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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3.09 조회1,4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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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한글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했다. 그러나 한자(漢字)가 주된 문자였던 시절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막연히 ‘언서(諺書)’, ‘언문(諺文)’, ‘반절(反切)’로 불리어졌다. 그리고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야 비로소 ‘국서(國書)’, ‘국문(國文)’으로 불리게 되었고 또한 ‘조선글’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이 지은 것으로 왕, 수장, 우두머리, 하나, 크다, 바르다, 훌륭하다를 뜻하는 고유어 ‘한’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한글은 한나라의 글, 큰 글, 온 겨레가 한결 같이 써온 글, 세상에서 첫째가는 글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는 어떠했을까. 물론 이때도 우리말은 있었다. 단지 우리말을 표기할 적절한 문자가 없었을 뿐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에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해 사용된 ‘향찰(鄕札)’과 ‘이두(吏讀)’는 한자(漢字)가 주된 문자인 상황에서 우리말을 온전히 표현하는 데 분명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말을 올바로 표현하는 글자를 만들어 우리 민족의 언어생활을 온전하게 만든 것, 그것이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이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한글은 그 유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글자이다. 그리고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한글은 소리와 문양이 일치하는 글자로 문자 발달의 최고단계에 있으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언어학적 사치(that is unparalleled grammatological luxury)”라고 일컫는 학자들이 있을 정도이다.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한글과 같이 우리말을 기록하는 표음문자(表音文字)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려한 것은 그 시도의 하나였다. 그러나 뜻 글자였던 한자는 우리말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같은 한자를 두고도 지방에 따라 달리 읽음으로서 소통상의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표준 한자음의 제정이 무엇보다도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도 우리글의 필요성이 끊임없이 요구된 것이었다.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가장 정확한 기록은 1940년대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이다. 이 책의 서문(序文)은 한국인이라면 한번쯤은 들었을 내용이다. 그리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기도 하지만 ‘백성에게 正音(바른 소리)을 가르치다’로도 해석된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漢字]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漢字를 모르는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펼 수 없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불쌍히 여겨서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이 기록과 『세종실록』을 보면 훈민정음은 1443년(세종25) 음력 12월에 세종대왕(世宗大王)이 만들었다. 이렇게 훈민정음은 탄생일과 만든 사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글자이다. 또한 “문자를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서 만든다.”는 탄생배경은 당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사를 보면 문자는 그 자체로 권력의 상징이자 통치의 도구였다. 문자의 독점은 권력의 독점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문자를 공유하고자 했다고 한 것은 그 자체로 시대를 앞선 이상(理想)이었다. 훈민정음에는 이처럼 문자를 공유하여 통치의 대상이 되는 일반 백성과 같이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고자 했던 세종대왕의 이상이 녹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훈민정음은 다음의 세 가지 시대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문자였다.

  첫째. 순수한 국어의 표기

  둘째. 개정된 우리 한자음의 완전한 표기

  셋째. 외국어음의 정확한 표기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가장 강력한 반대를 표명한 최만리(崔萬理)는 지위가 집현전 부제학으로 당시 대표적인 학자였다. 중국 중심의 사고가 일반적이던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문자의 창제는 ‘이적(夷狄)의 일’이었다.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은 없사옵고, 오직 몽고(蒙古), 서하(西夏), 여진(女眞), 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세종은 “너희들이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四聲) 칠음(七音)과 자모가 몇이냐?”며 이러한 반대를 일축하였다. 당대 최고의 학자들 앞에서 이 정도의 언명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세종이 군주이면서 또한 최고의 언어학자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세종은 신하들의 계속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이 옳다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종의 새 문자 보급을 위한 노력은 『동국정운(東國正韻)』과 같은 운서(韻書), 『농사직설(農事直說)』 같은 실용서적, 불경, 유교 경전 등의 발간과 훈민정음이 관리 임용 시험의 과목으로 활용됨으로써 표출되었다.

 

한글의 제자(制字) 원리(原理)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이 발견되기 전 한글 자체(字體)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 이론들을 보면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기원설, 몽고자(蒙古字) 기원설, 고대(古代) 문자 기원설, 역리(易理) 기원설, 창문 상형설 등이다. 이렇게 다양한 이론들이 나타난 것은 한편으로는 한글의 독창성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다른 문자들이 사물의 모양을 보고 만든 데 반해 한글은 발음기관을 본 따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음양오행의 이치를 적용한 디자인으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새 글자가 만들어졌다.

  글자를 읽는 방식에 있어서도 당시 음운학(音韻學)의 최고 수준에 있다고 평가되던 중국을 뛰어 넘은 것이었다. 중국 음운학은 글자의 소리를 초성 + (중성+종성)으로 파악했는데 이렇게 글자를 읽는 방식을 반절(反切)이라고 한다. 東을 예로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東德紅切. 동은 덕의 ㄷ과 홍의 ㅗ+ㅇ을 합쳐 읽는다는 식이다. 이에 반해 한글은 초성+중성+종성의 체계로 ㄷ + ㅗ + ㅇ 이다.

먼저 초성(初聲)인 자음은 제자해(制字解)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초성은 17글자인데 어금닛소리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꼴을 본뜨고, 혓소리 ㄴ은 혀가 윗잇몸에 붙는 꼴을 본뜨고, 입술소리 ㅁ은 입 모양을 본뜨고, 잇소리 ㅅ은 이의 모양을 본뜨고, 목소리 ㅇ은 목의 모양을 본떴다.

 

  초성은 발음기관의 모습을 본뜨고 이 다섯 글자를 기본으로 획을 하나씩 더하여 아홉 글자를 만들었다. 여기에 ㄹ ㅿ ㅇ을 포함하여 17자이다.

다음으로 중성(中聲)은 이른바 天(·), 地(ㅡ), 人(ㅣ)을 기본으로 하여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8글자를 합하여 11글자를 만들었다. 점을 찍는 원리는 음양의 이치에 따랐다. ㅡ, ㅣ의 위쪽과 바깥쪽은 양의 이치로 ㅗ, ㅏ가 되고 아래와 안쪽은 음의 이치로 ㅜ, ㅓ가 되는데 글자의 느낌도 차이가 난다. 예를 들면 환하다, 밝다와 어둡다, 우울하다는 의미도 그렇지만 느낌도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종성(終聲)은 초성을 다시 썼다. 이렇게 낱자 28자와 성조(聲調)를 나타내는 방점(傍點)이 따로 있었으나 지금은 ㅿ, ㅇ, · ,ㆆ 네 글자와 방점이 사라져서 24자가 되었다. 이와 함께 모아쓰기를 하였는데 이것은 한자와 어울려 썼을 때 한자의 꼴과 균형이 잡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글이 걸어 온 길과 미래

 

  한글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창제 당시부터 학자들의 반대에 직면하였다. 그 당시 이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 글자하면 당연히 한자(漢字)였다. 그리고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는 지식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동안 한자의 보조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꾸준하게 보급되었고 오히려 한자교습 과정에서 필수 교재 역할을 하였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훈민정음 창제의 목적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었으나 꼭 그들에게만 전파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대부 계층에서 먼저 “쉽게 익혀 날로 썼으며” 그들의 자녀들과 여성들에게도 권장되었다. 이는 궁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궁중에서 만들어진 궁서체(宮書體)는 한글의 아름다움과 품격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다가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나랏글 즉 국문(國文)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고종(高宗)은 칙령(勅令) 제1조로 국문 사용에 대해서 규정하였다. “법률명령은 다 국문으로 본을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며 혹 국한문을 혼용한다.” 실로 창제 후 450년만의 일이다. 이후 1908년 한글학회의 전신인 “국어연구학회”가 주시경에 의해서 설립되고 ‘한글’이라는 명칭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는 우리의 말과 글에 관한 큰 시련기였다. 1942년 일제는 『조선말 큰 사전』 간행을 준비하던 조선어학회 회원과 그 관련자 48명을 잡아들여 혹독한 고문을 자행하고 투옥했다. 당시 재판의 결정문을 보면 “고유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한 형태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희생자도 생겼다.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된 인사들 중 이윤재와 한징이 1943년과 1944년 연달아 옥사(獄死)하였다.

  이렇게 한글이 걸어온 길은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한글은 디지털 시대에 그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디지털은 0과 1의 계속적인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글의 구성도 이와 같다. 자음과 모음이 0과 1처럼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속성으로 한글은 입력속도 면에서 다른 글자들 보다 분명 우위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디지털 시대 한글의 경쟁력이다.

  이른바 손가락으로 수다를 떤다고 하는 엄지족들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도 한글이 가지고 있는 특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핸드폰을 보면 한글의 제자원리로 입력하게끔 되어 있고 이런 측면에서는 세계 그 어떤 문자도 한글을 따라 올 수 없는 것이다. 이를 두고 세종대왕께서 디지털 시대를 염두에 두시고 만들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또한 디자인 측면에서도 그 우수성이 입증되고 있다.

  인터넷에 올려진 한 장의 사진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영국의 유명가수가 입고 있는 옷에 한글이 새겨져 있는데, 그 글을 보면 신흥호남향우회. 이를 보고 웃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그러나 이 옷은 아주 유명한 디자이너의 작품으로 그는 2002년 월드컵에서 본 한글에 영감을 얻어 제작했다고 한다. 이는 한글이 디자인이라는 면에서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과거 우리도 뜻 모를 영어 티셔츠를 입고 다녔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런데 이제 한글로 된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외국인들이 있는 것이다.

  비록 추진과정에서 중지되었지만 2004년 동티모르는 한글로 자국의 말인 “떼뚬”을 표기하려고 하였던 적이 있다. 이른바 ‘떼뚬 · 훈민정음 연결 프로젝트’이다. 이 계획이 무산되지 않았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말은 있는데 문자가 없는 사람들에게 한글은 하나의 표기수단으로 제공되고 있고 이는 진행형이다.

  그리고 세계 최저 수준의 문맹률은 한글이 없었다면 불가한 일이다. 한국 정부의 제의에 따라 1990년 유네스코는 문맹퇴치사업에 공이 큰 개인이나 단체를 뽑아 시상하는 문맹퇴치 공로상을 제정했다. 이름 하여 세종대왕상[世宗大王賞, King Sejong Prize].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서문에 표방하신 “문자를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날로 쓰는 데 편한 문자를 만들고자 했다.”는 생각은 현재의 인류에게도 퇴색되지 않는 이상(理想)이다.

  끝으로 요즘의 강조되고 있는 영어교육에도 한글의 중요성은 오히려 부각된다. 우리말과 글에 대한 지식 없는 영어교육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영어교육을 전공한 학자들조차 영어교육은 우리말과 영어의 이종경기라고 표현하고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국어구사 능력을 바탕으로 영어능력이 향상될 수 있으며 반대로 영어라는 외국어 공부가 한국어 능력 향상에 좋은 자극제가 되면서 선순환적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말로 된 문화를 수출하는 나라로서 우리말이 이른바 ‘경쟁력’에 저해가 된다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무지는 척결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말보다 영어가 더 강조되는 시절이 되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하던 이야기도 이미 옛 이야기가 된 듯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우리말과 글이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이들의 간절한 염원과 희생의 결과물은 아니었을까?

  우리의 말과 글은 우리의 얼이다. 한국인이라면 한글을 읽고, 쓰는 데 지장이 없어야 진정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대순회보》 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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