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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교(儒敎) 4편 - 근대 그리고 현대의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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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20 조회2,0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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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舊韓末) 한국 유교의 동향

 

  19세기 후반은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환기였다. 이 시기 조선사회는 개항을 전후하여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세도정치(勢道政治)와 삼정(三政)01의 문란에 의한 정치적 혼란과 민란(民亂)이 끊이지 않았고, 대외적으로는 서양함선이 출몰해 통상을 강요하면서 민중의 불안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러한 국내외의 혼란에 따른 위기의식의 고조는 유학자들로 하여금 국가의 자주권을 확보하고 민족의 활로를 열기 위한 몇 가지 움직임들을 만들어냈다. 하나는 전통 도학(道學)의 입장에서 인륜질서를 지키고 서양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해야 한다는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이다. 다른 하나는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사회발전과 국부(國富)를 증강시켜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개화론(開化論)이다. 이 중 개화론에는 전통의 도덕질서를 간직한 채 서양의 우수한 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이자[東道西器論]는 온건개화파와 서양의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정치, 사상, 사회제도까지 받아들여 개화해야 한다는 급진개화파가 있었다.

  근대 조선에서 위정척사사상의 주류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와 그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화서학파였다. 이항로는 성리학의 도통이 공자ㆍ맹자ㆍ주자를 거쳐 송시열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이는 송시열이 청(淸)을 배척하고 명(明)을 존중함으로써 존화양이(尊華攘夷: 일명 화이론-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배척함)의 대의를 지켰기 때문이다. 그의 위정척사사상도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해 중화의 문명을 간직한 조선을 서학(西學)과 서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전개된 것이다.02 이기론에 있어서도 주리론(主理論)의 입장에서 주자학과 조선을 이(理)로 보아 높이고 서학과 서양을 기(氣)로 보아 천시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한말 도학의 이념적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고, 그의 문하에서 김평묵과 최익현, 유인석 등 성리학과 위정척사론을 대표하고 항일의병의 선구자로 활동했던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들 중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일본에 의해 불평등한 강화도조약(1876)이 체결되고 조선이 식민지화의 길을 걸어가던 시기에 주로 활동한 인물이다. 화이론에 입각해 위정척사운동을 벌이던 그는 강화도조약 체결 후, 조선이 일본과 화약(和約: 화친의 조약)을 맺는 것은 곧 서양과 화약을 맺음과 같다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내세워 개항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을 체결해 외교권을 강탈하자 다음해에 호남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순창전투에서 조선군이 진압군으로 투입된 사실을 알고 항전을 포기하였다. 그곳에서 체포된 그는 대마도로 호송된 후 단식 투쟁을 벌이다 74세를 일기로 순절하고 말았다.

  한편, 조선 후기 사회가 직면한 내외적인 위기상황에 대해 개화파는 위정척사파와는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사상은 실학파와 개화파의 가교 역할을 한 박규수(朴珪壽, 1807~1877)에 의해 태동된다. 박규수는 북학파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데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등 개화파의 중심인물들이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들은 박지원의 문집인 『연암집』과 청나라 말 위원(魏源)이 외국 지리와 문물을 수집한 『해국도지(海國圖志)』 등을 읽으며 개화사상을 배양했다. 그러던 중 1876년 개항 이후 유학자들의 강한 저항이 있었지만 시대조류의 흐름에 따라 박규수를 비롯한 개화파들은 동양의 도(道)를 중시하면서 서양의 기(器)를 받아들이자는 입장에서 온건적인 개화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 발발 후 개화파의 일부는 급진적인 변혁을 추구하게 되었다.03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들은 전통적인 유학으로는 조선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급진적인 서구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입헌군주제의 도입과 산업 근대화, 신분제 철폐 등을 제시하며 조선을 근대국가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쿠데타 형식으로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을 일으켜 수구파 정권을 타도하고 개화파 정권을 수립했지만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개혁은 온건파인 김홍집 내각에 의해 점진적으로 추진되었지만 급진개화파와 위정척사파 사이에서 입지를 넓히지 못하고 민중들의 호응도 얻지 못해 실패로 끝났다.

 

경술국치(庚戌國恥)와 유교개혁운동의 전개

 

  조선사회는 누적된 모순을 스스로 개혁하지 못하고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고 1910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합방이 이루어지면서 붕괴되었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 세력은 새로운 근대적 질서에 부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서양식 교육의 보급이 확대된 반면, 유림(儒林)들의 교육제도는 합법적으로 승인받지 못해 유교 전통의 붕괴가 가속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수의 유학자들은 쇠망해 가는 유교를 재정립하기 위해 근대적인 체제 속에 유교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박은식ㆍ장지연 등에 의해 1909년에 조직된 대동교(大同敎)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유림의 친일화를 목표로 이완용ㆍ신기선 등에 의해 조직된 대동학회(大東學會: 후일 ‘공자교’로 개칭)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박은식은 개화사상을 섭취하고 근대적인 애국계몽운동을 추구했고 그것의 실천을 위한 정신적 기초로 유교개혁운동을 전개했다.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04으로 대표되는 그의 유교개혁론은 인간의 자율적인 의지를 중시하는 양명학(陽明學)에 기초해 유교를 종교로 재인식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은식은 1910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중국으로 망명해 어떠한 압박 속에서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혼(魂)을 되찾는 길뿐이라며 『한국통사(韓國痛史)』ㆍ『한국독립운동의 혈사(血史)』를 저술했다. 한편, 장지연은 공자의 탄일(誕日)의례와 문묘(文廟)의 석전(釋奠)의례 및 제천의례를 비롯한 유교의례의 체계적 재구성을 추진하고, 나아가 의관제도의 개혁방법을 검토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의례의 재정립을 통한 유교의 활성화를 유교개혁의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유위(康有爲)ㆍ진환장(陳煥章)을 중심으로 중국에서 전개된 공교(孔敎)운동과 직접 관련성을 맺고 유교개혁운동을 전개한 경우가 있다. 먼저 이승희(李承熙)는 도학파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1913년 중국에서 설립된 공교회(孔敎會)에 가담해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전통유교의 폐쇄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유교의 종교성을 계발하고 국가 제도에 의존했던 유교 조직의 전통형태에서 벗어나, 도학의 기초 위에 교육제도의 개혁을 통한 유교의 체계화와 조직화를 모색했다.

  이병헌(李炳憲)의 경우도 중국 공교회와의 연계 속에서 1923년 배산서원(培山書院)을 건립하고 공자상(孔子像)을 봉안하는 등 유교의 개혁과 재건을 도모하였다. 그는 강유위의 유교개혁론을 전반적으로 받아들여 공교의 경학적 기초인 금문경학(今文經學)을 연구하고 대동사상(大同思想)05에 대한 인식을 통해 유교개혁운동을 전개했다. 「유교복원론(儒敎復原論)」에서 그는 공자를 절대 유일의 교조로 내세웠고 신(神)이 있는 종교로 정립시키기 위해 상제(上帝)를 주재신(主宰神)으로 부각시켰다. 또한 유교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교당과 교사(敎士)제도에 의한 포교방법도 제시하였다. 이러한 개혁의 실천방법은 당시 상당한 전파력을 지니고 있던 기독교의 방법을 상당부분 수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 진보적인 유학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유교의 종교성을 각성함으로써 유교개혁운동을 전개한 것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사실상 보수적 유림과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세력의 확장을 이루지도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유교개혁을 통해 새로운 시대변화에 적응하려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06

 

해방 이후 한국유교의 흐름

 

  1945년 해방과 함께 유도회(儒道會)가 조직되었고, 일제하에서 경학원(經學院)으로 격하되었던 성균관(成均館)이 독립운동가인 김창숙(金昌淑)을 초대 관장으로 재조직되면서 유림(儒林)의 재건운동이 전개되었다. 김창숙은 성균관의 문묘(文廟)에 우리나라와 관련성이 없던 중국 선현들의 위패를 퇴출시켜 한국유교의 독자적인 문묘체계를 구성했다. 이어서 전국 향교와 유림의 기부를 받아 1946년 ‘성균관대학교’를 건립함으로써, 성균관이 지닌 문묘의 제사기능과 태학(太學)의 교육기능을 함께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952년 김창숙이 이시영, 김성수 등과 반독재구호를 외치며 이승만에게 도전하자 유도회는 자유당 정권의 탄압을 받게 된다. 자유당의 사주를 받은 유림들이 김창숙의 제거를 도모하면서 분열된 유도회는 법적분규에 휘말리고 만다. 1956년부터 시작된 유도회의 법적분규는 1969년까지 지속되는데, 그 과정에서 유도회와 성균관이 대학을 관리할 능력을 상실함에 따라 1963년 성균관대학이 ‘재단법인 성균관’으로 분리되어 나갔다. 유림의 분열과 세력의 위축, 그리고 시대변화에 대한 부적응 등은 유림을 쇠퇴일로에 들어서게 하였다.

  1970년 대법원확정 판결로 분규가 종식된 후, ‘유도회 총본부’가 새로이 구성되고 유도회헌장이 제정되면서 유림분규는 본격적인 수습단계에 들어섰다. 이 시기에 여성유림회와 청년유도회가 창립되어 유림의 조직이 재정비되었지만, 유도회와 성균관의 활동은 매우 미약하였다. 성균관은 물론 그 산하의 향교조직도 정부의 지원을 받아 건물이나 보수ㆍ유지하며 춘추로 석전제(釋奠祭)를 지내는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1984년부터 얼마간의 활기를 되찾아 성균관에서 청소년을 위한 『명륜교감(明倫敎鑑)』을 편찬 간행하였으며, 1985년 유교학회를 조직하고 『유교대사전』을 편찬하는 등 유교교리를 확산시키는 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얼마 후 성균관은 한림원(翰林院)을 설치하고 대학과 대학원생들을 중심으로 유교경전 교육과정을 마련해 인재배출에 힘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학술활동은 유도회ㆍ성균관과의 연계가 미약한 상태에서 주로 성균관대학 출신의 학자들이 담당하고 있고, 그들 중 일부가 성균관이 주관하는 행사에 참여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한림원의 교육 또한 한문(漢文)교육을 중심으로 동양학, 철학을 전공한 학생들에게 한문 독해력을 배양하는 제도로 활용되고 있지만 이를 통해 유교지도자 양성을 기대하긴 어려운 실정이다. 대학에서 행해지는 유학에 대한 교육도 수양의 비중이 약화되고 서양식의 학문방법이 도입된 강단유학의 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유교인 신도수의 경우에는 1983년 78만 7천여 명 정도이던 것이 2005년에는 104,575명(인구대비 0.2%)으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전반적으로 해방 이후 한국유교는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유교교단 내부에서도 유교인들의 개혁과 각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01 조선 후기 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었던 전정(田政)ㆍ군정(軍政)ㆍ환정(還政)을 일컫는 말.

02 이항로는 도학의 의리론적 신념에 따라 병인양요(1866) 때 주전론(主戰論)을 펼친 바 있지만, 천주교를 금하고 서양 오랑캐를 격퇴하는 것도 지엽말단의 일이며 서양 물품을 근절시키고 수신(修身)에 힘쓰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라 여겼다.(강재언 저,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한길사, 2003, p.438)

03 임오군란을 계기로 민씨정권의 수구정책은 날로 횡포를 더해갔고, 청국은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획책함에 따라 개화파의 정치적 위기는 높아져갔다. 이에 따라 급진개화파는 정변을 통해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할 것을 결정했다.(『브리태니커백과사전』, 2005년)

04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양명학에 의거해 유교의 개혁을 주창했다. 주된 내용은 제왕 중심에서 백성 중심으로의 전환, 보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교화 방법의 실행, 양명학 연구를 통한 유교교리의 간결화이다.(최영성, 『한국유학사상사5』, 아세아문화사, 1997, pp.202~204)

05 『예기(禮記)』「예운편(禮運篇)」에 의거해 만민의 신분적 평등과 재화의 공평한 분배, 그리고 인륜의 구현으로 특징되는 대동사회를 인류의 가장 이상적인 사회형태로 상정하는 사상을 말한다. 이에 따르면 큰 도[大道]가 행해지고 어진 사람과 능력 있는 자가 버려지지 않으며, 가족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노인은 자기의 생을 편히 마치고, 젊은이는 모두 일할 수 있으며, 노약자ㆍ병자ㆍ불쌍한 자들이 부양되며, 길에 재물이 떨어져도 줍지 않는 세상이 바로 대동세계라고 한다. 이 대동사상은 청말의 정치가ㆍ사상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들 중 강유위는 『대동서(大同書)』에서 대동사회를 방해하는 요인은 바로 이기심(利己心)이라 보고 이것을 타파하려면 먼저 가족제도를 폐지하고, 남녀평등의 실현, 인종 차별의 소멸, 계급을 철폐해야 한다는 방법론을 제시하였다.(유교사전편찬위원회, 『유교대사전』, 박영사, 1990, pp.322~323)

06 금장태, 『현대 한국유교와 전통』,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pp.139~140 

 

《대순회보》 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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