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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부상조의 표상 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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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3.09 조회1,8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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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민족에게는 예로부터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다. 혼자 처리하기 어려운 일은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하고 또한 나를 도와준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도움을 아끼지 않는 협동정신의 어울림이 활발했다. 어려운 시기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진심으로 서로를 도움으로써 어려움을 극복했던 선조들의 얼은 우리가 지켜가야 할 소중한 유산임에 틀림없다. 두레는 바로 그러한 선조들의 얼을 담고 있는 풍속 가운데 하나인데 그 두레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두레의 의미와 발생

 

  두레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두르다’에서 온 말임을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여러 사람이 모인 상태의 뜻을 나타낸다. 이를 통해 볼 때 두레는 일정한 집단, 조직과 관련된 말임을 발견할 수 있다. 두레가 농사꾼들이 농번기에 공동으로 협력하기 위하여 이룬 마을 단위의 모임이라고 볼 때 단체개념과 결부시키면 계(契)·사(社)·회(會) 등과 같은 맥락을 지닌다.

  두레의 기원은 『삼국사기』에 ‘가위’에 관련된 내용에서 등장한다. “신라 유리왕은 이미 6부를 정한 후에 이를 2패로 나누어 왕녀 2명으로 각각 부내 여자들을 거느리도록 하여 7월부터 날마다 대부의 뜰에 모여서 길쌈을 하는데 밤늦게야 일을 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전래의 직파(直播) 대신 모를 길러 논에 옮겨 심는 방법, 즉 이앙법이 보편화되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서로 협동으로 모를 심게 되면서, 두레의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두레는 각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명칭이 있다. 한반도 북부지방에서는 청천강 건답직파(乾畓直播) 지역에서만 존재하는 ‘황두’, 제주도에서는 ‘수놀음’, 그 외에 지역에 따라 돌개김·향두·목청(牧廳) 등이라 불리었다. 또한 조직의 규모에 따라서 동두레·두레, 일감에 따라 농사두레·길쌈두레 등으로 나뉘어졌다.

 

‘우리’라는 공동체를 이끈 두레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에는 단순히 서로 대하고 있는 ‘너와 나’라는 둘 이상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시간적, 공간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가진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우리’라는 용어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 가족, 우리 아버지, 우리집 등 심지어 자신의 아내까지도 ‘우리 아내’라고 소개를 할 정도로 ‘우리’라는 의식이 생활의 도처에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은 두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초기에는 농사일이 워낙 힘들어 힘이 센 장정들로 회원이 구성되어 연약한 어린이나 여자들은 두레에 참석 할수 없었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회원의 구성은 전체 통솔자인 행수(行首) 또는 황수라고도 하는 지휘자 1명, 행수의 보좌역인 도감(都監) 1명, 또 수총각(首總角), 조사총각, 유사(有司)서기, 방목감(放牧監) 등 각각 1명으로 되어 있다. 행수와 도감은 그 지휘자적 지위로 인하여 자작농민 중에서 인망과 능력이 있는 자를, 그 외에는 소작농이나 머슴 중에서 선출을 하였다. 회원의 임기는 1년이지만 아무런 사고가 없으면 중임(重任)하게 되는데, 주로 참여하는 농사일은 모내기·김매기·벼베기·타작 등 농사 전체 과정에 걸쳐서 행하였다. 후일에 마을의 부녀자들도 밤중에 한 장소에 모여 공동으로 길쌈하는 일을 통해 두레에 참여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농사철에 두렛일로 김을 맬 때 농악놀이(두레굿)를 하였는데, 악기를 잡은 이가 선두에 서서 소리를 잡으면 일꾼들은 소리를 받으면서 일을 해나갔다. 두레패들은 일을 마치고 노래(민요)를 부르면서 마을을 돌고 농기(두레기)를 세워놓고 풍물판을 벌였다. 두레풍물은 김매기를 마치고 바로 하는 것이지만 놀이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특정한 날을 정해 행하게 되었다. 대개 그 시기는 백중이나 칠월 칠석 때가 된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두레

 

  두레는 일제 말기의 전쟁준비로 인한 노동력 고갈, 6·25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 근대화로 인한 산업화·공업화 등으로 존폐 위기를 맞이하면서 그 전형적인 형태는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 내부의 근본 정신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실례로, IMF시절 국채를 갚기 위해 온 국민이 동참한 ‘금모으기 운동’이나 새마을 운동이 그것이다.

  더욱이 2007년 서해안 원유 유출사고 발생 이후 수백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보여준 모습에서 두레의 정신이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사고 후 지역 주민은 물론 수능을 마친 학생부터 시민단체, 휴일을 반납한 직장인과 자영업자까지 자발적으로 힘을 합쳐 복구작업을 빠른 시일 내에 마쳤다.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자, 이미 원유 유출 사고를 경험한 바 있는 캐나다와 일본의 해양 오염 전문가들은 그 사실을 확인하고 경탄했다고 한다.

  두레, 지금은 그 전통적 형식이 사라져가고 있으나 그 협동정신의 미덕은 실천의 진리로 남아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음은 실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순진리회요람』에서 “남을 잘 되게 함은 상생대도의 기본원리요, 구제창생의 근본이념이라. 남을 위해서는 수고를 아끼지 말고 성사에는 타인과의 힘을 합하여야 된다는 정신을 가져 협동생활에 일치 협력이 되게 하라.”는 내용은 두레가 가지고 있는 협동정신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해준다.

  우리 전통의 두레를 통해 다시 확인하는 협동정신의 미덕, 잊지 말아야 할 수도와 삶의 진리가 아닌가 한다.

 

참고자료

• 『대순진리회요람』
• 『삼국사기』
• 주강현,『두레, 농민의 역사』, 들녘, 2006
• 주강현,『한국의 두레 1』, 집문당, 1997

 
《대순회보》 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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