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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염락제현(濂洛諸賢) : 도학(道學)의 비조(鼻祖) 주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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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2.06 조회4,6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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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조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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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경』의 전교(傳敎)에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중국의 육조와 신라 시대에 불도가 중흥했고, 그 후 500년인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 송나라 때 염락(濂洛)의 여러 현인(諸賢)이 한때 도를 전했다(一時傳道)”01라는 구절이 있다. 염락제현은 염락관민(濂洛關閩) 혹은 염락제유(濂洛諸儒)라는 말로도 불린다. 『동몽선습(童蒙先習)』에 따르면 “송(宋)나라 태조(太祖)가 국가를 세운 초기에 다섯 별이 규성(奎星)에 모여 염(濂)·낙(洛)·관(關)·민(閩)에 여러 현인들이 배출되었으니, 주돈이(周敦頤, 1017~1073)와 정호(程顥, 1032~1085)·정이(程頤, 1033~1107) 형제와 사마광(司馬光, 1019~1086)과 장재(張載, 1020~1077)와 소옹(邵雍, 1011~1077)과 주자(朱子, 1130~1200)같은 학자들이 서로 이어 나타나 이 유학의 도를 밝히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02라는 설명이 나타난다. 여기서 염락관민은 지역의 명칭으로서 염계(濂溪)의 주돈이, 낙양(洛陽)의 정호·정이 형제, 관중(關中)의 장재, 민중(閩中)의 주희를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염락이란 주돈이와 정호·정이 형제가 살았던 지역의 명칭을 가리키는 말이고 제현은 북송 오자(五子: 주돈이, 장재, 소옹, 정호, 정이)에서 남송의 주자에 이르기까지 송대의 신유학자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도학자(道學者)라는 별칭으로 불리었고, 그 학문을 ‘도학’03이라 했다. 도학이란 인간의 본성이 우주의 근본과 일치함을 이론적으로 체계화 시키고(性卽理) 그것을 체득해 나감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 학문을 뜻한다. 훗날 주자에 의해 성리학(性理學)으로 집대성되는데, 여기서 일시전도(一時傳道)한 도(道)의 의미가 그들의 사상인 성리학임을 짐작할 수 있다.
  주돈이는 관직 생활 동안 중앙의 요직과는 인연이 없었고 지방관으로서 생활한 시간이 길어서 생전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남송(南宋, 1127∼1279) 시기에 이르러 주희는 맹자(孟子) 이후 1,000여 년이 넘게 끊어져 있던 유학 도통(道統)의 맥을 잇고 성인의 학을 다시 일으킨 인물로 주돈이를 높이 받든다. 이러한 영향으로 후대 학자들에게 주돈이는 중국 사상사의 일대 전환점을 가져온 인물로 평가받는다.04

  

생애
  『송사(宋史)』 「도학전」에 따르면 주돈이의 호는 염계(濂溪)이고 자는 무숙(茂叔)이라고 한다. 도주(道州) 영도현(營道縣) 영락리(營樂里)에서 주보성(周輔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곳에서 유년을 보낸 주돈이는 염계라고 불리는 강가에 나가 풍월을 읊조리고 사색하기를 좋아했다.05 일설에 따르면 14세 때에 염계의 서쪽에 있는 동굴 앞을 거닐다, 그 동굴의 모습을 보고 태극(太極)을 깨우쳤다고 한다. 동굴의 입구는 마치 상현달과 하현달 같았다. 그 중간의 모양은 보름달과 같아서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월애(月崖)라고 불렀다.06
  부친을 15세에 여읜 후 수도인 개봉(開封)에서 관직 생활을 하던 외숙의 집에 의탁하게 된다. 주돈이의 본명은 돈실(敦實)이었는데, 송(宋)나라 영종(寧宗)의 이름과 비슷하다는 외숙의 권유로 돈이(敦頤)로 개명하게 된다. 인종(仁宗) 3년(1036)에는 외숙의 천거를 받아 20세의 나이로 홍주(洪州) 분녕현(分寧縣)의 주부(主簿: 행정문서를 담당하던 하급관리)에 임명되면서 벼슬길을 나서게 된다.07 
  28세에 남안군(南安軍) 사리참군(司理參軍: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형방과 비슷한 관직)으로 임명된 주돈이는 전운사(轉運使, 지방 감찰관)인 왕규(王逵)의 오판으로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죄수를 구하게 된다. 당시 왕규의 위세에 눌려 관리들이 옳고 그름을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이러할 때 그는 홀로 나아가 “죄 없는 사람을 죽여가며 벼슬자리를 유지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라고 말하며 죄인을 변호했다. 그러자 왕규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죄수를 풀어 주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그 지역의 관리와 마을 사람들은 그의 어질고 강직한 성품을 칭송했다.
  이때 남안군의 태수로 있던 정향(程珦, 1006~1090)은 주돈이의 범상치 않은 인물됨을 알아보고, 두 아들의 스승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한다. 바로 이 두 아들이 성리학 형성에 큰 공을 세운 정호와 정이 형제다. 『명도선생전(明道先生傳)』에서 형 정호는 “십오 세부터 아우 정이와 함께 학문의 목적과 관련한 주무숙의 이야기를 듣고 개연히 도를 찾아보려는 뜻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 기록이 나타난다. 이를 통해 주돈이가 두 형제의 사상에 끼친 영향을 알 수 있게 해준다.08
  이후 주돈이는 54세까지 강서(江西)·호남(湖南)·사천(四川)·광동(廣東) 등지에서 지방관을 두루 역임한다. 저서인 『통서(通書)』에서 “정치는 마음을 순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힌 것처럼 그는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 공명정대하며 아랫사람과 윗사람으로부터 덕망이 높았다. 강학(講學)을 좋아하여 가는 곳마다 서당을 지어 후학을 지도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대의 지식인들과도 폭넓게 교류했는데, 불교의 선승과 도교의 도사들과도 흉금 없이 지냈다.09 주돈이와 친분이 깊었던 시인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은 그의 사람됨을 광풍제월(光風霽月: 비가 갠 뒤의 맑고 깨끗한 바람과 달)과 같다고 찬미했다.10 만년에는 강주(江州) 여산(廬山)의 연화봉(蓮花峰) 아래에 염계서당을 지어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이다가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스승인 주돈이를 염계선생이라 부르며 숭상했다.11

  

학문과 사상
  송대 사상사에서 주돈이의 공헌은 유가의 입장에서 노자의 ‘무극(無極)’, 『역전(易傳)』의 ‘태극(太極)’,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중용(中庸)』의 ‘성(誠)’ 그리고 불교사상을 융합하고 재해석해서 자신의 형이상학적인 우주론(宇宙論)과 인성론(人性論)을 확립했다는 점이다.12 특히 그의 태극에 관한 이론은 훗날 주자가 집대성한 성리학의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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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돈이의 사상은 그의 주요 저작인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에서 살펴볼 수 있다. 태극도설은 주돈이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형이상학적인 우주론을 담고 있으며, 『통서』는 「태극도설」을 중심으로 성인이 되는 길을 설명한 작은 책자로 주돈이의 인성론이 담겨있다. 「태극도설」은 불과 250여 글자로 된 단편으로 우주의 생성구조를 상징적으로 도식화한 「태극도(太極圖)」를 해설한 것이다.13 주돈이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태극도」는 북송 초기 도교의 도사로 유명한 진단(陳摶, 871~989)의 「무극도(無極圖)」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있고, 승려 수애(壽涯)로부터 사사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주자는 이를 반박하여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의 사상을 더욱 구체화한 것으로서 주돈이의 자작이라고 주장했다.14 하지만, 태극도의 유래에 관한 다양한 설들을 볼 때, 주돈이의 「태극도설」은 도교와 불교 사상의 영향 아래에 유교적 입장에서 우주론의 체계를 세워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극도」는 다섯 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 맨 위층은 무극이자 태극이며, 둘째 층은 태극이 동(動)하여 음과 양으로 나뉘어진 양의(兩儀)로 검은색은 음을 흰색은 양을 나타낸다. 셋째 층은 오행을 나타낸 것이며 하나의 작은 원은 오행의 묘합(妙合)을 의미한다. 넷째 층에 있는 원은 우주 이기(二氣)를 건과 곤으로 상징하고 그 건곤이 각각 남녀를 낳아 인간이 나타났음을 말하며, 마지막 아래 다섯째 층의 원은 무극·태극의 동정(動靜)과 음양오행 및 건곤의 작용으로써 만물이 화생(化生)함을 의미한다.
  「태극도설」은 전반부의 우주론과 후반부의 인성론으로 크게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무극이면서 태극이다(無極而太極)”라는 말로 시작하는 전반부에서 주돈이는 우주 만물의 근원인 태극의 움직임[動]과 머무름[靜]에 따라 음양오행(陰陽五行)을 낳고, 음양오행이 묘합하여 만물을 낳는다는 우주론을 체계화했다. 즉 태극이 움직여서 양을 낳고, 움직임을 더하여 머무르게 되면 음을 낳는데, 하나인 태극이 양과 음으로 드러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음과 양의 두 기(氣)가 무한한 순환운동을 하는 가운데 변화하고 결합하여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의 오행을 낳고, 음양오행이 교묘히 결합하여 만물을 이룬다는 것이다. 또한, 주돈이는 음양과 오행의 가장 정교한 부분을 정기(精氣)라 불렀다. 이것이 오묘하게 결합하여 건도(乾道)와 곤도(坤道)로 나누어지며, 건도는 남자를 낳고 곤도는 여자를 낳는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어 우주의 생성변화가 끝없이 펼쳐진다고 보았다.
  인성론이 시작되는 후반부에서 주돈이는 성인이 되는 수양방법을 천도론과 인도론의 결합으로 설명한다. 그는 천도란 무극이면서 태극인 하늘의 지극한 성(誠)이며 이 성을 받은 인간이 만물 중에서 가장 영특한 존재라고 말한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배우고 노력하면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람은 오행의 기(氣)를 받은 육체가 있어서 바깥 사물과 접촉하게 되는데, 이때 인간의 감정이 사사로운 욕심에 끌려서 지극히 선한 본성을 잃기 때문에 선악(善惡)의 구별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때에 주돈이는 욕심을 버리면 마음이 고요해져 성인에 다다를 수 있다는 ‘주정무욕(主靜無欲: 마음을 고요히 하여 욕심을 없애는 수양방법)’을 제시한다. 따라서 인간이 하늘의 성을 받은 것은 천도(天道)의 이치이고 이를 회복하는 주정무욕은 인도(人道)인 것이다. 이러한 천도와 인도의 도리로써 중정인의(中正仁義)를 간직한다면 성인과 같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15
  주돈이의 사상에서 나타난 중요한 학문적 의의는 무극이나 오행과 같은 도교의 개념을 유학적 입장에서 흡수 채용하여 기존의 유학에서 부족했던 형이상학적인 면을 보완하여 좀 더 심원한 철학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당시 자구(字句) 해석에 치중하던 훈고학(訓詁學)과 과거의 합격을 목적으로 한 경전 암송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우주의 근본원리를 탐구하고 인간의 도리를 추구하는 새로운 유학으로 전개한 점이다.

  

  새 시대를 열었던 주돈이의 학문과 사상은 유학 본래의 이론에서 인성론과 천도론이 결합된 형태의 정교한 이론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사상계에서 오랜 시간 불교와 도교에 주류 자리를 내주었던 유학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의 사상은 정호, 정이 형제와 주자 등을 거치면서 성리학이라고 불리는 중국 유학의 중심적 흐름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토대를 마련한다. 주돈이의 이러한 공로는 후대의 유학자들로부터 높이 평가되었고 마침내 도학의 비조로서 자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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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순회보> 213호

 

■참고문헌 

『주돈이집(周敦頤集)』 「태극도설(太極圖說)」
『동몽선습(童蒙先習)』
『송사(宋史)』 「도학전(道學傳)」
구스모토 마사쓰구, 『송명유학사상사』, 김병화·이혜경 옮김, 서울: 예문서원, 2005.
중국철학회, 『역사 속의 중국철학』, 서울: 상지사, 1999.
종청한, 『50인으로 읽는 중국사상』, 서울: 무우수, 2007.
조현규, 『동양윤리사상의 이해』, 서울: 새문사, 2002.
진래, 『송명성리학』, 안재호 옮김, 서울: 예문서원, 1997.
최승호, 『동양철학의 이해』, 부산: 소강, 2002.
풍우란, 『중국 철학사』, 박성규 옮김, 서울: 까치글방, 1999.
함현찬, 『성리학의 비조 주돈이』, 서울: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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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교운 2장 26절, “距今一千五百年前六朝及新羅之時 佛道中興 其後五百年距今略一千年前大宋之時濂洛諸賢一時傳道.”
02 『동몽선습(童蒙先習)』, “宋太祖 立國之初 五星聚奎 濂洛關閩 諸賢輩出 若周敦頤 程顥 程頤 司馬光 張載 邵雍 朱熹 相繼而起 以闡明斯道 爲己任.”
03 도학은 정주학(程朱學) 혹은 성리학으로도 불리며 송대에 와서 크게 일어난 유학의 새로운 학풍을 열었다. 북송의 주돈이(周敦頤)·장재(張載)·소옹(邵雍)·정호(程顥)·정이(程頤) 등 이른바 오군자(五君子)에 의해 전개되고, 남송의 주자에 의하여 집대성된 송대의 유학을 말한다.
04 진래, 『송명성리학』, 안재호 옮김 (서울: 예문서원, 1997), p.79 참고.
05 풍우란, 『중국 철학사』, 박성규 역 (서울: 까치글방, 1999), p.44 참고.
06 함현찬, 『성리학의 비조 주돈이』 (서울: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7), p.37 참고.
07 같은 책, p.39 참고.
08 같은 책, p.39 참고.
09 종청한, 『50인으로 읽는 중국사상』 (서울: 무우수, 2007), p.339 참고.
10 풍우란, 앞의책, p.441.
11 조현규, 『동양윤리사상의 이해』 (서울: 새문사, 2002), pp.227-228 참고.
12 최승호, 『동양철학의 이해』 (부산: 소강, 2002), p.172 참고.
13 종청한, 앞의책, p.339 참고.
14 진래, 앞의책, p.85 참고.
15 구스모토 마사쓰구, 『송명유학사상사』 김병화·이혜경 옮김, (서울: 예문서원, 2005), pp.78-83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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