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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교(儒敎) 1편 -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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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20 조회2,2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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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한국인의 생활 속에 가장 강한 영향을 끼쳤던 사상은 중국, 일본과 마찬가지로 유교와 불교일 것이다. 그 중에서 중국을 기원으로 하는 유교가 우리나라에 언제 전래되었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다음의 두 가지 가설이 존재해 왔다. 하나는 B.C. 12세기경 은주(殷周) 교체기에 기자(箕子)가 고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유교가 전해졌다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다. 다른 하나는 전국시대 때 고조선과 인접했던 연(燕)나라로부터 한자와 문물이 전해지면서 유교사상도 함께 전래했을 것이란 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중국으로부터 유교가 전래하기 이전에 유ㆍ불ㆍ도 삼교를 포함하는 현묘한 도(道)가 있었으니, 이를 최치원(崔致遠, 857~?)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풍류(風流)’로 규정하였다. 그 가르침이 만들어진 근원은 ‘선사(先史)’에 실려있다고 하였으나 이미 오래 전에 기록이 유실되었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우리나라에 풍류의 가르침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을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孔子, BC551~BC479)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유교의 도를 펴기 위해 제자들을 거느리고 14년 동안 철환천하(轍環天下)하다가, 중원에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한탄하면서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 구이(九夷: 동이족이 살았던 지역이나 종족)에서 살고 싶다.(『한서(漢書)』 「지리지」)”고 했던 것과, 공자가 구이의 땅에서 살고 싶다고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누추한 데서 어찌 산다고 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공자가 “군자(君子)가 사는 곳이라면 무엇이 더러울 것이 있겠느냐!(『논어』 「자한편」)”고 한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유교가 언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이전에 우리에게는 유교는 물론 불교와 도교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정신적 바탕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삼국시대에 중국으로부터 통치원리와 사회적 규범, 교육 체제 등을 제공하는 유교사상과 문화의 유입이 확산되면서 유교는 우리 고유의 사상을 토대로 더욱 발전하게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삼국시대부터 유교가 어떤 형태를 띠며 발전해 갔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조직적으로 인재를 양성했던 것은 고구려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국립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귀족의 자제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우리나라 교육의 효시인 태학의 설립은 중국 한대(漢代)에 설립된 태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당시에 이미 유교에 의한 정치체제와 문물제도 및 통치이념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귀족의 자제뿐만 아니라 평민의 자제에게도 교육을 시켰는데, 『구당서(舊唐書)』 「고구려조」에 의하면 “천하고 가난한 가정의 미혼 자녀들이 모두 거리마다 큰집을 지어 놓고 이를 경당(堂)이라 부르며 밤낮으로 글읽기와 활쏘기를 연습한다. 또한 이들이 보는 책은 오경ㆍ『사기』ㆍ『후한서』ㆍ『삼국지』 …『문선(文選)』 등이다.”라고 적혀있다. 이처럼 경당에서는 태학과 마찬가지로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역사와 문학 등을 가르쳤으며, 비상시를 대비해 무술훈련도 시켰다.

  고구려 초기에 유교의 이념이 통치권에 형성되어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사례들도 있다. 동명왕 고주몽(高朱蒙, 재위 BC37∼BC19)이 임종할 시 세자 유리왕에게 명한 유훈(遺訓)이 “도로써 나라를 다스리라(以道興治).”고 했던 것과,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 좥동명왕편좦에 유리왕의 덕을 찬양하면서 “너그러움과 인자함으로 지위를 지키고, 예법과 의리로 백성을 교화했다.”라는 언급이 그것이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이 191년에 외척의 반란을 평정한 후, 재야의 현인인 을파소(乙巴素)를 재상이란 파격적인 지위에 임명하자 을파소는 유교적 정치이념에 따라 벼슬길에 나아갔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에도 일찍부터 유교가 수용되어 유교경전을 비롯해 다양한 서적들이 폭넓게 읽혀지고, 국가조직과 정치사상 등에 응용되어 왔다. 고이왕 2년(260)에는 육좌평을 비롯한 16관등제를 중앙에 마련하고 웅진시대(475~538)에는 지방의 군현제를 정비하였다. 이 육좌평제도는 『주례』에 나오는 육전(六典)조직을 수용한 것이고 16관등의 명칭과 복색(服色), 중앙관제와 지방 행정구역의 편제 등은 『주역』의 음양오행과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사상이 그 저변에 깔린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비류왕 9년(312)에 왕이 사람을 보내 의지할 곳 없는 백성을 보살피도록 했고, 『주서(周書)』 「이역전(異域傳)」에는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금을 차등 있게 징수했다고 한다. 이처럼 백제의 역대 임금들은 인정(仁政)을 추구하는 유교의 정치사상에 따라 양민(養民)ㆍ위민(爲民)ㆍ휼민(恤民)에 힘쓰고 이를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4세기 후반에 백제는 한학(漢學)의 발전에 힘입어 여러 가지 편찬사업이 가능해지고 학술사상이 크게 발전하였다. 이에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오경박사(五經博士)제도이다. 백제는 오경에 능한 사람을 박사라 불렀는데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高興)이 최초의 역사서인 『서기(書記)』를 편찬했고, 5세기 초에는 왕인(王仁) 박사가 일본에 『천자문』 1권과 『논어』 10권을 최초로 전했다. 또한 백제와 활발히 교류했던 양(梁)나라(502~557)에서 백제에 오경을 강독할 학자를 요청했던 사실은 백제의 오경연구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짐작케 한다.

  한반도의 동남부에 위치한 신라는 대륙문화와의 접촉이 적었으며 진한(辰韓) 이래의 옛 풍속을 오랜 기간 동안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물왕(재위 356∼402) 때 고대국가의 체제를 갖추고 중국과 직접 교류하면서 많은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후 신라는 지증왕ㆍ법흥왕ㆍ진흥왕 3대를 거치면서 정치와 문화, 교육적인 측면에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는데 그 바탕이 되었던 것은 유교사상과 한학의 발전이었다.

  지증왕 때는 유교의 덕치이념을 표방하는 국호와 왕호을 마련하였고, 법흥왕 때는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공복(公服)과 복색(服色)을 제정하여 유교적 제도를 정비하였다. 진흥왕(재위 540∼576) 때에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내외에 표방하고 유교의 춘추사관에 입각한 국사(國史)를 편찬케 하였다. 또한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넓어진 지역을 순수(巡狩)하면서 비(碑)를 세웠는데, 거기에는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유교의 정치이념이 담겨있다. 이때 세운 각종 비들을 살펴보면 백제ㆍ고구려보다는 조금 늦었지만 상당한 수준의 유교경전에 대한 이해와 문장력이 갖춰져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설치된 화랑도에서는 오경을 중심으로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가르쳤고 원광의 세속오계(世俗五戒) 또한 유교의 덕목(忠孝信)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들 속에는 우리 고유의 충효(忠孝)사상이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 통일을 전후하여 중국 당나라의 문화가 지속적으로 신라에 유입되었다. 통일 후 신라는 호국(護國)과 불국토(佛國土)사상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정치 체제와 사회 규범의 확립에 유용한 유교사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선덕여왕 때 김춘추가 당(唐)의 국학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신문왕 때 국립대학인 국학(國學)을 세워 교육제도를 완비하였다. 국학에서 『논어』와 『효경』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친 데서 신라 사회가 인(仁)과 효(孝)의 정신을 통해 개인적인 윤리의 실천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덕왕 2년(722)에는 토지개혁을 통해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나누어주고 민생의 안정을 기했는데 이는 인정(仁政)을 추구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신라에는 본래 골품제도가 있어 왕과 고급 관료들 대부분이 성골(聖骨)ㆍ진골(眞骨) 출신이었다. 그러나 삼국 통일 후 넓어진 지역을 그들만으로 통치할 수 없었던 신라는, 사회의 안정과 정치의 효율화를 꾀하기 위해 고급관리의 양성이 절실했다. 그래서 국학을 크게 확충하고 과거제도의 전신인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국학에서 수학한 학생들의 성적을 상ㆍ중ㆍ하로 나누고 그에 따라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였다. 주로 6두품 이하의 일반 귀족 자제들이 그 대상이었지만 이들은 성골ㆍ진골 중심의 귀족정치 아래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데 그쳐야만 했다.

  통일신라시대에 대성하여 이름을 떨친 학자로 강수, 설총, 최치원 등이 있다. 이들 중 강수(强首)는 어려서 아버지가 불교와 유교 중 어느 것을 배우겠냐는 물음에, “불교는 세상 밖의 가르침이고 나는 인간 속의 사람이니 어찌 불교를 배우겠습니까? 유교의 도를 배우고자 합니다.”라고 하여 현실의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였다. 출세 후 부모가 좋은 집안의 여자와 맺어주려 했을 때, 강수는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바가 아니고, 도(道)를 배우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부끄러워할 바입니다.”라고 하면서 젊은 시절부터 정이 두터웠던 대장간 여자를 택했다.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薛聰)은 최치원과 함께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에 제향(祭享)되어 있는 유학자이다. 그는 이두문(吏讀文)을 발명하여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유교경전을 풀이하였다. 이것은 한국 최초의 유교 경전 해석으로서 한국적 유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술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화왕계(花王戒)는 우화의 형식을 빌려 임금은 간사한 사람을 멀리 하고 어진 이를 가까이 해야 한다는 유교적 교훈을 담고 있다.

  서두에서 언급한 최치원은 입당(入唐) 유학생으로 빈공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가, 황소의 난(875~884)이 일어났을 때 쓴 「격황소서(檄黃巢書)」를 비롯해 각종 명문(名文)을 남겨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그가 29세이던 해(885)에 귀국하여 시강(侍講) 겸 한림학사가 되었으나 당시 신라의 정치는 귀족들의 부패로 인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울어 가는 나라의 운명을 구해보고자 조정에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올렸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게 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산천을 떠돌아다니며 때때로 자신의 심경을 시(詩)로 읊곤 했다. 최치원의 학문과 사상은 단순히 시문(詩文)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유ㆍ불ㆍ도 등 당시의 사상 전반에 능통하는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현묘지도(玄妙之道)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군자국ㆍ태평국이라 언급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특성과 사상의 뿌리를 최초로 천명해 놓았다.  

 

《대순회보》 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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