에 따라 서세적, 이세적, 이적으로 불리었다. 이세적은 당 초기의 이름난 명장(名將)으로 고조 이연(李淵), 태종 이세민과 고종 이치(李治)01를 보좌한 3대(代)의 중신(重臣)이었다. 

  이세적은 수나라 말에 이호에서 멀지 않은 활주(滑州) 위남[衛南, 하남성(河南省) 활현(滑縣)]으로 이사하였다. 이세적의 집은 신분이 높지는 않았지만 부유했다. 부리는 종들이 많았고 곡식이 창고에 가득했다. 이세적의 아버지 서개(徐蓋)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빌려주는 것을 좋아했으며 두루 나누어 줄 때에는 친소(親疎)를 따지지 않았다. 

  대업[大業, 양제(煬帝)의 연호로 605~616] 말년에 위성(韋城, 하남성 활현) 사람 적양(翟讓)이 무리를 모아 도적이 되었다. 이때 이세적의 나이 17세였는데 적양을 좇았다. 당시는 수나라 곳곳이 도적의 소굴로 변하는 시점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17세의 나이에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의 대담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세적은 이 시기의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나이 열두세 살 시절에 무뢰배(無賴輩) 도적이 되어서 사람을 만나면 죽였다. 열네다섯 살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도적이 되어서 기분이 좋지 않게 되면 사람을 죽였다. 열 일곱 살에는 훌륭한 도적이 되어서 진지(陣地)에 나아가서야 마침내 사람을 죽였다. 스무 살에는 대장이 되어서 군사를 사용하여서 사람의 목숨을 구하였다.”02

  이세적이 적양에게 유세했다.

  “공이 있는 이 땅은 공과 저 서세적의 고향입니다.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노략질하기에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송(宋), 정(鄭) 양군(兩郡)은 변수 가 흐르는 곳으로 지나다니는 배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곳에 가서 지나가는 배를 위협하면 충분한 밑천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양이 이세적의 말을 그럴 듯하게 여겨 두 군의 경계로 가서 관선(官船)과 민간의 배를 약탈하였다. 이렇게 하여 물자가 풍부해지니 적양의 군대는 크게 정비되어 그 수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 수나라는 관선이 약탈당하고 적양의 세력이 강력해지자 제군(齊郡) 통수(通守) 장수타 에게 2만의 병력을 주어 이들을 토벌할 것을 지시했는데 수

군(隋軍)은 도리어 이세적에게 패배했다. 이는 당시 수나라가 이미 지방의 반란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기도 하지만 이세적의 실력을 보여 준 사례이기도 한 것이다.

  잠시 이 당시 수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수나라에 최초로 반기를 든 인물은 양제(煬帝)의 집권에 큰 공을 세운 양소(楊素)의 아들 예부상서(禮部尙書) 양현감(楊玄感)이다. 양현감은 613년 수양제의 2차 고구려 침공을 틈타 반란을 일으킨다. 수양제의 급속한 회군(回軍)으로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후 수나라에 대한 반란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양현감 반란의 주모자는 이밀(李密)03이었다. 양현감의 반란이 진압되고 도망자의 신분이 된 이밀은 여러 도적들을 돌면서 자신의 생각을 유세하였으나 처음에는 이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도적떼들에 불과했던 적양의 무리들에게 ‘천하’를 운운하는 이밀의 주장은 듣기에 따라서는 황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적양의 빈객이 된 이밀이 얼마 되지 않아서 이세적과 왕백당(王伯當)의 추대로 적양을 대신한 우두머리가 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이밀이 이들의 추대로 우두머리가 된 것에는 일개 도적떼들에 불과한 이들에게 수나라 타도라는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정치상의 혼란으로 도적이 된 이들과 처음부터 왕권에 도전한 사람은 시작부터가 많이 달랐다. 처음에는 이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던 사람들도 이밀의 계책으로 자신들의 세력이 확대되자 이밀의 주장을 신뢰하게 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이씨(李氏)가 양씨(楊氏)를 대신한다”는 참언(讖言)이 당시 민간에 유행했는데 적양을 비롯한 사람들은 참언 속의 이씨가 이밀이라고 믿었다. 세력도 확대되고 이밀이 다음의 황제가 된다는 믿음이 전파되면서 이밀은 적양과 그 부하들의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 

  이밀이 적양을 대신하여 이들의 주군이 되고 세력을 더욱 확대하자 수나라는 왕세충(王世充, ?~622)04에게 명하여 이들의 토벌을 지시했다. 이때 이세적이 기이한 계책으로 낙수(洛水)에서 왕세충을 격파했다. 왕세충과의 싸움에서 승전한 공으로 이밀이 이세적을 우무후대장군(右武候大將軍)에 임명하고 동해군공(東海郡公)으로 봉했다. 

  이때 하남(河南)과 산동(山東) 지역에 홍수가 나자 수양제는 굶주린 백성들로 하여금 여양창(黎陽倉)의 곡식을 먹도록 하였는데 관리들이 제때에 곡식을 풀지 못하여 하루에도 굶어 죽는 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창고에 엄청난 곡식을 두고서도 사람들은 굶어죽고 있었다. 국가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여양창과 같은 수나라의 창고는 반군(叛軍)들에게는 좋은 목표가 되었다. 

  이세적이 이밀에게 말했다.

  “천하의 어지러움은 굶주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금 여양의 곡식을 탈취하여 병사들을 모집한다면 큰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밀이 휘하의 병사 5,000을 이세적에게 주어 학효덕 과 더불어 여양을 습격한 뒤 그곳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여양을 점령한 이세적이 여양창을 열어 식량을 나누어주니 열흘 만에 모여든 병사가 20만 명에 이르렀다. 

  618년 수양제를 수행하던 우문화급(宇文化及, ?~619)05이 양제를 시해하고 병사를 이끌고 북상하면서 여양을 공격하였다. 수양제의 시해 소식에 낙양에 남아있던 월왕(越王) 양통이 양제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양통은 이밀의 죄를 사면해 태위(太衛)에 임명하고 위국공(魏國公)에 봉했다. 아울러 이세적에게 우무후대장군의 직책을 하사하여 북상하는 우문화급을 저지하도록 지시했다. 이세적이 해자(垓字)06를 깊이 파고 스스로를 방어하니 우문화급의 군대는 해자에 막혀 성 아래까지 진격할 수 없었다. 우문화급이 사면을 포위하여 공격했지만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던 이세적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세적이 해자에 지하도를 만들어 나가 싸우니 우문화급은 크게 패하여 병사를 이끌고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619[무덕(武德) 2]년 왕세충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한 이밀이 당 조정에 귀순하였는데 그의 영토가 동쪽으로는 바다에까지 이르고 남쪽으로는 양자강(揚子江)까지 서쪽로는 여주(汝州), 북쪽으로는 위군(魏郡)까지 이르렀다. 이밀의 영역 중 많은 곳이 이세적의 지배 하에 있었다. 이밀이 당에 귀순하자 이밀의 부하들 중 상당수는 왕세충에 항복했다. 여양을 지키고 있던 이세적도 어느 쪽에 항복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위징[魏徵, 입춘(立春) 절후를 관장]이 이세적을 찾아가 당 조정에 귀순할 것을 종용하니 이세적이 마음을 굳히고 장사(長史) 곽효각(郭孝恪)에게 말했다.

  “이 땅의 많은 백성과 영토는 모두 위공(魏公, 이밀)의 소유입니다. 만일 이를 내가 바친다면 이는 주인의 패배를 이용해 나의 공으로 삼는 것이니 제가 수치로 여기는 바입니다. 이제 마땅히 주현(州縣)의 인구와 군사의 숫자를 기록하여 모두 위공에게 올리고 위공이 이를 바치면 즉 위공의 공로가 될 것입니다.”

  이세적은 곧 주현의 호적(戶籍)을 조사하여 이밀에게 보고했다.

  이세적의 귀순 사절로 곽효각이 당 조정에 도착했는데 고조가 표(表)07를 올리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곽효각에게 물었다. 곽효각이 이세적의 생각을 보고 하니 고조가 이를 듣고 말했다. 

  “서세적은 덕을 배반하지 않고 공로를 차지하려 들지 않으니 진실로 사심 없는 충신이로다.” 

  이세적에 대한 당(唐)의 처우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고조가 조서를 내려 이세적을 여주총관(黎州總管)에 임명하고 상주국(上柱國), 내국공(萊國公)에 봉함과 동시에 우무후대장군을 덧붙여 주고 다시 조국공(曹國公)에 고쳐 봉했으며 당 황실의 성인 ‘이씨(李氏)’를 하사하고 양전(良田) 50경(頃)과 좋은 저택을 내렸다. 서세적이 이세적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세적의 아버지 서개도 이개가 되었는데 조정이 제음왕(濟陰王)의 작위를 내렸으나 이개가 왕의 작위를 고사(固辭)하여 서국공(舒國公)으로 등급을 낮추어 봉하고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제수하고 능주자사(陵州刺史)에 임명했다. 또 이세적에게는 하남과 산동(山東)의 병사를 총괄하게 하고 이로써 왕세충의 침략에 대비하도록 했다. 당에 귀순한 이세적이 이런 파격적인 대접을 받을 당시 그의 나이 25세였다. 이세적이 관할하던 여양지역은 당 조정으로선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당에 투항했던 이밀은 오히려 부하인 이세적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세적과는 달리 등급은 높았지만 실권이 없는 지위를 받은 것에 불과했던 이밀은 당의 처우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당에 귀순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당의 처우에 불만을 품은 이밀은 장안을 탈출하여 모반을 꾀하다가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고조는 이세적에게 사신을 보내 이밀이 반역죄로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소상하게 알렸다. 자칫 이세적이 옛 주군인 이밀의 죽음을 오해하여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세적이 표(表)를 올려 이밀의 시신(屍身)을 거두어 장사지내고자 하니 고조가 허락했다. 이세적은 상복(喪服)을 입고 군신(君臣)의 예를 갖추었다. 이세적이 옛 이밀의 부하들과 함께 의장대와 호위대를 갖추고서 전군이 흰 복장을 입게 하고 이밀을 여산(黎山)의 남쪽에 장사 지냈다. 이들은 장례를 모두 마친 뒤에 상복을 벗고 해산하였다.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이세적이 의리 있다고 칭송했다. 

<다음 호에 계속>    

  <대순회보> 1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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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치(李治, 628~683). 어머니는 장손황후. 태종을 이어 649년 즉위, 재위(在位) 34년.   

02 사마광 지음·권중달 옮김, 『資治通鑑 21』 당(唐)시대Ⅱ, 삼화, 2009, p.447.   

03 이밀(李密, 582~618). 아버지 이관(李寬)의 포산공(蒲山公) 지위를 세습하여 수 양제의 친위부 대도독에 임명되었다. 613년 양현감의 반란을 도왔고 617년 적양(翟襄)의 추천으로 그들의 주군이 되어 자신을 위공(魏公)이라 칭했으나 618년 왕세충에 패하여 당에 귀순하였다. 그러나 이후 당에 반기를 들었다가 당의 복병에 의해 죽었다. 

04 경사(經史)에 밝고 병법에 정통하였으며 수(隋) 양제(煬帝)의 신임을 얻어 강도통수(江都通守)가 되었다.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이 위험해지자 양제의 명으로 낙양을 구원하였다. 618년 양제가 죽자 낙양에서 월왕(越王) 양통 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후 강력한 반군이었던 이밀(李密)을 패퇴시키고 다음 해인 619년 양통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정(鄭)’이라 했다. 621년 이세민이 이끈 당군에 패하여 투항하였으며 장안으로 압송된 후 원한을 품은 사람들에게 피살되었다.    

05 수양제의 집권에 공을 세운 우문술(宇文述)의 맏아들. 여러 번 법을 어겨 장안 사람들이 경박공자(輕薄公子)라 칭했다. 수양제가 태자 시절에 호위무관이었고 즉위하자 더욱 관직이 올랐다. 금령(禁令)을 어기고 돌궐(突厥)과 교역하다가 수양제의 노여움을 사 죽을 뻔 하였으나 아버지 우문술의 공으로 겨우 죽음을 면하고 노비의 신분이 되었다. 우문술이 죽고 우문술의 공로를 생각한 수양제에 의해 다시 대장군이 되어 수양제를 따랐다. 617년[대업(大業) 13] 수양제를 수행하던 중 반란을 일으켜 수양제를 죽이고 진왕(秦王) 양호(楊浩)를 세웠다가 얼마 뒤 양호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허(許)라 했다. 이밀(李密)에게 패하고 위주(魏州)를 공격하다가 실패하여 요성(聊城)으로 달아났다가 두건덕에게 패배하여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06 성 밖으로 둘러 판 못.   

07 군주(君主)에게 올리는 서장(書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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