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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전국시대 사군자(四君子): 춘신군(春申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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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04.16 조회4,7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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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말씀하시고 그의 만사를 다음과 같이 지어서 불사르셨도다. 知忠知義君事君 一魔無藏四海民 孟平春信倍名聲 先生大羽振一新” (지충지의군사군 일마무장사해민 맹평춘신배명성 선생대우진일신) ‘맹평춘신배명성(孟平春信倍名聲)’은 ‘손병희의 명성이 맹평춘신의 명성보다 배가 된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상제님께서 만사에 언급하신 ‘맹평춘신(孟平春信)’은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 ?~기원전 278),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기원전 251), 초(楚)나라의 춘신군,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기원전 243)을 말하며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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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신군(春申君, ?~기원전 238)은 전국(戰國)시대 말기 초(楚)나라 강하[江夏: 현 무한시(武漢市) 강하구(江夏求)] 사람으로 성은 황(黃)씨고, 이름은 헐(歇)이다. 그는 『전경』 예시 59절 손병희의 만사(輓詞)에 등장하는 인물로 전국시대 말기에 널리 인재를 우대하고 공경하여 명성을 떨친 전국사군자(戰國四君子)에 속한다. 그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고 『사기(史記)』와 『전국책(戰國策)』에 소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춘신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사기』와 『전국책』에는 그의 가계(家系)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다. 족보 자료 중에서 그에 대해 제일 자세히 기록된 것은 ‘호남 용읍 황씨 가보(湖南龍邑黃氏家譜)’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314년에 출생했으며, 황제헌원(黃帝軒轅)의 64세 손(孫)으로 용읍(龍邑) 황씨 직계 선조라고 한다. 그의 본적은 황국(黃國)이다.01황국은 춘추(春秋)시대 말기 현재 중국 하남성(河南城) 신양시(信陽市) 황천현(潢川縣)에 있었던 나라로 기원전 648년에 초나라에 강제로 병합되었다. 그 이후에도 계속 황읍(黃邑)으로 불리다가 후에 광주(光州)라고 일컬어졌다.02

  춘신군이 관직에 오르기 전, 초나라 회왕(懐王, ?~기원전 296)이 진(秦)나라와 친선을 맺으러 갔다가 억류되어 죽게 되는 수치를 당했다. 이에 회왕의 아들 경양왕(頃襄王, ?~기원전 263)은 당장이라도 복수하고 싶었으나 진나라가 언제 공격해올지 몰라서 전전긍긍하였다. 그래서 진나라와 먼저 친선을 맺은 후 복수할 마음을 품고 박학다식하고 언변이 좋았던 춘신군을 진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03

  춘신군이 진나라에 도착했을 때 마침 진나라 소왕(昭王)은 백기(白起) 장군04에게 명령하여 한(韓)·위(魏)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그는 서둘러 소왕을 만나 진·초나라와 같은 강한 나라가 서로 싸우게 되면 이를 지켜보는 주변의 약한 나라만 이득이 될 뿐이라고 설득하여 화친을 맺었다. 진소왕은 화친의 조건으로 초나라 태자를 인질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초나라 경양왕은 그 조건을 수락하여, 태자 완(完)을 진나라로 보냈다. 이때 춘신군은 경양왕의 명을 받고 태자와 함께 진나라로 가서 태자의 스승이자 보호자 역할을 하였다. 어느 날 경양왕의 병세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은 춘신군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태자를 먼저 탈출시켜 왕위를 계승하도록 도왔다. 이때 탈출한 태자가 바로 고열왕(考㤠王, ?~기원전 238)이다. 고열왕은 초나라로 돌아온 그를 재상(宰相)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회수(淮水)의 북쪽 땅 12현과 춘신군이라는 봉호(封號)를 하사했다. 그가 재상이 된 지 8년 되던 해에 북쪽의 노(魯)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후 초나라가 더욱 강성해지기 시작하였다.05

  춘신군이 재상이었을 당시 그에게는 3천 명의 식객(食客)이 있었다. 식객 문화는 전국시대의 한 특징으로 식객 대부분이 경제적·정치적인 면에서 소외된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학문과 뛰어난 견해를 군주가 받아들여 정책에 옮기고 자신들을 벼슬자리에 등용시켜주기를 바라는, 소위 출세 지향적인 유세객들이었다.06 같은 시기에 제나라의 맹상군, 조나라의 평원군, 위나라의 신릉군도 모두 일정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은 각지에 있는 선비들을 서로 등용하려고 경쟁하였다.07 조나라의 평원군이 초나라에 사신을 보내왔을 때 춘신군은 그들을 상등(上等)의 식객이 머무는 곳에 기거하게 하였다. 조나라 사신들은 자신들을 과시하려고 하였으나 춘신군의 상등 식객들이 모두 구슬로 장식된 신발을 신는 등 자신들보다 더 대우를 잘 받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며 돌아갔다.08

  춘신군의 식객 중에는 맹자(孟子)와 쌍벽을 이루며 성악설(性惡說)로 유명한 유가(儒家)의 대학자 순자(荀子, 기원전 298~238)도 있었다. 순자는 제나라에서 민왕(湣王), 양왕(襄王), 건(建) 등 세 왕이 재위했을 때 직하학궁(稷下學宮)의 좨주(祭酒)를 맡았었다. 좨주는 학궁의 최고 책임자를 말한다. 그러나 그는 간신들의 농간 때문에 제나라를 떠나 춘신군의 식객이 되었다.09 『자치통감』에는 진나라 소왕 52년(기원전 255)에 춘신군이 순자를 난릉(蘭陵)10 의 현령(縣令)에 임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1 하지만 순자를 질투한 식객이 그를 모함하자 춘신군은 이를 곧이곧대로 듣고 순자와 절교하였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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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식객이 “현자가 머무는 곳이면 군주가 존귀해지지 않은 곳이 없고 나라가 번영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므로 조나라로 떠난 순자를 다시 데리고 와야 합니다.”라고 하여 춘신군은 순자를 다시 찾았다. 하지만 순자는 ‘여인련왕(癘人憐王)’13을 언급하며 인재를 몰라본 춘신군을 풍자하는 시를 보내 거절하였다. 춘신군이 지난 일을 후회하며 거듭 설득하자 순자는 이에 응하여 초나라로 와서 난릉의 수령(守令) 지위에 올랐다.14

  춘신군이 재상이 된 지 22년째 되던 해에 각 제후국들은 진나라의 공격이 두려워 서로 연합해서 서쪽의 진나라를 먼저 공격하기로 하였다. 고열왕이 연합군의 맹주가 되고 춘신군이 모든 일을 처리하였으나 춘신군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을 쳐서 결국 실패하였다. 이 일로 해서 고열왕과 춘신군의 사이가 멀어졌다. 그 후 춘신군은 자신의 식객인 주영(朱英)의 건의대로 고열왕을 설득하여 진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옛 오(吳)나라 수춘(壽春)으로 도읍을 옮겼다. 춘신군도 이곳에 머물며 재상의 일을 보았다.15

  한편, 고열왕은 안타깝게도 자식을 낳지 못했다. 춘신군이 이를 걱정하여 아이를 가질 만한 여인을 수없이 구하여 왕에게 보냈다. 왕의 여인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나라의 이원(李園)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누이 언언(嫣嫣)을 고열왕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왕이 자식을 못 낳는다는 소문을 뒤늦게 들은 이원은 누이가 이대로 후궁이 된다면 다른 후궁들과 마찬가지로 왕의 총애를 못 받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계획적으로 춘신군의 식객이 되어 춘신군이 누이를 첩으로 맞이하게 했다.16

  몇 개월 후 춘신군의 총애를 받은 누이가 임신하자 이원은 계략을 써서 춘신군을 설득한 후 임신한 누이를 고열왕에게 보내도록 청하였다. 이원의 누이가 고열왕에게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고 훗날 그 아이가 왕이 되면 그의 친부인 춘신군의 권세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득한 것이다. 이원의 계략대로 고열왕의 후궁이 된 언언은 사내아이 쌍둥이를 낳은 후 왕후가 되었고, 쌍둥이 중에 장남은 태자가 되었다.17 그리고 이원은 고열왕에게 중용되어 국정에 참여하며 권력을 키웠다. 춘신군이 초나라 재상이 된 지 25년째 되던 해, 고열왕이 병에 걸렸다. 권력을 얻은 이원은 춘신군이 태자에 대한 기밀을 누설할까 걱정되어 암암리에 자객을 길러 춘신군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18

  춘신군의 식객인 주영이 이원의 계략을 눈치챘다. 주영은 춘신군에게 “세상에는 바라지도 않은 행운과 불행이 올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이러한 세상에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왕을 섬기고 계시니 화를 막아줄 인재를 구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여기서 ‘행운’은 춘신군이 어린 왕을 보좌하여 국정을 도맡을 수 있다는 것이고, ‘불행’은 이원이 춘신군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뜻밖의 인재’는 춘신군을 대신하여 이원을 죽일 주영을 의미한다. 그러나 춘신군은 이원이 자신을 죽일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후 17일 만에 고열왕이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이원은 자객을 보내 입궁하려던 춘신군을 죽이고 그의 일가도 몰살했다. 『사기』와 『전국책』에 서술된 춘신군의 생애는 여기까지이다. 춘신군 사후에 그의 아들인 유왕(幽王, ?~기원전 228)이 왕위에 올랐으나 그 덕을 보려던 춘신군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였다.19

  춘신군은 초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진나라 소왕을 설득시켜서 진나라의 침략을 막았고 진나라에 태자가 인질로 잡혀 있을 때 목숨을 걸고 구하였다. 또한 재상이 된 후에는 노나라를 멸망시키고 초나라를 강국으로 만드는 등 큰 공을 세웠다. 그는 한때 3천 명이 넘는 식객을 받아들여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당시 유가의 대학자인 순자도 춘신군의 식객이었다. 그리고 춘신군의 상등 식객을 위한 그의 대우가 평원군의 사신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극진했다는 것은 그의 명성과 인품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이원이란 간신에 의해 왕을 배신하고 자신의 자식이 왕이 되게 하는 큰 오점을 남겼다. 그는 이러한 과오 때문에  후세에 전국사군자 중에서 가장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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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사기(史記)』

렁청진, 『역사를 읽으니 시대의 길이 보이네』, 이해원 옮김, 파주: 한길사, 2006.

사마광, 『자치통감 1』, 권중달 옮김, 서울: 삼화, 2007.

사마천, 『사기열전(史記列傳) 上』, 정범진 외 옮김, 서울: 까치, 2003.

신동준, 『제자백가, 세상을 논하다』, 파주: 한길사, 2007. 

유향, 『전국책(戰國策) 2』 , 임동석 역, 서울: 동서문화사, 2009.

윤무학, 『순자』, 서울: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4. 

장자화, 『장자화의 사기 3』, 전수정 옮김, 파주: 사계절출판사, 2018.

조면희, 『전국시대 이야기 下』, 서울: 현암사, 2007. 

조성기, 『새롭게 읽는 전국책』, 서울: 동아일보사, 2004.

천쭈화이, 『중국을 말한다 4』 , 남희풍ㆍ박기병 옮김, 서울: 신원문화사, 2008.

민중서림 편집국, 『엣센스 국어사전』, 파주: 민중서림, 2008.

바이두백과[百度百科], 2018. 11. 14, https://baike.baidu.com/.

호남 용읍 황씨 가보(湖南龍邑黃氏家譜), 2018. 11. 13, http://www.longyih.com/showarticle.asp?id=463.

 

 

 

01 호남 용읍 황씨 가보(湖南龍邑黃氏家譜), ‘춘신군(春信君)’, 2018. 11. 13, http://www.longyih.com/showarticle.asp?id=463 참고.

02 바이두백과[百度百科], ‘황국(黃囯)’, 2018. 11. 14, https://baike.baidu.com 참고.

03 유향, 『전국책(戰國策) 2』, 임동석 역 (서울: 동서문화사, 2009), pp.690-699 참고.

04 진나라의 명장(名將)으로 훗날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05 사마천, 『사기열전(史記列傳) 上』, 정범진 외 옮김 (서울: 까치, 2003), pp.255-263 참고; 조성기, 『새롭게 읽는 전국책』 (서울: 동아일보사, 2004), pp.571-582 참고.

06 조성기, 앞의 책, p.642 참고.

07 같은 책, pp.582-583 참고.

08 사마천, 앞의 책, p.263 참고.

09 천쭈화이, 『중국을 말한다 4』, 남희풍ㆍ박기병 옮김 (서울: 신원문화사, 2008), p.170 참고. 

10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창산현(蒼山縣) 서남쪽이다.

11 사마광, 『자치통감 1』, 권중달 옮김 (서울: 삼화, 2007), p.308 참고.

12 유향, 앞의 책, p.749 참고.

13 문둥병자가 간신에게 죽임을 당하는 왕을 자신보다 더 불쌍하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14 신동준, 같은 책, p.314-319 참고; 윤무학, 『순자』, (서울: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4), p.49 참고; 유향, 같은 책, pp.749-751 참고. 

15 사마천, 앞의 책, pp.263-264 참고; 조면희, 『전국시대 이야기 下』 (서울: 현암사, 2007), pp.434-437 참고. 

16 사마천, 앞의 책, pp.264-265 참고.

17  렁청진, 『역사를 읽으니 시대의 길이 보이네』 이해원 옮김, (파주: 한길사, 2006), p.177 참고.

18 사마천, 앞의 책, pp.264-266 참고.

19 같은 책, pp.266-267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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