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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신명우수(雨水) 절후를 관장하는 방현령(房玄齡)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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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1.21 조회4,1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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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현령(房玄齡)

 

 


  방현령(房玄齡, 579~648)의 자(字)는 교(喬)이고 제주(齊州) 임치(臨淄) 사람이다. 아버지 방언겸(房彦謙)은 수(隋)나라 때 사예자사(司隸刺史)를 지냈다. 현령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옛 성현들의 글을 읽었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능했다.


  개황[開皇, 수(隋) 문제(文帝)의 연호, 581~604] 연간에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589) 사람들은 수나라가 오래 존속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방현령은 아버지 방언겸에게 말하길 “지금 임금은 아무 공덕도 없이 주(周)황실과 가깝다는 이유로 살생을 함부로 하고 제왕(帝王)의 지위를 빼앗았으니 이는 후대 자손들을 위한 장구한 계책이 못됩니다. 더구나 적자(嫡子)와 서자(庶子)의 구분이 모호하니 이들이 서로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사치하며 행동에 분별이 없습니다. 또한 서로를 원망하고 다투고 있으니 마침내 상대방을 죽여 씨를 말리려 들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평안한 것 같이 보여도 머지않아 망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방현령의 발언은 10대의 소년이 한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렇게 수(隋) 왕조를 부정하는 발언은 그 자체로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 방언겸은 깜짝 놀라며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다.


  방현령의 나이 18세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우기위(羽騎尉)가 되고 비서성(秘書省)에서 일하기도 했다. 당시 이부시랑(吏部侍郞)인 고효기(高孝基)는 사람을 잘 알아본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배구(裵矩)에게 말하길 “제가 이제까지 많은 사람을 봤습니다만 방현령과 같은 인물은 없었습니다. 반드시 나라의 큰 그릇이 될 인물입니다. 제가 그의 우뚝 솟은 모습을 보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방현령은 수나라 말기의 혼란상을 목격하고 천하를 근심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때 그의 아버지 방언겸이 병으로 아팠는데 간병하느라 백일 동안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부친상을 당하니 닷새 동안은 물조차 마시지 않고 애도(哀悼)했다. 


  방현령이 당 태종 이세민과 인연을 맺은 시기는 이세민이 아직 즉위하기 전으로 그가 돈황공(燉煌公)이 되어 위북(渭北)을 순수(巡狩)하던 때였다. 이때 방현령은 이세민의 군문(軍門)에 책략을 올려 그를 만나게 되었다. 이세민이 방현령을 한 번 보고는 오랜 친구처럼 여겨 그를 위북도(渭北道) 행군기실(行軍記室) 참군(參軍)으로 삼았다. 이세민이 진왕(秦王)이 된 후 방현령은 막부(幕府)의 기실(記室)로 진급하고 임치후(臨淄侯)로 봉(封)해졌다.


  방현령은 이세민이 전장에 나설 때마다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진기한 전리품(戰利品)을 다툴 때 방현령은 뛰어난 인물을 막부(幕府)로 초대하고 여러 장수들과는 계속하여 결속(結束)을 다졌다. 그리고 이렇게 결속을 다진 사람들은 목숨을 바쳐 방현령을 따르고자 했다. 이세민이 말하기를 “동한(東漢)의 광무제(光武帝)가 등우(鄧禹)를 얻고서 광무제 휘하의 사람들이 더욱 화목해졌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나에게 현령이 있으니 등우와 같다.”고 했다. 이세민의 막부(幕府)에서 10년을 지냈는데 군대의 문서나 격문과 같은 문서에 관계된 일이나 그 외 군대의 사무를 방현령이 맡으면 완벽해졌다.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방현령에 대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재기가 있어 일을 맡길 만하다. 매번 나의 아들을 위해 말하는데 그 말을 들어보면 나의 아들이 천리 밖에 있어도 마치 얼굴을 대하고 이야기하는 듯하다.”고 했다.


  방현령은 이세민이 즉위하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세민은 당나라 성립에 공이 컸고 출전할 때마다 승리를 거둬 그의 명망은 높아만 갔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세민의 부상은 다음 차기 대권의 향방을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이미 첫째 건성이 황태자로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세민이 부각되면서 필연적으로 황태자 건성과의 갈등구조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세민은 중요한 일은 방현령과 두여회를 불러 의논했다. 이 두 사람은 진왕부(秦王府)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핵심적인 인물들이었다. 방현령은 두여회보다 연상이었으나 두여회를 존중했다. 방현령은 두여회를 가까이에 둘 것을 이세민에게 추천했고 큰 일이 있으면 그와 같이 의논해 처리했다. 방현령은 거듭 승진하여 섬동도대행대고공낭중(陝東道大行臺考功郞中)에 문학관(文學館) 학사(學士)를 겸했다.


  이런 까닭으로 태자 건성은 어떻게 하든 방현령과 두여회를 이세민과 떼어 놓고자 고조 이연에게 이들을 참소하였다. 결국 방현령과 두여회는 진왕부에서 축출(逐出)되었다. 이때는 태자 건성과 진왕 이세민의 갈등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던 시기로 태자는 이세민 일파의 제거를 위해 일을 꾸미고 있었다. 방현령과 두여회를 축출한 것도 이세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세민과 태자 건성은 서로가 상대방의 세력을 견제하면서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관계에서 골육상쟁(骨肉相爭)은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정치적 부담이 만만찮은 일이었으므로 이세민은 주저했다. 방현령을 비롯한 이세민의 참모들은 빠른 결단과 신속한 대응을 요구하였지만 이세민으로선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는 급변했다. 무덕(武德) 9년(626) 고조는 제왕(齊王) 원길에게 돌궐을 칠 것을 명하게 된다. 태자 건성이 이 군대의 환송연에서 이세민을 죽일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 살해 음모가 이세민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세민은 방현령과 두여회를 불렀는데 두 사람은 방사(方士)01 차림을 하고 진왕부에 들어왔다. 이후 이들을 비롯한 이세민의 참모들은 현무문(玄武門)의 정변(政變)을 통해 태자 건성 일파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02


  진왕 이세민이 태자 건성을 제거하고 황태자가 되자 방현령은 동궁부(東宮府)의 우서자(右庶子)에 발탁되었다. 그리고 이세민이 즉위하자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는데 방현령은 두여회[杜如晦, 대한(大寒) 절후를 관장], 장손무기[長孫無忌, 동지(冬至) 절후를 관장], 울지경덕[蔚遲敬德, 춘분(春分) 절후를 관장], 후군집[侯君集, 처서(處暑) 절후를 관장]과 같은 일등공신으로 한국공(國公)에 봉작(封爵)되고 식읍(食邑) 1,300호(戶)가 주어졌다.


  태종이 신하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짐이 그대들의 공로에 등급 매겨 직위와 식읍을 내리는데 혹 잘못된 점이 있지 않을까 염려되니, 어그러짐이 있으면 짐을 위해 말해 주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회안왕(淮安王) 이신통(李神通)이 말하기를 “천하가 혼란해져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시니 신(臣)의 군대가 제일 먼저 달려왔습니다. 지금 현령과 같은 이들은 문서나 뒤적거리는 관리일 뿐인데 그 공이 일등급이라 하시니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고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숙부(叔父)의 군대가 제일 먼저 달려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숙부의 군대는 힘써 싸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건덕(竇建德, 573~621)03과 싸울 때는 크게 패해 전군의 사기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유흑달(劉黑, ?~623)04의 반란을 토벌할 때에는 바람 부는 것만 보고도 놀라서 달아났습니다. 지금 현령 같은 이들은 장막 안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사직(社稷)에 공을 세웠습니다. 비유하자면 한(漢)나라 창업(創業)에 있어서 소하(蕭何)의 공이 전장에서 직접 싸운 장군들보다 앞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숙부와 공신들의 서열은 바꿀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애초에 장군 구사리(丘師利) 등도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자신들의 공로를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나 임금의 말과 이신통(李神通)이 이에 굴복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폐하께서 혈육의 정에도 이끌리지 아니 하시니 우리가 망령되이 하소연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방현령은 다시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로 승진하였고, 진(晉)나라05의 정사(正史)인 『진서(晉書)』를 편찬하는 데 총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위(魏)에 봉(封)해졌다. 태종이 “그대가 복야가 되었으니 마땅히 짐을 도와 이목을 넓히고 현인들을 방문토록 해주시오. 그러나 처리해야 될 안건이 하루에도 수백이니 어느 겨를에 인재를 찾겠는가?”라고 말하고는 칙명을 내려 사소한 일들은 좌우승(左右丞)이 처리하도록 하고 큰 일만 복야가 담당하도록 했다. 
 

 

01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


02 이에 관해서는 「동지절후를 관장하는 장손무기」, 『대순회보』 80호, pp.39~40 참조.


03 수(隋)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들 중의 하나로 양자강(揚子江) 이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다. 무리를 모아 618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하(夏)’라 하고 스스로 ‘하왕(夏王)’임을 선포했다. 621년 당(唐)이 이세민을 보내 낙양(洛陽)의 왕세충(王世充)을 공격하였는데, 왕세충이 두건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세충을 구원하기 위해 병사를 움직였으나 호뢰관(虎牢關)에서 당군(唐軍)에게 패하고 장안(長安)에서 참수되었다. 


04 두건덕과 같은 청하(淸河) 장남[南, 현재 산동성(山東省) 무성(武城)] 사람이다. 수나라 말기에 학효덕(孝德)을 따라 와강군(瓦崗軍)에 들어갔다. 618년 왕세충과의 싸움에서 와강군이 패하자 왕세충의 포로가 되어 군마총관(軍馬總管)에 임명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리를 이끌고 두건덕에게 가서 한동군공(漢東郡公)에 봉해졌다. 621년 두건덕이 당군에 패하자 두건덕을 따르던 무리들을 수습하여 반년만에 두건덕의 옛 영역을 회복했다. 다음해인 622년 한동왕(漢東王)을 칭했으나 이세민에 패해 돌궐로 달아났다가 623년 태자 건성이 이끄는 당군에 패해 잡혀 죽었다. 


05 후한(後漢) 말기 황건적 토벌과 동탁 타도를 위해 일어선 군벌들이 궁극적으로는 삼국[三國, 위(魏) ·오(吳)·촉(蜀)]으로 재정립되었는데 이 삼국 중 위(魏)를 계승한 사마염(司馬炎)이 세운 나라이다. 이를 서진(西晉, 265~317)이라고 하는데 사마염이 280년 오(吳)를 병합함으로써 다시금 중국을 통일하였지만 290년 그가 죽은 후 후임 황제들이 무능하여 황족들 간의 내란이 일어났다. 이 내란은 북방의 이민족(異民族)의 침입을 불러왔고 이로 인해 서진이 중원을 상실하고 지금의 남경(南京)에 도읍하게 되는 데 이를 동진(東晉, 317~420)이라고 한다. 589년 수(隋)가 남조(南朝)인 진(陳)을 멸망시켜 재통일하기까지 계속되는 중국 역사상 대혼란기를 촉발시킨 나라이다. 

 
  
 
<대순회보 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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