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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필(畢) 별을 관장하는 경단(景丹) 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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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4.14 조회5,0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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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畢宿)

 

필수는 28수 가운데 열아홉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규루위모필자삼(奎婁胃昴畢觜參) 서방(西方) 백호(白虎) 칠수(七宿) 가운데서 다섯 번째 별자리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8개로 상징 동물은 까마귀이다. 필수의 속성(屬性)은 월(月)이며 또 다른 이름은 ‘한차(罕車)’로 ‘변경(邊境)의 군대’를 뜻한다. 또한 필(畢)에는 ‘완전’의 뜻도 있다.

 

필수를 의인화하여 서방필월조성군(西方畢月鳥星君)이라 하는데 입이 닭의 주둥이 같고 황금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있으며 손에는 장창(長槍)을 들고 있다고 한다.01

 

 

 

후한의 창업공신 경단

 

경단(景丹, ?-26)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그의 자(字)는 손경(孫卿)으로 풍익군(馮翊郡) 역양현(櫟陽縣, 현재 陝西省 臨東 북쪽) 사람이다. 경단은 어려서 장안에서 공부했다.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新)나라 건국한 왕망(王莽, BCE 45-CE 23)02은 관리 등용에 4가지 기준을 적용했다. 그 기준은 유덕행(有德行), 능언어(能言語), 통정사(通政事), 명문학(明文學)으로 덕행이 뛰어나거나, 언어에 능숙하거나, 정사에 능통하거나, 문학에 밝은 선비를 관리로 발탁한 것이다. 경단은 언어에 능숙하여 고덕후(固德侯)를 보좌하게 되었는데 유능한 간사라고 일컬어졌다. 후에 삭조(朔調) 연솔(連率)03의 부이(副貳: 보좌관)로 옮겨갔다.

 

경시제(更始帝)04가 서자, 각 지역에 사자를 파견해서 상곡군(上谷郡)을 순행하게 하였는데 경단은 연솔인 경황(耿況)과 함께 항복하여 다시 상곡군의 장사(長史)가 되었다. 이때 유수는 경시제로부터 하북 평정의 명령을 받고 하북에 파견되었다. 그런데 유수가 하북을 평정해 가는 과정에서 왕랑이라는 강력한 장애물이 나타났다. 왕랑이 급속하게 세력을 확대하며 유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유수는 왕랑에 의해 쫓기는 신세로 전락했다.05

 

한편 경단은 경황과 함께 상의하여 왕랑에게 항거하였다. 경황은 경단과 자신의 아들인 경감(耿弇), 구순(寇恂)에게 병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가서 유수에게 귀의하게 하였다. 이때 유수는 광아(廣阿)에 있었는데 대병(大兵)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성(城)에 올라 그들과 만났다. 유수가 물었다.

 

“어디서 온 병사들인가?”

경단이 대답했다.

“상곡, 어양(漁陽, 북경시 密雲縣)의 병사들입니다.”

유수가 다시 물었다.

“누구를 위해 왔는가?”

경단이 다시 대답했다.

“유공(劉公, 유수)을 위해 왔습니다.”

유수는 경단과 경감, 구순을 인견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한단(邯鄲)의 장수(왕랑)가 여러 번 나에게 어양, 상곡의 병사를 징발할 것이라고 했소. 나 또한 말하기를 ‘나도 역시 그들을 발동하겠다’고 하였지만 어찌 두 군(郡)의 병사들이 나를 위해 올 줄 알았으리요! 이제 여러 사대부(士大夫)와 함께 공명(功名)을 함께 할 따름이오.”

 

유수는 경단을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봉의후(奉義侯)로 봉했다. 후한 건국의 과정에서 최대 위기를 맞고 있던 유수에게 상곡과 어양 병력의 향배는 이른바 천하의 대세를 결정짓는 일이었다. 처음 대병이 당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왕랑이 파견한 병력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기 때문에 유수가 부하들은 단속하고 스스로 성루에 올라 어디서 온 병사들이며, 누구를 위해 왔느냐고 물은 것이다.

 

경단은 유수를 수행하여 왕랑의 장수 아굉(兒宏)을 남련(南䜌, 하북성 평양현 동쪽)에서 공격하였다. 처음에 왕랑군과 접전한 유수군은 퇴각하였다. 경단이 돌격 기병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대파하고 십여 리를 쫓으니 길거리에는 죽고 다친 적병이 널렸었다. 경단이 돌아오자 유수가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듣기로 돌격 기병대가 천하의 정예 부대라 하더니 지금에야 그들이 전투하는 것을 보니 즐겨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아니한가.”

 

그 뒤 경단은 유수를 도와 마침내 하북을 평정하였다. 하북을 평정하여 기반을 확립한 유수가 25년 호현(鄗縣, 하북성 栢鄕縣)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한의 부흥을 선언하니 그가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이다.

 

광무제가 즉위한 후 참문(讖文)을 보고 평적(平狄)장군 손함(孫咸)을 대사마에 임명하려고 했다.06 대사마는 군대의 일을 총괄하는 지위로 대혼란의 수습에 국가의 존립 여부가 달려 있었던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관직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광무제를 제외한 모든 신하들은 손함이 대사마가 되는 것에 반대했다. 광무제가 조서를 내려 대사마가 될 만한 사람을 추천하라고 하니 여러 신하들이 경단과 오한(吳漢)을 천거하였다. 광무제가 결단하며 말했다.

 

“경단장군은 북주(北州)의 대장으로 적임자이다. 그러나 오한장군은 큰 계책을 세운 공적이 있고 묘증(苗曾)과 사궁(謝躬, ?-25)07을 주살하였으니 그 공이 대단히 크다. 옛날 법제에는 표기장군은 관위가 대사마와 동등하다고 하였다.”

 

광무제의 말에는 조금의 설명이 필요하다. 유수가 왕랑을 제거하여 하북을 평정하고 세력을 확대해 가자, 경시제는 유수에게 소왕(素王)이란 직책을 내리고 자신의 행재소로 소환을 통보했다. 유수가 평정한 하북에는 자신의 휘하 장수인 묘증(苗曾), 위순(韋順), 채충(蔡充)을 각각 유주목(幽州牧: 하북성 북부), 상곡태수, 어양태수에 임명하여 감독하도록 하였다. 유수는 ‘아직 소임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말로 경시제의 소환에 불응하고 그가 파견한 관료들을 오한이 처단하면서 독자 세력화의 길에 나서게 된다. 공로로 보면 경단과 오한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이런 이유로 광무제는 오한을 대사마로 삼고 경단을 오한과 같은 반열인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에 임명하였다.

 

26(건무 2)년 광무제는 경단을 역양후(櫟陽侯)에 봉하면서 말했다.

 

“지금 관동(關東)은 옛 왕국으로 비록 몇 개의 현이 있지만 역양은 만호(萬戶)의 읍이 된다. 무릇 ‘부귀해지고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 옷을 입고 밤에 다니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경에게 역양을 봉해준 것이다.”

 

경단은 광무제에 배려에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 해 가을, 경단은 대사마 오한, 건위(建威)대장군 경감, 건의(建義)대장군 주우(朱祐), 집금오(執金吾) 가복(賈復), 편장군 풍이(馮異), 강노(强弩)장군 진준(陳俊), 좌조(左曹) 왕상(王常), 기도위(騎都尉) 장궁(臧宮)과 함께 광무제를 수행하여 오교(五校)를 의양(羛陽)에서 격파하여 5만의 항복을 받았다. 그때 섬(陝)의 도적 소황(蘇況)이 홍농(弘農, 하남성 靈寶縣)을 공격하여 그곳의 군수를 생포한 사태가 일어났다.

 

이때 경단은 광무제를 수행하여 회(懷, 하남성 武陟縣 남서쪽)에 있었는데 마침 학질(虐疾)을 앓고 있었다. 그가 황제 앞에서 학질로 떨고 있으니 광무제는 무척 안쓰럽게 생각하며 말했다.

 

“장사(壯士)에게는 학질이 덤비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이제 한(漢)의 대장군이 도리어 병으로 고생하는구려.”

 

광무제는 신하들에게 그를 부축하도록 하고 의약을 하사하며 낙양(洛陽)으로 돌아가 병을 돌보도록 했지만 그의 병은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광무제는 옛 장수들이 홍농 땅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해주길 기대했고 적임자는 경단이라고 생각했다. 광무제는 경단이 비록 병이 있지만 억지로라도 홍농 평정을 맡기려 하였다. 광무제가 밤에 경단을 불러들여 말했다.

 

“적들이 경사(京師, 서울)에 가까이 접근해 오고 있으나 장군의 위중(威重)함으로 경이 누워만 있어도 그들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오.”

 

경단이 광무제의 간곡한 요청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홍농군에 이르렀는데 도착한지 10여 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경단의 임무는 정로(征虜)장군 좨준(祭遵)이 맡아서 모두 평정하였고, 아들 경상(景尙)이 뒤를 이었다.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37.

02 자(字)는 거군(巨君). 위군(魏郡) 원성(元城, 현재 하북성 大名 東) 사람. 전한 말기의 대표적인 외척으로 전한을 타도하고 신(新, 8-23)을 세웠다. 왕망은 대표적인 외척 가문으로 성제(成帝, BCE 32-7) 때 대사마에 발탁되었고 애제(哀帝, BCE 6-1)가 죽자 고모인 태황태후 왕정군의 지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자신이 옹립한 평제(平帝, BCE 1-CE 5)를 독살시키고 마침내는 전한을 타도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나타내기 위해 부명(符命)을 조작하였다. CE 7년 황제가 된 후, 유교 경전에 의거한 개혁정책과 한나라와 다른 화폐, 관료 제도를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그러나 현실과 맞지 않은 개혁정책과 빈번한 제도 변경으로 국정의 혼선과 오류가 중첩되었고, 기근(饑饉)이 겹치면서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다. 23년 왕망은 이러한 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믿었던 권력 핵심부마저 해체되면서 장안을 침공한 반군에게 살해됐는데 이때 나이가 68세였다.

03 삭조는 상곡(上谷, 하북성 懷來縣)을 연솔(連率)은 태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왕망이 고쳐 불렀다.

04 자(字)는 성공(聖公). 왕망 말년에 법을 어겨 평림(平林)으로 망명하였다가 22년 평림을 기반으로 한 반란이 일어나자 평림군(平林軍)에 투항했고 23년 호(號)를 경시장군(更始將軍)이라 했다. 이때 평림군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는데 유수의 형인 유연(劉縯)의 위세와 명망을 시기하여 그를 죽였다.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는 민심을 업고 왕망을 몰아내고 장안을 차지하였으나 잘못된 정치로 반란이 빈발했다. 왕망 말기에 일어났던 반란세력이 가장 세력이 컸던 적미(赤眉)가 장안을 함락시킨 이후 처음에는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졌으나 후에 사록(謝祿)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05 왕랑의 봉기와 관련한 사항은 다음을 참조. 「벽(壁) 별을 관장하는 왕패(王霸) 신명」, 『대순회보』 173호, 65-68쪽.

06 참문(讖文)은 참기(讖記)라고도 하는데 미래를 예언한 기록이다. 한나라 때 특히 유행했으며, 유수의 경우에는 그가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고 그가 실제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이를 신뢰했다. 유수가 본 참문(讖文)에 ‘孫咸征狄(손함이 오랑캐를 평정할 것이다)’는 구절이 있어서 그를 대사마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07 자(字)는 자장(子張)으로 남양(南陽)사람. 왕망의 신나라 말년에 유현에 투항하여 그가 경시제가 되자, 상서령에 임명되었다. 유수가 하북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마무(馬武)와 함께 왕랑을 공격했고 일찍이 같이 우래(尤來)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본래 경시제의 사람이어서 유수와는 갈등 관계였다. 유수는 그를 제거하고자 했고 오한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대순회보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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