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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한마디관포지교(管鮑之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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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3.30 조회3,5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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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포지교는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춘추 초엽 제(齊)나라에 살던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돈독한 우정을 일컫는 말이다. 어릴 적 둘은 항상 같이 어울려 놀았는데, 이때 포숙아는 관중의 총명함을 알아보았다. 그래서인지 이때부터 포숙아의 관중에 대한 신뢰는 굳건했다. 한번은 둘이 같이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관중은 매번 이익금을 포숙아보다 더 많이 챙겼다. 그러나 포숙아는 그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관중이 포숙아를 위하여 일을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궁지에 빠진 적이 있었지만 그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다. 시운(時運)에는 유리할 때와 불리할 때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관중이 전쟁터에서 세 번이나 도망친 적이 있었지만 포숙아는 그를 겁쟁이라 하지 않았다. 그에게 노모(老母)가 계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관중과 포숙아가 살던 춘추시대에는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힘의 논리가 정치를 지배하던 시대인데, 관중은 제나라의 공자(公子) 규(糾)를 포숙아는 그 이복 동생인 공자(公子) 소백(小白)을 각각 모시고 있었다. 제나라 왕이 정치적 음모로 시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B.C.E 686) 관중과 포숙아는 각자 자신이 모시는 두 공자와 함께 이웃 노(魯)나라와 거()나라로 망명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 왕을 살해한 정적(政敵)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공자는 왕위를 다투어 귀국을 서둘렀다. 이 와중에 관중은 소백을 암살하려 하였고 이로 인해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정적(政敵)이 되었다. 소백이 먼저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고 환공(桓公, B.C.E 685∼643)이라 일컫게 되었다.

 

환공은 왕위에 오른 후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관중의 압송(押送)을 요구했다. 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제(齊)나라 하나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십시오.”

 

도량이 넓은 환공은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중용하여 정사를 맡겼다. 이윽고 재상이 된 관중은 그의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어 마침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시대의 첫 패자로 군림케 하였다. 훗날 관중은 “나를 낳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진정 알아준 것은 포숙아 뿐이다.”라고 하였다.

 

포숙아의 관중에 대한 믿음과 우정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빛을 발하고 있다. 친구에 대한 믿음이 이러할진대 상제님을 믿고 수도를 하는 도우(道友)들 간에는 더욱 굳건한 믿음이 요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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