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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없는 종교, 힌두교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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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거룡 작성일2017.02.20 조회2,5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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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거룡 (선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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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흔히 종교의 나라라고 하는 인도에 살면서 놀라는 것은, 종교라는 말 혹은 종교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심지어 술자리에서도 격렬하게 논쟁의 주제가 되는 종교 문제에 대한 논의는 실제로 이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사람들은 지극히 종교적이다. 아침에 눈뜰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모든 일과가 신과 관련을 지니며, 연중 수많은 축제가 있지만 종교와 무관한 축제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2백여 가지의 성례가 행해지며, 신이 개입되지 않는 성례는 없다. 하늘과 땅, 비, 구름, 천둥, 번개, 바람, 강, 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자연이 신으로 숭배되지 않는 게 없으며, 소나 멧돼지와 같은 짐승들이 신격화되기도 한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끼니는 걸러도 아침이면 꽃을 사서 사원에 간다.
  힌두교를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은 업(業)과 윤회에 대한 믿음이다. 사실 이 둘은 둘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죽은 자가 각기 자신의 업에 따라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죽은 자는 달로 간다. 고대 인도인들에게 달은 땅에서 완전하게 되지 못한 사람들이 죽은 뒤에 가 머무는 곳이었다. 제 몸을 태운 화장불의 연기를 타고 허공을 날아 달로 간다. 달이 찬다는 것은 지상을 떠난 망자들이 차츰 불어난다는 것이며, 달이 기운다는 것은 이들이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자의 업에 따라 일정 기간 달에 머물렀다가 비를 타고 다시 땅 위로 내려온다. 달은 죽음이 쉬는 곳인 동시에 생명이 일어나는 원천이다. 무상한 인간의 죽음을 감싸 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실어 다시 땅 위로 내려보낸다. 누구는 훌륭한 가문에, 또 누구는 딱정벌레 같은 미물로, 또 누구는 소나 돼지만 못한 천민으로 태어날 것이다. 완전하게 되어 범계(梵界)로 간 자들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 누구에 의하여 이런 믿음이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알 수도 없다. 요는 우리와 같은 시대 같은 별에 사는 수억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살아왔으며, 지금도 그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럴싸한 이론도 설명도 무의미하다. 다만 그렇게 믿고 사는 삶이 있을 뿐이다. 알다시피, 종교의 핵심은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며 체험이다. 종교에 대한 지식이든, 신에 대한 지식이든, 그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종교도 아니고 신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종교 혹은 신에 대한 설명일 뿐이며, 설명은 이미 한 다리 건너 있는 이차적인 것이다. 종교에 대한 지식은 그 껍데기일 뿐 알맹이는 아니다. 과연 국외자로서 다른 종교를 알 수 있는가의 문제는 논외로 하고라도, 만일 힌두교에 대한 일별의 식견이라도 얻어 챙기려 한다면, 이에 관한 백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는 차라리 갠지스 강가로 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힌두교는 어떤 특정한 창시자에 의하여 만들어진 종교가 아니다. 장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수 대중의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하여 형성되어 온, 지금도 형성 도상에 있는 미완의 종교다. 모든 힌두교인이 공유하는 공통 경전도 없다. 물론 『베다(Veda)』나 『우파니샤드(Upanisad)』같은 오래되고 중요한 경전들이 있지만, 모든 계층의 힌두교인들이 공유하는 경전은 아니다. 이 경전들은 상층 힌두교도들에게만 허용되기 때문이다. 힌두교인은 힌두교인으로 태어난다. 이들에게 종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태어나면서 이미 어떤 한 종파에 속해 있으며, 일생 동안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이들의 삶이다. 애초부터 종교라는 이름으로 의식되는 테두리가 없으니 벗어날 테두리도 없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힌두교는 곧 삶이다. 물고기가 물에서 살 듯, 힌두교인은 종교로 산다. 스스로의 종교를 의식하는 힌두교인은 드물다. 이런 점에서 힌두교는 ‘종교 없는 종교’다.  

1. 베다의 종교와 사상

  베다(Veda)는 힌두교의 중심축이다. 그것은 힌두교에 대한 지식이나 설명이 아니다. 어떤 점에서 베다는 ‘경전’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차원 높은 영성을 실현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위대한 여정의 기록이다. 기원전 십 수세기 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베다의 찬가들은 힌두교의 모든 것이다. 힌두교 경전에는 베다 외에도 그 이후에 만들어진 다양하고 방대한 문헌이 있지만, 권위로 보아 베다에 견줄 만한 것은 없다. 어떤 의미에서 베다는 힌두교인들이 섬기는 신 이상이다. 흔히 신에게나 어울리는 영원, 불변, 완전, 시작도 끝도 없음(無始無終)이라는 수식어가 베다에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될 뿐만 아니라, 모든 신들이 소멸하여 브라흐마의 잠 속으로 귀입(歸入, pralaya)하는 동안에도 베다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힌두교인들의 뿌리 깊은 믿음이다.
  베다가 형성된 이래 인도의 역사는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힌두교 역사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베다가 갖는 불멸의 권위이다. 베다에 언급된 것만이 근본적이고 본질적이며 정통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흔히 힌두교는 수많은 신상(神像)을 섬기는 종교로 이해되지만, 베다의 종교에 비추어 본다면 그것은 힌두교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베다의 종교는 원래 성상(聖像)을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어떤 바라문이 성상을 숭배하지 않는다 해도 힌두교인으로서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베다에 규정된 일상적인 기도와 의무로 규정된 예식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힌두교인이 아니다.
  철학의 영역에서도 베다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이것은 인도철학이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논리적인 필연이다. 전통적으로 정통 인도 철학자들은 베다의 가르침에 가장 충실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자신의 사상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했다. 이것은 사상의 권위와 가치가 그 자체의 독창성 보다는 얼마나 전통에 충실한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도의 사상이나 종교에서 정통성의 근거는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가의 여부이다. 어떤 종파나 학파든 베다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정통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베다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곧 스스로 아웃사이더임을 자처하는 것이다. 붓다나 마하비라(자이나교의 開祖)의 사상이 인도철학에서 외도로 규정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적어도 천 년 이상에 걸치는 베다의 종교적인 발달 과정을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베다 찬가에 나타나는 뚜렷한 특징은 자연신관(自然神觀)이다. 자연속의 수많은 존재나 현상이 신의 이름으로 등장하며 인간처럼 행동한다. 신들의 수도 엄청나다. 심지어는 300,003,033신이 있다고 말해진다. 달과 별, 바다와 하늘, 여명과 황혼 등 온갖 자연 현상들이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고 신격화된다. 그들에게 자연은 더불어 영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살아있는 존재였으며, 자연의 어떤 장려한 측면들은 신성한 존재가 세상을 내려다보는 창문이었다. 사람들은 대폭풍우 속에서 신의 음성을 들으며, 바다의 잔잔함 속에서 신의 손길을 본다. 이와 같이 베다 종교의 최초의 모습은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숭배였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느끼는 원초적인 감정이기도 하다.
  신은 항상 인간과 함께 있으며, 인간의 음식을 먹고 인간의 음료를 즐긴다. 신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시기와 질투를 하며 전쟁과 정복을 일삼는다. 출생과 죽음을 지니는 신들은 불멸을 얻기 위하여 소마를 탐한다. 신과 인간은 서로에게 의존한다. 인간은 신의 위력이 감퇴되지 않도록 공물을 바쳐 힘을 유지하게 하며, 반대로 신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다. 신은 데바(deva), 즉 ‘주는 자’이다. 여러 신들 가운데 어떤 한 신이 차지하는 위상은 곧 인간에게 어떤 종류의 이익을 얼마만큼 주느냐에 달려있다. 신들은 자신들이 지닌 성격과 능력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유익함을 줌으로 위대하며, 따라서 숭배될 가치가 있다.
  베다의 신들이 지니는 또 하나의 뚜렷한 특징은 ‘강력한 힘’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무용신(武勇神) 인드라(Indra)를 들 수 있다. 『리그베다』 찬가의 1/4 이상이 인드라의 존재와 활약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는 가히 인도의 제우스라 할 만하다. 인드라는 원래 뇌우(雷雨)와 관련된 신이었으나, 베다에서는 차츰 선주민들과의 전쟁에서 아리야인들에게 승리를 주는 신으로 변모되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장발과 수염 그리고 우렁찬 목소리로 포효하는 그의 외양은 당시 아리야인 전사의 이상형을 반영하고 있다. 이 신은 나중에 제석천(帝釋天)이라는 이름으로 불교에 수용되어 과 더불어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 된다. 이외에도 화신(火神) 아그니(Agni), 사법신(司法神) , 우신(雨神) 파르자니야(Parjanya), 풍신(風神) , 천둥신 루드라(Rudra),  등이 중요한 신들로 간주되었다.
  우주와 신성(神性)에 대한 통찰이 깊어감에 따라서, 다수의 신들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자연스러운 경향이 나타났다. 우주의 질서와 자연 현상의 배후에 있는 하나의 원리로서 라는 개념이 나타났으며, 차츰 리타는 물리적인 세계뿐 아니라 인간의 윤리 세계에도 적용되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와 같이 리타의 개념 속에 반영된 존재의 통일성에 대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일신교를 향한 이행을 도왔다. 만일 자연의 다양한 현상들이 다수의 신들을 요청한다면 자연은 통일적인 질서나 원칙도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에는 통일된 질서나 일정한 원칙이 있다면 당연히 이에 대응한 하나의 신이 필요해진다. 우주를 지배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는 믿음은 곧 하나의 신에 대한 믿음을 뜻한다.
 
 
2. 베다의 완성, 『우파니샤드』


  아리아인들이 인도 대륙에 들어온 후, 수세기가 지나자 『리그베다』 초기의 참신하고 소박한 믿음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제의식이 극단적으로 형식화되어 수많은 종류의 세세한 절차가 규정되고 아주 미세한 절차 하나에도 중요한 의미가 부여된다. 신성함에 대한 숭배라는 종교적 감성도 사라지고, 제사는 물질적인 이득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주고받는 거래가 성행하고 손익을 따지는 기계적인 관계로 변질되는 것이다.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이러한 경향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는데 그 결과가 2백여 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우파니샤드』 제작이다. 우파니샤드는 극단적인 형식주의 속에 죽어가는 종교의 참된 가치를 부활시키려는 운동의 결실이었다. 우파니샤드는 영적인 것을 부활시켜 모든 것이 형식화되고 의례적인 것으로 변해가는 시대에 저항하고자 했다. 이미 이러한 움직임은 『리그베다』의 후기 찬가들에서 이미 그 싹을 보이지만 마침내 『우파니샤드』에서 완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파니샤드는 베다 종교에 대한 일대 혁신인 동시에 그것의 완성이다. 베다를 계승했으면서도 동시에 반(反)베다적인 셈이다.
 『우파니샤드』는 사람들의 관심이 외적인 것에서 내면적인 것으로 옮겨가고 있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떤 인간은 외부 세계에 대한 무한한 외경심을 갖는다. 또 어떤 인간의 영혼에 대한 내적인 성찰을 한다. 그러나 이 둘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베다에서는 광대한 자연의 질서와 운행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제 우파니샤드에서는 인간의 심원한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로 돌아간다. 인간의 완성은 오직 우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참다운 종교적 삶에 의하여 얻어질 수 있다. 완성이란 바깥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숭배되어야 하는 것은 이른바 신들이 아니었다. 참으로 살아있는 존재는 진정한 인간 그 자체 아트만이다. 신들이 머무는 곳은 광대한 우주 공간의 어느 지점이나 히말라야의 눈 덮인 산자락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가슴 속이다. 인간의 진정한 자아는 불멸이며 장엄한 브라흐만(Brahman, 宇宙我)과 하나이며 동일하다. 브라흐만이 아트만이며, 아트만이 브라흐만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원인이며, 유일하고 최고의 존재인 브라흐만은 인간 개개인의 가장 내밀한 자아와 다르지 않다.
  우파니샤드의 최종 목적은 인간을 바른 삶으로 인도하는 데 있다. 이는 단순히 철학적 지식을 전달해 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고뇌하는 인간에게 평온을 주고 자유롭지 못한 인간에게 자유를 주고자 하는 것이다. 육신의 속박에서 영혼을 해방시키며 신과 영적인 교감을 누릴 수 있게 안내해 주는 책이 『우파니샤드』이다. 지적인 단련을 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함을 키워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거룩한 의미를 깨닫고 이를 나누기 위해서이다. 이런 점에서 인도철학은 학문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특성을 띤다.
  이러한 우파니샤드의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은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여러 모순과 고통을 직시하게 하였다. 삶은 결코 쉽지만은 않은 연속되는 고통의 과정이다. 초기 베다의 종교는 환희로 가득찬 세계에 사는 인간들의 기쁨을 나타내는 종교였다. 신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또한 믿음과 의지의 대상이었다. 지상에서의 삶은 소박하고 감미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우파니샤드 시대에서는 근심 걱정 없는 경박한 즐거움을 비난하며 영적인 가치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운다. 현실에 대한 불만족은 도덕적인 각성을 가져오고 삶을 거듭나기 위해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세상에 대한 불만족은 인간의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다거나 체념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삼사라(saṃsāra, 輪廻)로 말해지는 현실의 삶은 고통스럽긴 하지만 동시에, 자기완성을 위한 무대가 되고 촉매제가 된다. 보다 완전한 환희와 영적인 평안을 향해 가는 우리는 삶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이를 자기 단련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자기 극복의 환희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삶에 열정을 불어넣어야 한다. 고통에서 고통으로, 죽음에서 태어남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과정은 단지 영적인 완성을 위한 기회들의 연속일 뿐이다. 삶은 스스로의 단련을 통해 자기를 완성해가며 절대자에게로 다가가는 걸음걸음이다. 삶은 헛된 꿈이 아니며, 세계는 결코 정신이 만들어내는 허깨비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우파니샤드의 염세주의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현실의 불만족에서 시작하여 이로부터 벗어나도록 설득한다. 만일 벗어날 길이 전혀 없다면, 불만족은 곧 좌절이며 체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파니샤드는 그렇지 않다. 자아에 대한 바른 지식을 통하여 현실의 삶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해탈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르친다. 우선 인생이란 원래 고통스런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 다음이 보인다. 사실 세계의 모든 고등 종교는 그 출발에 있어 어느 정도의 염세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 우리의 현존에 원죄의 십자가를 지우든, 업의 굴레로 속박하든, 아무튼 현실은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출발하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부정은 긍정을 위하여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염세주의와 완전히 결별해버린 낙천주의는 언제든지 무가치한 방종으로 흐를 위험을 안고 있다.
  ‘우파니샤드’라는 말이 ‘가까이 다가가서 앉음’이라는 문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그것은 원래 비의전통이었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전해질 수 있는 진리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가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은밀하게 전하고 받는 가르침이었다. 그것도 일정한 자격을 갖춘 상위 카스트의 남자 제자 혹은 아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최고의 가르침이었다. 우파니샤드의 상당 부분이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 카스트와 힌두교를 초월하여 모든 인류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보편성과 함께 위대한 통찰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우파니샤드의 메시지는 힌두교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으며, 끊임없는 윤회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온갖 고뇌와 두려움과 미혹함을 잠재울 수 있는 해탈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 인도를 넘어 서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불교라는 간접적인 경로를 통하여 티베트, 중국, 한국, 일본, 말레이 반도 등으로 전파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오늘날 인도에서 가장 대중적인 경전인 『바가바드기타』는 『우파니샤드』의 연속선상에 있다. 『바가바드기타』는 원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일부였으나 나중에는 하나의 독자적인 문헌으로 읽히게 된, 힌두교의 가장 대중적인 경전이다. 권위로 보면 힌두교 경전 중에서 베다가 최고의 위치를 점하지만, 오늘날 힌두교도들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이라는 점에서는 『바가바드기타』도 이에 못지않다. 전통적으로 베다는 하층 천민들이 접할 수 있는 경전이 아니었다. 더욱이 우파니샤드의 경우에는 전문 지식인도 이해하기 어려운 비전(秘傳)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문헌들은 다수 대중의 삶과 동떨어진 세계의 복음이었다. 이에 비하여 『바가바드기타』는 언제나 일반 대중의 삶 속에서 호흡해온, 대중들의 경전이다. 특히 그것은 하층 천민들의 해탈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베다와 우파니샤드에서 버림받은 서민 대중까지도 『바가바드기타』는 감싸 안고 있는 것이다.
  베다 이래로 인도에서 발생하고 성장해 온 각양각색의 종교 사상들이 『바가바드기타』로 흘러들어 한데 어우러졌다가 다시 강줄기를 이루어 신천지로 뻗어나간다. 주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발달해 온 우파니샤드의 범신론적 불이론(不二論)이 대중적인 박티(bhakti, 信愛)종교와 한데 어우러지고 브라흐만과 가 하나된, 『바가바드기타』의 주신(主神) 는 지금도 인도에서 가장 사랑받는 신이다. 크리슈나는 원래 드라비다 계통의 신이었으나 나중에 비슈누의 화신으로 받아들여지게 됨으로써 정통 힌두교의 신으로 편입된다. 이와 같이 크리슈나는 토착적인 요소와 아리아적인 요소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인도의 전역에서 그리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섬겨지고 있다 할 것이다. 어떤 점에서 『바가바드기타』는 우파니샤드에 이르기까지의 범신론적인 바라문교가 유신론적인 힌두교로 환골탈태하는 분기점이며, 후기 힌두교 사상의 원류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가바드기타』는 베다와 별개일 수 없다. 『바가바드기타』는 우파니샤드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으며, 단지 종교적인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날 뿐이다. 우파니샤드의 종교적인 함축들을 뽑아내고, 이것을 서민 대중들의 신화 및 정서와 통합시킴으로써 살아있는 체계로 활력을 불어넣은 것이 곧 『바가바드기타』이다. 베다가 기독교의 구약성서에 해당한다면 『바가바드기타』는 신약성서에 해당한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베다의 끝이 우파니샤드라면, 우파니샤드의 끝은 『바가바드기타』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3. 업과 윤회


  업(業, karma)과 는 힌두교를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다. 고대 인도인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은 다시 죽는 것이었으며, 최고의 이상은 죽어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선행을 쌓아서 좋은 생을 받겠다는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최선이 아니라 단지 차선의 바람일 뿐이다. 현생에서 바른 지혜를 얻은 사람은 죽어서 곧바로 범계(梵界)로 간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각자 쌓은 공덕의 정도에 따라 일정 기간 동안 천계에 머물렀다가 공덕이 다하면 지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인도에서 윤회에 대한 체계적인 사색이 인간의 현실적인 삶이 고통이라는 자각과 함께 이루어졌다. 현재의 삶이 고통으로 자각될 때, 이 고통의 뿌리는 어디며,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났다. 삶이 고통이라는 자각,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의 삶에서 벗어날 것인가에 대한 사색의 결과로 윤회에 대한 생각이 이론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고통의 삶을 윤회라고 한다. 그러면 윤회는 왜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윤회는 전생의 업 때문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어떤 경로를 통하여 윤회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
  윤회에 대한 믿음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죽은 자’와 ‘다시 태어나는 자’ 사이의 연속성 혹은 자기 동일성이 입증되어야 한다. 그게 여의치 못하면 윤회설은 그야말로 지극히 주관적인 믿음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윤회가 다만 감상적인 믿음 정도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는 전생에 양귀비였다”고 말할 때, 양귀비와 그 사람 사이의 자기 동일성이 입증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주장은 다만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자는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고대 인도사회에서 장례는 기본적으로 화장(火葬)으로 치러졌다. 죽은 시체를 화장하고 나면 재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면 죽은 자가 어떻게 어떤 경로를 통하여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죽은 자를 화장하고 나면 재만 남는데, 그는 어디로 갔다가 다시 오는 것일까? 죽은 자는 어디로 가는가? 이에 대한 고대 인도인들의 대답은 죽은 자의 영혼이 화장할 때 피어나는 연기를 타고 조상들이 머무는 세계, 즉 달(月)로 간다는 것이었다. 연기가 아니라 수증기를 타고 올라간다고 믿기도 했다. 윤회를 물의 순환과 관련지어 생각한 흔적도 보인다. 물은 고대 인도인들이 최초로 생각해낸 우주의 원질이다. 물론 나중에는 우주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지, 수, 화, 풍, 공의 5요소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초기 베다시대만 해도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달은 죽은 조상들이 머무는 곳이다. 달 속에서 조상들은 새로운 생을 기다리며 휴식한다. 달이 차는 것은 죽은 조상들이 차츰 불어나는 것이며, 달이 기우는 것은 죽은 조상들이 다시 땅 위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은 생명의 물로 가득 차 있는 거대한 물사발이다.
  그러면 어떻게 다시 돌아오는가? 고대 인도인들은 빗물을 타고 다시 내려온다고 믿었다. 빗물을 타고 내려온 영혼은 식물의 씨앗으로 들어갔다가 남자의 정자를 거쳐 여자의 태내로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이 세상으로 태어난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단순히 화장시의 연기와 강우현상을 결합하여 윤회를 설명하려던 시도는 우파니샤드의 오화설(五火說)과 이도설(二道說)에서 보다 구체화된다. 오화설은 사람이 죽은 후에 다시 지상 세계에 태어나는 경로를 제사의 다섯 불(火)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이도설은 우리가 저 세상으로 가는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장 오래된 우파니샤드 중의 하나인 <브리하드아란야카 우파니샤드>에 이와 관련된 대화가 나온다. 먼저 프라바하나왕이 바라문 웃달라카 아루니의 아들 슈웨타케투에게 다섯 가지 질문을 한다. 첫째, 여기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서 어떻게 갈라서는지 아는가? 둘째, 그들이 어떻게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오는지 아는가? 셋째, 계속해서 사람들이 죽는데, 어째서 저 세상은 가득 차지 않는가? 넷째, 얼마나 어떻게 공물을 드려야 물이 사람의 목소리가 되어 말을 하는지 아는가? 다섯째, 신도(神道)와 조도(祖道)로 나누어진 것을 아는가? 슈웨타케투는 이 물음들에 대답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물어보지만, 아버지 또한 이에 대하여 답을 내릴 수 없게 되자, 아버지가 직접 프라바하나왕에게 가서 가르침을 청한다.
  이에 대한 가르침이 프라바하나왕의 오화설이다. 첫째, 천계(天界)를 제화(祭火)로 하여 믿음을 바칠 때 소마(Soma)왕이 생긴다. 둘째, 공계(空界)를 제화로 하여 믿음을 바칠 때 비가 내린다. 셋째, 지계(地界)를 제화로 하여 믿음을 바칠 때 음식물이 생긴다. 넷째, 남자를 제화로 하여 믿음을 바칠 때 정자가 생긴다. 다섯째, 여자를 제화로 믿음을 바칠 때, 태아가 생겨난다. 한편, 이도설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길이 그 사람의 업에 따라 조도와 신도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오화설의 진리를 알고 숲에서 고행을 닦은 사람은 사후에 화장의 불꽃을 따라 범계로 인도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 길이 바로 신도이다. 이에 비하여 오화설의 진리는 몰랐지만 숲에서 고행을 닦고 선행을 한 사람은 조도를 따라 달로 간다. 이들은 조상들이 머무는 달에서 스스로의 공덕이 다할 때까지 머물다가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러면 신도나 조도로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지옥의 개념이 생겨난다. 물론 인도종교에서 지옥은 끝장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연옥(煉獄), 즉 잘못된 영혼이 보다 나은 곳으로 가기 위하여 스스로를 단련하는 곳이라는 정도의 의미를 지닐 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대목은, 천계에 대한 묘사가 아름답고 화려해질수록, 지옥은 더욱더 끔찍하고 혹독한 곳으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업설의 요체는 필연성이다. 즉 행위는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과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모든 행위는 행위자에게 어떤 잠재인상을 남기며, 이 잠재인상들은 필연적으로 행위자의 미래의 존재 양태를 결정한다. 우리는 이 잠재인상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 사람의 사회적, 경제적, 신체적, 심리적 상태는 그의 과거의 업에 기인한다. 과거의 업은 우리의 현재 존재 상태를 결정하며, 현재 우리의 행위들은 우리의 미래 존재 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업의 필연성은 가끔 오해되거나 악의적으로 해석되었다. 업설에 대하여 비판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업설을 믿는 사람들도 그것을 숙명론 혹은 결정론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바르게 이해하는 한, 업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거나 도덕적 행위들을 단념시키는 교의가 아니다. 이 점은 우선 우파니샤드에서 업설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다시대에는 사람의 길흉화복과 운명이 신(deva)들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신들을 위무하기 위한 희생제와 찬가가 종교적인 삶의 핵심이었다. 브라흐마나시대는 제사지상주의시대였다. 인간의 운명과 행불행은 오직 제사를 어떻게 지내느냐에 달려있다고 믿었다. 우파니샤드에서 확립된 업설은 사람의 운명은 사람 스스로가 결정한다는 사고방식의 표현이다. 다시 말하여, 사람의 운명은 신들이나 제사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행위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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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이거룡 : 델리대학교 철학과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자연치유, 요가명상, 인도철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현재 선문대학교에서 통합의학대학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아름다운 파괴』, 『이거룡의 인도사원순례』, 『두려워하면 갇혀버린다』, 『구도자의 나라』, 『전륜성왕 아쇼까』, 『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 -  인도철학에서 사이버네틱스까지』(공저), 『인문학의 창으로 본 과학』(공저), 『미래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 『고전의 반역』(KBS고전아카데미, 공저), 『달라이라마의 관용』(번역서), 『인도철학사Ⅰ- Ⅳ』(전4권, 번역서) 등 여러 책이 있다
 
 

《대순회보》 1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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