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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교(儒敎) 3편 - 조선(朝鮮) 중기부터 후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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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20 조회2,1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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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士林派)의 성장과 이론 성리학의 발전

 

  16세기 초 반정(反正)으로 즉위한 중종(中宗, 재위 1506~44)은 두 차례의 사화로 큰 타격을 입은 사림파를 기용해 반정공신들을 견제하고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이때 기용된 사림파의 거두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신진 사림(士林)들은 지치(至治)01를 표방하며 『소학(小學)』을 중심으로 성리학의 이론보다 실천에 역점을 둔 도학(道學)정치론을 펼쳤다. 이를 위해 그들은 임금의 수신(修身)과 군덕(君德)의 함양을 엄격히 요구했다. 그리고 도교 기관인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고 사장학(詞章學)02의 배격을 주장하는 한편, 추천에 의해 인재를 등용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사림파는 현량과 실시와 위훈삭제(僞勳削除)03에 위기를 느낀 훈구파의 반격으로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 중종 14년)로 인해 다시 몰락하고 말았다.

  그 후 지방에서 세력을 형성해 다시 중앙정계에 진출했던 사림파는 또 한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사림들이 재야(在野)에서 좌절된 정치현실에 대한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송대 성리학에 대한 재검토와 주자학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가 이루어지면서 성리학이 심화될 수 있었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면 사림파를 견제하던 훈구파가 몰락하고 각 지역의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사림들이 다시 중앙정계에 활발하게 진출하였다. 이때부터 사림(士林)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성리학의 이념을 사회저변에 확대해 나갔다. 충ㆍ효ㆍ열을 비롯한 강상론(綱常論)이 크게 대두되고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사대봉사(四代奉祀)와 관혼상제에서 일반적인 지침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향촌 사회의 신분질서를 확립하고 유교문화의 확산을 위한 향약(鄕約)보급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때에 이언적과 이황을 필두로 서경덕, 이이, 성혼과 같이 조선시대 성리학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에 의해 송대의 성리학설을 능가하는 다양한 논의들이 이루어지면서 조선 성리학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 중심에는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과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 그리고 인심도심논쟁(人心道心論爭) 등이 있었다. 이러한 논쟁들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인식수준을 한층 끌어올리고 다음시대 성리학의 기준을 제공하는 대표적인 것이었다.

  특히 이황(李滉, 1501~1570)과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사이에 8년 동안 벌어진 ‘사단칠정논쟁’04은 학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 성리학의 이기심성(理氣心性)에 대한 연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이 논쟁은 이이(李珥, 1536~1584)와 성혼(成渾, 1535~1598) 간의 논변으로 다시 이어져 이황의 이기호발(理氣互發)을 주장하는 학파와 이이의 기발이승일도(氣發理承一途)를 주장하는 학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처럼 이황의 학풍을 존중하는 학파를 영남학파(嶺南學派: 주로 영남지역에 분포)라 하고, 이이의 학풍을 존중하는 학파를 기호학파(畿湖學派: 경기도ㆍ황해도ㆍ충청도에 분포)라 한다. 학파의 분화와 더불어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는데 대체로 영남학파가 동인(東人)에 속하고 기호학파가 서인(西人)에 속해 학설의 차이가 정치색을 달리하게 만드는 계기도 되었다.


양란(兩亂) 후 예학(禮學)의 형성과 화이론(華夷論)의 강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미증유(未曾有)의 대전란은 조선 사회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조선의 국가체제와 사회질서는 문란해지고 가치관과 윤리의식은 황폐해졌다. 이에 사회 기강을 바로잡고 가치관과 윤리의식을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예(禮)의 확립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었다. 또한 성리학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성리학과 표리관계에 있는 예학(禮學)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는데, 이는 성리학이 형이상학적, 심성론적 근원을 규명하는 이론체계라면 예학은 이를 실현하는 실천적 규범의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는 조선 창업 후 예의 실천이 본격화 된지 200년이 지났음에도 『소학(小學)』과 『주자가례(朱子家禮)』 중심의 예(禮)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것 외의 다른 예설에도 관심을 가지는 한편 좀 더 구체적인 예론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 그 결과 이 시기는 ‘예학시대’라 불릴 만큼 많은 예학자들이 배출되어 학파를 형성하였고 예서(禮書)의 간행도 두드러졌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기호학파의 김장생(金長生)과 영남학파의 정구(鄭逑)를 들 수 있다. 김장생의 예학은 김집,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송준길로 이어졌고, 정구의 예학은 장현광, 허목(許穆, 1595~1682) 등으로 이어졌다.05

  한편 호란(胡亂) 이후 명청왕조의 교체가 이루어지자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적(夷狄)인 청(淸)을 배척하고 중화(中華)인 명(明)을 존숭하는 ‘숭명배청’의 의리론[華夷論]을 강화하였다. 이는 이 시대의 가장 큰 의리로서 왕도(王道)를 숭상하고 패도(覇道)를 천시하는 춘추의리(春秋義理)에 입각한 시대정신이었다. 화이론(華夷論)은 명을 한족의 정통왕조로 존중하고 신종(神宗, 1563~1620)의 재조지은(再造之恩)06에 대한 의리가 더해져 청을 배척하는 북벌론(北伐論)으로까지 발전하였다.07

  그러나 효종 당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북벌론은 청이 가장 번성하던 시기에 제기되었던 까닭에 효종 서거 후 곧 중단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화이론은 조선 후기 사회의 시대이념으로서 성리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18세기 말 서학(西學)의 유입으로 일어난 벽이단론이나, 19세기 후반 서양과 일본의 침략에 따른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 또한 화이론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사상이었던 것이다.

 

성리학의 심화와 새로운 학문, 실학(實學)의 대두

 

  18세기 초 당쟁의 분열과 예송의 대립이 극심하던 시기에, 기호학파의 적통을 이은 권상하의 문인(門人)으로 이간(李柬, 1677~1727)과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이 있었다. 이들 사이에 인간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人物性同異]를 두고 활발한 논쟁이 일어나자, 그 논쟁은 기호학파 내에서 확대되어 이백 년간 지속적으로 토론되었다. 이간의 경우,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모두 오상(五常)을 온전하게 갖추고 있으며, 단지 기질에 따른 차이가 있다는 ‘인물성상동(人物性相同)’을 주장했다. 이와 달리 한원진은 인성은 오상을 모두 갖추었으나 물성은 오상의 일부만 갖추었을 뿐이라고 하여 ‘인물성상이(人物性相異)’를 주장하였다.

  이들의 논쟁이 확산되면서 이간의 입장을 지지하는 자들이 서울지역[洛下]08에 살고 있어서 ‘낙론(洛論)’이라 하였고, 한원진의 입장을 지지하는 자들이 충청도[湖西]에 많이 살았으므로 ‘호론(湖論)’이라 하였다. 호락논쟁은 16세기 후반에 있었던 사단칠정논쟁처럼 격렬한 논쟁으로 확대되어 조선 성리학에서 두 번째로 큰 논쟁을 이루었다. 이 논쟁은 인간이 사물보다 귀하다는 전제 아래 이기론(理氣論)을 바탕으로 인간의 본성을 정밀하게 규명하고자 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09

  이처럼 조선 후기 성리학은 이기심성론을 중심으로 한 학문의 심화도 있었지만 주자학만을 숭상하고 다른 학문을 이단시하고 배척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한 인륜도덕과 내적수양에만 치중하여 현실 사회의 보다 시급한 문제들을 도외시 한 채 공리공담을 일삼는 폐단을 낳았다. 실학(實學: 실사구시의 준말)은 이런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보다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를 지닌 몇몇 학자들에 의해 싹트기 시작했다. 실학자들은 실제 혹은 실천을 통한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방법을 견지하고, 실제 생활과 사회의 발전에 유용한 학문을 추구하였다.

  실학자들은 17세기까지 뚜렷한 학맥이 없다가 18세기에 이르러 청의 앞선 문물과 서학(西學) 전례에 힘입어 학문적 체계를 갖춘 두 학파를 형성하였다. 18세기 전반 이익(李瀷, 1681~1763)을 중심으로 한 성호학파(星湖學派: 중농학파)는 토지제도와 행정기구 및 기타 제도상의 개혁에 주된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에는 홍대용ㆍ박지원ㆍ박제가 등의 북학파(北學派: 중상학파)가 상공업의 유통과 생산기구 및 기술면의 혁신을 주장하였다. 18세기 후반 이들 실학파들이 개명군주인 정조(正祖) 치세기에 측근으로 기용되기도 했지만, 정조의 죽음과 함께 반대파의 모략과 탄압으로 실학파는 학파로서 존립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초반 성호학파를 계승한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500여 권의 저작을 남겨 실학사상을 집대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의 경세사상을 대표하는 것은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등의 일표이서(一表二書)이다. 각각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구상과 지방관의 행정 개선책, 사법 분야의 개혁에 관해 논한 것인데, 그 저서들에 깔린 근본 사상은 바로 민본주의였다. 북학파를 계승한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베이징을 방문한 이래 청대 고증학의 거장들과 교류한 이후 금석학(金石學)10의 대가가 되었다. 또한 그는 한(漢)나라 석비(石碑)에 전하는 예서(隸書)의 묘리를 깨달아 추사체라는 획기적인 서법을 개척한 서예가로도 유명하다. 19세기 중엽 최한기(崔漢綺, 1803~1877)는 실학파의 마지막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사상 체계를 정립하였고 유능한 인재등용과 교육제도의 개선, 과학기술과 농업ㆍ상업ㆍ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인류의 차별 없는 평등과 상호 존중,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세계대동사상을 제안했는데, 이런 그의 사상은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교량적인 역할을 한 것이었다.

 

 

01 ‘至治’란 『서경(書經)』 「군진(君陳)」편에 “지극히 아름다운 정치는 꽃답고 향기로워 신명을 감동하게 한다(至治馨香, 感于神明).”에서 유래한 것으로, 요ㆍ순 및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의 이상적인 정치 즉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르는 말이다.

02 사장(辭章)은 문장(文章)과 시부(詩賦)를 일컫는 것인데, 주로 한당시(漢唐詩)와 당송고문(唐宋古文)을 표준으로 삼아 수사적 기교에 중점을 둔 학문을 사장학이라 한다.

03 공신록에 올려진 거짓 공신의 목록을 제거함.

04 사단과 칠정에 관한 이기론적 해석. 이황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에서 "사단은 이(理)가 발해서 기(氣)가 따르고, 칠정은 기(氣)가 발해서 이(理)가 탄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주장했으나, 이이는 기대승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입장을 계승해 “발하는 것은 기(氣)이고 타는 것은 이(理)뿐이다.”(氣發理承一途)라고 주장했다.

05 17세기에 이르면 서인과 남인 사이에서 국가의 본보기가 되는 왕실의 상례(喪禮)를 둘러싸고 큰 논쟁[禮訟論爭]이 벌어졌다. 기해예송(己亥禮訟: 1659)과 갑인예송(甲寅禮訟: 1674)이라 불리는 이 논쟁은 왕실의 예법을 논했다는 점에서 큰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06 임진왜란 때 명의 신종이 파병을 하여 왜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나라를 패망에서 구해주어 다시 나라가 일어설 수 있게 도와준 은혜.

07 금장태, 『韓國儒學思想史』, 한국학술정보, 2003, pp.134~135.

08 중국의 서울이 낙양(洛陽)이었던 것에 비유해서 쓰던 말.

09 최영성, 『韓國儒學思想史4』, 아세아문화사, 1997, pp.58~59.

10 동기(銅器)ㆍ철기(鐵器)ㆍ석비(石碑)ㆍ화폐ㆍ인장(印章) 등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연구하는 학문.

 

《대순회보》 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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