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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종이 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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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3.09 조회1,6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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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석가탑 사리함에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두루마리에 싸인 채 발견되었다. 이 다라니경은 한지에 목판으로 찍은 것으로, 1200년 동안 습기찬 석탑에서 있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종이 상태가 좋았다. 이렇게 보존상태가 좋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두루마리의 지질(紙質)이 한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종이는 어떠한가? 책을 쓴 저자가 살아있을 동안에도 종이의 색이 누렇게 변한다던지 종이에서 냄새가 나게 마련이다. 이에 비하면 1200년 동안 어둠속에 있었음에도 변하지 않는 한지의 우수성은 놀라울 따름이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의 제지 기술로 만든 한지가 천년이 넘는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신비로운 비밀의 열쇠는 무엇인가.

 

한지(韓紙)의 역사 01

 

  “종이는 천년을 가고 비단은 오백년을 간다”는 말처럼 어둠속에서 천년의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한지는 바로 한민족의 끈기를 드러내주는 문화유산인 것이다. 이러한 한지는 언제부터 만들게 되었을까?

  일반적으로 종이는 AD 105년 후한(後漢) 시대의 궁중물자 조달관인 채륜이 나무 껍질, 마, 창포, 어망 등 식물 섬유를 원료로 하여 최초의 종이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전한(前漢)시대의 유적에서 다수의 종이가 출토되어 채륜 시대보다 200여 년 전에 이미 종이가 만들어진 것이 밝혀져 종이의 기원은 BC 2세기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따라서 종이의 발명가로 알고 있는 채륜은 제지술의 개량자로 다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고구려의 불교 전래 시기(AD 327년 소수림왕 2년)를 근거로 AD 4세기경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1963년~65년 평양에서 영시(永始) 3년(BC 14년)이라는 연대기가 있는 양산대와 종이조각이 묘에서 출토됨으로써 한반도의 종이 기원은 중국의 종이 기원(BC 180~142)보다 1~1.5세기 늦은 시기로 다시 보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 전래된 종이는 우리 고유의 독특한 한지 제조술을 통해 천년이상 가는 종이로 발달하게 되었다.

 

천년의 비밀

 

  보통 종이의 원료로 나무껍질이나 솜, 마가 주로 사용됐다. 02 그러나 마()섬유로 된 종이는 필기하는 데 껄끄러운 감이 있고, 종이의 원료공급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은 다른 종이 재료를 찾게 되었고, 이에 발견한 것이 닥이었다.

  천년이라는 세월 동안 삭지도, 썩지도 않는 우리의 한지.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질 좋은 닥나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닥나무를 자근자근 두드려 원료를 얻어 다시 그 원료를 가둠틀 없이 전후좌우로 자유롭게 흘려보내는 독특한 제조기법과 세계 최초로 고안한 가공기법인 도침 03 이 있었기에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면서도 질긴 특성을 가진 한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한지는 외부에서 전래된 지식을 우리 고유의 문화로 발전시킨 선조들의 지혜를 담고 있는 것으로 종이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서 조차 한지를 조공품으로 원했을 만큼 그 품질면에서 인정을 받았다. 04

 

한지의 우수성 05

 

  서양문명의 자존심인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이용해 찍은 성경은 발간된지 550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현재 열람조차 할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천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한지로 만든 인쇄물을 아직까지 박물관에서 열람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조상들이 만든 한지가 얼마나 뛰어난 것임을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이처럼 한지는 질기고 수명이 길다는 것 외에도 보온성과 통풍성이 매우 뛰어나다. 옛날, 겨울철 찬바람을 오직 한겹으로만 막아 우리를 따뜻하게 해준 것이 바로 한지였다. 한지를 창과 문에 발라서 사용한다고 해서 창호지 또는 문종이라고도 했다. 창호지는 한지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분야 중 하나로 방안의 온도와 습도까지 자연적으로 조절해준다.

  온돌에 장판을 깔고 생활했던 우리의 주거생활은 방안에 습기가 많은 것이 문제점이었다. 그러나 한지를 사용함으로써 습기를 자연적으로 배출시켜 쾌적한 생활공간을 만들수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지는 바람과 빛을 통과시키고 습도를 조절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습기가 많으면 그것을 빨아들여 공기를 건조하게 하고, 공기가 건조하면 습기를 내뿜어 알맞은 습도를 유지하게 하는 신축성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창호지를 흔히 살아 있는 종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의 지혜로 만든 한지가 이처럼 자연현상에 순응하는 성질은 모두 자연에서 얻는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항상 새로운 것만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삶으로 인해 우리 조상들의 우수한 문화유산인 한지는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다. 얼마전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숭례문 화재 사건을 보면서 많은 분들이 통곡하는 장면을 뉴스를 통해 보았을 것이다. 우리 곁에 있을 땐 그렇게까지 관심을 쏟지 못했던 것이 사라지고 난 후, 그 소중함에 대해 절실히 느꼈던 것을…, 한지 역시 우리 조상들이 남겨 놓은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 그 소중함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켜나가기 위해 온고지신(溫故之新)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01 최태호, 『「한」브랜드화 정책포럼 자료집』 「한지, 멋과 산업의 조화」, 문화관광부, 2005, pp.127~129 참조.

02 돈황 석실과 신강에서 출토된 당나라 이전의 종이 80% 이상이 마지였으며, 민간에 전해진 당나라 이전의 서예·회화에 쓰인 종이도 대부분 마지였다. 따라서 채륜이 종이를 개량할 당시에도 마는 주요한 종이 원료임을 알 수 있다. (조병묵, 『중국제지기술사』, 광일문화사, 2002, p.54 참조.)

03 우리 조상들은 한지의 질을 더욱 높이기 위한 비법으로 마무리 공정에서 풀칠을 한 종이를 여러장 겹쳐놓고 디딜방아 모양의 도침기(砧機)로 골고루 내리치는 공정으로 우리 조상들이 세계 최초로 고안한 종이의 표면 가공기술이다. (김병남, 『종이의 전래와 한지의 발달』,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04, p.269 참조.)

04 송나라부터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고려나 조선 사신들이 들고가는 선물이 ‘종이’와 ‘청심환’이었다는 것은 그만큼 명성이 나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규태, 『한솔종이박물관 이야기』, 국립민속박물관, 1997, p.10 참조.)

05 이종호, 『과학이 있는 우리문화유산』, 북21 컬처라인, 2001, pp. 291~292 참조./ 조현진, 『「한」브랜드화 정책포럼 자료집』「한지의 상품화 및 실용화 방안」, 문화관광부, 2005.

 

   

《대순회보》 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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