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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대의 유교(儒敎) - 주자학의 대항자: 육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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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20 조회2,1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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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구연(陸九淵, 1139~1192)의 자(字)는 자정(子靜)이고 호는 상산(象山)이며 강서성 무주(撫州) 사람이다. 주자(朱子)와 더불어 송대를 대표하는 신유학자인 그는, 주자학의 성즉리(性卽理)에 반대하여 심즉리(心卽理)를 주창함으로써 심학(心學)의 창시자가 되었다. 주자가 주렴계와 정이천의 학설을 중시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맹자를 직접 계승하고 정명도의 학설을 수용하는 입장에서 마음의 주체성과 자각을 중시했다.
  『상산연보(象山年譜)』에는 그의 사상적 경향을 엿볼 수 있는 유년(幼年)시절의 일화가 실려 있다. 3, 4세 때 천지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해 하던 소년은, 10여 살 때 고전을 읽다가 ‘우주(宇宙)’라는 두 글자를 “상하사방(上下四方)을 ‘宇’라하고 왕래고금(往來古今)을 ‘宙’라 한다.”고 주석한 것을 보았다. 이에 소년은 크게 깨달아 말하기를 “우주란 무한한 것이고 사람과 천지만물은 모두 그 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 안의 것은 내 안의 것이며 내 안의 것은 우주 안의 것이다.”라고 하였다. 비록 어린 나이에 얻은 자각이었지만 훗날 이것은 그의 사상의 종지가 된다.
  건도 8년(1172년)에 상산은 진사(進士) 시험에 응시한다. 이때의 시험관은 당시 저명한 학자 여조겸(呂祖謙)이었는데 그가 이름을 가린 시험지를 채점하다가 육상산의 답안에 이르러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답안은 대단한 학문을 갖춘 자의 것일 터이니, 강서성 육구연의 문장임에 틀림없다.”고 하면서 그를 적극 추천해 합격시켰다. 이로 인해 상산의 명성이 크게 높아져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문답을 주고받았고 제자가 된 이들도 많아 강서(江西)에서 육학(陸學)의 영향력이 크게 증가하였다.
  3년 후인 1175년에 육상산은 정안ㆍ숭안현의 주부(主簿)를 역임하면서 여조겸의 주선으로 신주(信州) 아호서원에서 주자를 만나 학문하는 방법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들은 합의점을 찾진 못했으나 서로의 인품과 학식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모임 후 육상산은 백록동 서원에서 강학(講學)하던 주자의 초청을 받아 중국 사상사에서 가장 유명한 강의 중 하나를 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군자는 의로움에 밝지만 소인은 이익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는 『논어』의 한 구절을 주제로 강연했다. 강의 내용은 주로 당시 과거를 준비하던 선비들이 의(義)가 아닌 이익에 뜻을 두고 그것에 몰두하는 세태를 비판한 것이었다. 이 강의에 감동한 청중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고 주자는 강의 내용을 글로 적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1182년에는 국자정(國子正)이란 직책을 제수받고 국학(國學)에 나아가 『춘추(春秋)』에 대해 강의했다. 이후 몇 차례 다른 관직을 거쳐 사록관(祠祿官)으로 한가하게 지내다가 귀계(貴溪: 현 강서성 응담시)의 응천산(應天山)에 올라 상산정사(象山精舍)를 짓고 강학하며 제자들을 기르니 사람들이 그를 상산선생이라 불렀다. 기록에 의하면 상산은 5년간 이곳에서 강학했는데 그를 알현하러 온 사람이 수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백록동 서원 강의 이후 육상산과 주자 문하생이 서로 왕래하며 학문을 논하고 주륙(朱陸) 간에 무극(無極)의 실재성을 둘러싼 논쟁(무극태극 논쟁)이 벌어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그 후 형문군(荊門郡) 지사에 부임하여 성벽을 쌓고 학교를 세우고 도적을 붙잡는 등 맡은 바 소임에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다음해(1192년)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평생 번잡한 의론과 저술을 경시했으므로 남긴 글이 많지 않았지만 후인들이 그의 서신과 어록, 서(序) 등을 정리한 『상산선생전집(象山先生全集)』 36권이 있다.


육상산의 심즉리(心卽理) 체계


  주자가 인간의 본성을 곧 보편적인 이[性卽理]라고 보았던 것과는 달리, 육상산은 인간의 마음을 우주의 보편적인 이[心卽理]라고 보았다. 두 사람 모두 ‘이(理)’를 최고의 범주로 여겼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그러나 주자가 심(心)을 형이상학적 본체인 성(性=理)과 구별되는 현상적인 기(氣)로 인식한 데 반해, 육상산은 심성(心性)의 구분이란 표현상의 차이일 뿐 하늘에서 부여받은 마음의 활동 그 자체를 이(理)라 여겼다. 그에게는 우주의 보편적인 법칙과 내 마음의 도덕법칙이 같은 것이므로, 상산은 ‘마음’을 자기 학설의 최고 범주로 삼았다.
  육상산이 말하는 마음은 맹자가 얘기한 사려하지 않고도 아는 양지(良知)와 배우지 않고도 행할 수 있는 양능(良能), 곧 인간의 본심(本心: 양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의(仁義)의 마음이라 일컬어지는 본심은 도덕법칙을 제공하고 만물의 이치를 모두 담고 있기 때문에, 공부를 한다는 것은 본심을 밝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모든 부도덕한 행위들은 이 본심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므로 상산은, “옛 사람들의 가르침이란 오직 마음을 보존하고, 마음을 기르며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것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마음 가운데 이(理)가 있으므로 ‘돌이켜 살펴 안에서 구하기만[反省內求]’ 하면 진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육상산의 최대 논적(論敵)이었던 주자는 이(理)를 깨우치기 위한 방법으로 존덕성(存德性: 인간의 타고난 선한 본성을 보존하는 수양방법)과 더불어 외부의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탐구하는 도문학(道問學)을 중시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옛 성현들의 언행이 기록된 경서(經書)를 철저히 연구함으로써 이치의 객관성을 확보코자 한 것이다. 상산도 경서 연구를 통한 지식추구의 필요성을 부인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을 밝히기 위한 전제일 때에만 의미가 있을 뿐, 주자에게서처럼 그렇게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아 그 본심을 발휘하고자 애쓰는 것이 간이(簡易: 간단하고 쉬움)하면서도 참된 공부라고 여겼기 때문에 육상산의 경우 도문학보다는 존덕성을 중시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왜 경서를 연구해 책을 쓰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육경(六經)이 나에 대해 주석을 단 것인데, 어찌해서 내가 육경에 대해 주석을 달겠는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상산에 의하면 이 마음은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나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지만, 인간이 선(善)을 행하느냐 악(惡)을 행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달린 문제라고 한다. 인간이 선에서 벗어나는 것은, 마음이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감각기관에 이끌려 이치[仁義]가 아닌 다른 것을 지향할 때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해서 나타난 결과이다. 그래서 그는 먼저 인의(仁義)라고 하는 커다란 목표를 확고히 세우고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본심을 회복하기만 하면 모든 행위가 자연히 도덕 기준에 부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주자는 그의 사상이 물욕(物慾)에 젖어들기 쉬운 마음의 활동을 무비판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인륜(人倫)을 어지럽힐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처럼 주자와 육상산은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대변하고 있다. 주자는 도덕주체인 인간의 자발성과 능동성에 대해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객관적인 기준(성인의 경전, 사물의 이치)과 외재적인 규범(예, 제도)에 의해 인간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에 반해 육상산은 인간의 본심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 마음의 자발적인 활동을 가로막는 모든 물욕과 편견에서 벗어나면 시대와 상황에 맞는 적절한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육상산의 사상은 훗날 명대 양명학(陽明學)의 선구가 되어 육왕학(陸王學)이라 불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육상산과 달리 왕수인(王守仁, 1472~1528, 양명학의 창시자)의 사상은 마음 밖의 이치를 부정하고 내면의 본체[良知]에서 발현하는 이(理)만을 인정하는 주관적 유심론(唯心論)의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마음을 우주의 보편적인 이(理)와 동일시했던 육상산의 사상은, 외부 사물의 이치를 통해 내면의 본체[性=理]를 밝히고자 했던 주자학에 보다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순회보》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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