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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신명망종(芒種) 절후를 관장하는 굴돌통(屈突通)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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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4.26 조회4,8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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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건 충언(忠言)으로 1,500명을 구한 굴돌통

 

굴돌통(屈突通, 556~628)01은 장안(長安)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굴돌장경(屈突長卿)은 북주(北周, 557~580)02에서 공주자사(州刺史)를 지냈다. 굴돌통은 강직하여 다른 사람에게 꺾이지 않는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충성과 성실을 숭상했고 아울러 자기 자신을 맑고 바르게 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또한 무략(武略)에 뛰어났으며 말 타고 활쏘기를 잘했다.

 

수(隋)나라에서 벼슬하여 개황[開皇, 수문제(隋文帝)의 연호로 581~600] 연간(年間)에 친위대도독(親衛大都督)에 임명되었다. 이때 문제(文帝)는 굴돌통에게 명하여 농서[西, 현재 감숙성(甘肅省)]의 목축장부(牧畜帳簿)를 조사케 했다. 굴돌통이 이 지역의 목축 장부를 조사하여 관리들이 숨겨놓은 2만 필(匹)의 말을 찾아내었다.

 

이 비리사건을 보고받은 문제는 분노했다. 문제 양견(楊堅, 541~604)03은 중국의 역대 황제들 중에서도 드물게 근검절약이 몸에 밴 인물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색하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였던 문제에게 이와 같은 비리는 관용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문제(文帝)는 태복경(太僕卿)04 모용실달(慕容悉達)과 이 비리에 연루된 감독관 1,500명 전원을 구속하고 이들 모두를 죽이려 했다.

 

분노로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던 문제에게 굴돌통이 말했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귀중하며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지극한 인자함으로 사해(四海)의 모든 백성들을 기르시는데 어찌 축산(畜産)의 일로 하루에 1,500명을 죽이려 하십니까.”

 

분노한 문제가 눈을 부라리며 굴돌통을 크게 꾸짖었다. 굴돌통이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말했다.

 

“신이 죽어 여러 사람들이 죽음을 면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굴돌통의 지극한 간언에 문제는 마침내 화를 풀고 말했다.

 

“짐이 밝지 못해서 여기에 이르렀노라. 경의 충간(忠諫)에 의지할 뿐이니 마땅히 실달 등에게 죽음을 면하게 하여 경의 도리에 맞는 말을 표양(表揚)케 하리라.”

 

모용실달과 감독관 1,500명은 죽음을 면하게 되었고 굴돌통은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에 발탁되었다. 일이 좋게 해결되었지만 굴돌통에게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게다가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사안에도 문제의 분노를 사 죽음에 이른 관료 또한 적지 않았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는데 굴돌통은 자신의 목숨을 건 한마디로 1,500명을 살린 것이다.

 

굴돌통은 엄정한 관리였다. 가까운 사람이나 친척이라고 해도 법을 어기면 지체없이 법에 따라 처리했다. 그리고 장안령(長安令)이었던 그의 동생 굴돌개(屈突蓋)도 또한 엄정한 법 집행으로 이름나 있었다. 이에 굴돌통 형제를 두고 당시 시중에는 이런 말이 떠돌고 있었다고 한다.

 

“비록 피죽을 먹을지라도 굴돌통, 굴돌개를 만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 말은 아무리 가난하게 살지라도 부정한 재물을 취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부정한 재물을 취하게 된 것이 굴돌통 형제에게 적발되면 절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 치하의 수나라는 중국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전성기였다. 수나라 성립 이전의 중국사를 잠시 살펴보자. 후한(後漢, 25~220) 말기의 혼란이 일시 진(晉, 265~419)에 의해서 통일된다(280년). 그러나 진 왕조 내부의 권력 투쟁이 발생되고 이를 계기로 주변 제 민족들의 중원 진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진이 중원을 잃고 지금의 남경(南京)에 도읍을 하게 되는데 이를 동진(東晉)이라 한다. 이때부터 남쪽에는 동진 이후의 왕조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고 북쪽에는 중원으로 진출한 변방 민족들의 왕조가 교체되었다. 후한이 망한 이후부터 남조(南朝)와 북조(北朝)로 갈라지게 된 이 혼란기를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라고 한다. 이 혼란은 589년 수(隋)가 남조(南朝)인 진(陳)을 멸망시켜 재통일하기까지 약 300년간 지속되었다.

 

문제는 중국을 재통일하고 내정 안정에 주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문제의 후임자 양제는 통일된 제국과 막대한 재화로 가득 찬 국고(國庫)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양제는 2세 황제들 중 가장 나쁜 선례를 남기면서 수나라를 망국으로 몰고 갔다. 양제는 자신이 천자라는 지나친 자부심이 있었고 이는 천하순행(天下巡行)이라는 형태로 표출된다. 이 연장선에서 양제는 고구려에 입조(入朝)를 요구하였다. 양제의 ‘고구려 입조’에 대한 집착은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수나라 멸망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

 

고구려 원정은 그때마다 실패로 귀결되었지만 양제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끝까지 고구려 원정에 국력을 결집하였다. 결국 수나라를 지탱하고 있던 관료와 군대에서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게 되었다.

 

관료집단 최초의 반란은 예부상서(禮部尙書) 양현감(楊玄感)에 의한 것이었다. 613년[대업(大業) 9] 양제는 2차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면서 원정군의 물자보급에 관한 책임을 양현감에게 일임한다. 그런데 이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양현감은 양제의 즉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양소(楊素)의 아들로 수나라 권력의 최상층부를 형성하고 있던 중요 인물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양제는 바로 원정을 중단하고 군대를 돌렸고 우문술(宇文述)과 굴돌통으로 하여금 이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하였다. 아직은 수나라에 충성하는 관료들과 장수들의 활약으로 양현감의 반란은 2달여 만에 진압되었다. 반란 진압의 공로로 굴돌통은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에 임명되었다. 양현감의 반란이 진압되기는 했지만 이는 전국적인 반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제 수나라에 대한 반란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614년[대업(大業) 10] 5월에 안정(安定) 사람 유가론(劉迦論)이 반란을 일으켜 조음(雕陰)을 점령하였다. 유가론은 스스로를 황왕(皇王)이라 칭하고 세력을 규합하니 그 무리가 10만에 이르렀다. 양제는 굴돌통을 관내토포대사(關內討捕大使)에 임명하고 반란의 진압을 명하였다.

 

굴돌통은 관중(關中)의 병사들을 동원하였다. 안정현에 간 굴돌통은 처음에는 싸움을 회피했다. 굴돌통이 계속해서 싸움을 회피하자 적은 물론이거니와 굴돌통의 군사들도 그가 유가론에게 겁을 먹고 싸우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급기야 굴돌통은 회군(回軍)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는 굴돌통의 노련한 전술이었다. 굴돌통은 회군한다면서 군대를 이동했는데 이를 통해 적군의 방심을 유도한 것이었다.

 

굴돌통의 군대는 우회하여 적의 근거지인 상군(上郡)으로 진격했고 적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게다가 유가론은 관군이 겁에 질려 회군했다고 생각했고 군사들을 풀어 주변 지역을 노략질하는 데 치중하였으므로 본진의 수비는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정찰병들로부터 유가론의 본진의 상황을 보고받은 굴돌통은 야습(夜襲)을 준비했다. 굴돌통은 선발된 정예병을 이끌고 유가론의 본진에 야습을 감행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유가론을 비롯하여 많은 적들을 베고 상군(上郡) 남산(南山)에 경관(京觀)05을 만들었다. 또 남녀 수만을 포로로 잡아 장안으로 귀환했다.

 

굴돌통의 승리와는 관계없이 수나라는 더욱 어지러워졌다. 양제는 전국적인 반란에 대해서 거의 손을 놓고 있었고 정확한 보고를 하는 신하들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던 양제는 이 상황에서도 고구려 정벌에 대한 야망을 꺾지 않았다. 정국이 더욱 어지러워지고 곳곳에서 도적이 횡행하면서 병사들은 싸울 투지를 잃었고 장수들은 반란의 물결에 합류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01 굴돌(屈突)이 성(姓)이다.

02 북조(北朝)의 하나. 선비족(鮮卑族) 우문각(宇文覺)이 서위(西魏)를 멸하고 세운 나라. 후주(後周)라고도 함. 도읍은 장안. 5주(主) 24년 만에 수(隋)나라에 망하였음.

03 수(隋)나라의 초대 황제[재위(在位) 581~604]. 북주(北周) 대사공(大司空) 수국공(隋國公) 양충(楊忠)의 아들로 그 부친의 관작(官爵)을 세습했다. 북주 선제(宣帝)가 즉위하자 그의 딸이 황후가 되었고 이로 인해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580년 선제가 젊은 나이에 죽고 7세인 정제(靜帝)가 즉위하자 보정(輔政)이 되어 전권을 행사하였다. 581년 정제의 선양(禪讓)을 받아 북주를 대신하여 수(隋)를 세우고 연호를 개황(開皇)으로 바꾸었다. 재위 24년 동안 혹형(酷刑)의 폐지, 부세(賦稅) 경감, 과거제 실시를 통해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589년 남조(南朝) 진(陳)을 멸하여 중국을 재통일했다. 말년에 와병(臥病) 중 죽었는데 일설(一說)에는 태자 양광[楊廣, 문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양제(煬帝)]에 의해 살해되었다고도 한다.

04 태복(太僕). 왕명(王命)의 출납(出納)과 제왕의 의복, 궁중의 수레와 말 그리고 목축(牧畜)의 일을 맡아 보던 벼슬. 진한(秦漢) 이후 청대(淸代)까지 존속되었음.

05 큰 구경거리라는 뜻으로 전공(戰功)을 보이기 위하여 적의 시체(屍體)를 높이 쌓고 크게 봉분(封墳)한 것.

    

 

<대순회보 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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