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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논단대순사상에 나타난 해인(海印)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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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지 작성일2019.03.27 조회4,1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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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4 방면 교정 김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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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한국사회에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신종교(新宗敎)들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부터였다. 당시는 조선사회에 내재된 모순이 심화되고 여기에 덧붙여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충격이 가중되는 시기였다. 이 때 이러한 시국에 대처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대응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던 유교주의를 수정·보완하려는 보유론적(補儒論的) 관점과 기존의 유교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가치체계로 대체시키려는 종교운동의 입장이 그것이었다.01 한국의 신종교는 바로 후자의 입장에서 사회체제에 내포된 계급모순과 제국주의로 야기된 민족모순을 비판하며, 민족이 당하는 수난과 고통을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과정에서 배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신종교는 수백 개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방대한 수효만큼 독창적이고 다양한 종교 활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한국 신종교의 교리 체계를 살펴보면 주요한 공통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종교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가치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동일한 역사적 체험과 문화적 유산을 바탕으로 발생하였으며, 현실 사회질서에 대한 민중의 태도와 종교에 대한 그들의 욕구가 동일하였기 때문으로 해석될 수 있다.02 유교적 가치에 의해 단일체제를 유지해 오던 조선 사회가 후기에 이르러 다양한 종교운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처럼, 신종교가 공유하는 공통분모는 필연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본 논문에서 논의할 해인(海印) 신앙 또한 신종교의 공통분모로서 발견되는 종교 현상의 하나로 주목된다. 해인은 후천개벽이라는 변혁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는 구원의 상징이자 성스럽고 신비한 보물로 믿어졌다. 특히 상제님을 신앙하는 증산교단에서는 해인이 실물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무형의 상징적인 것인지에 대한 논란과 함께 다양한 믿음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일각에서는 이러한 신앙을 토대로 해인의 실체를 확신하고 실물(實物)을 찾으려는 노력이 지금도 상당수 이어지고 있어 해인 신앙이 최근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해인에 대한 관심과는 달리 해인이 무엇이며, 어떠한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이해할 만한 수준의 설명체계를 갖추지는 못하고 있다. 단지 김탁에 의한 일련의 연구 성과03와 도주님의 해인관을 중심으로 접근한 차선근의 연구04 가 있을 뿐이다.05 이러한 이유는 해인이 회자되는 것과는 달리 그 전거(典據)가 상대적으로 미미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상제님께서 “나를 잘 믿으면 해인을 가져다주리라”는 유일한 언설만을 했을 뿐 그에 대한 구체적 부연을 하지 않음에 따라 수많은 교파들의 자의적 이설(異說)들이 분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해인이 회자되는 것과는 달리 그 전거(典據)가 상대적으로 미미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상제님께서 “나를 잘 믿으면 해인을 가져다주리라.”06는 유일한 언설만을 했을 뿐 그에 대한 구체적 부연을 하지 않음에 따라 자의적 이설(異說)들이 분분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인신앙은 조선조 후기의 민간신앙을 비롯하여 특히 한국 신종교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그 출처는 한국불교의 『화엄경(華嚴經)』으로까지 소급된다. 또한 여러 지역의 설화로서 보편적으로 퍼져 오랜 신앙의 형태로 면면히 계승되어 왔다. 이러한 점을 착안하여 Ⅱ장에서는 김탁의 선행 연구를 토대로 해인신앙의 전개와 그 양상을 추적하기로 한다. 이를테면 1장에서는 해인의 문헌적 출전과 그 출전에서 가지고 있는 원의(原意)를 불교사의 흐름과 관련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나아가 2장에서는 해인신앙의 체계화가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해 민간 전승의 과정을 이해하며, 한국 신종교의 교리체계 안에서 다양하게 변용되고 믿어지는 양상을 3장에서 고찰해 보겠다. 이러한 사전적 이해를 토대로 Ⅲ장에서는 대다수 증산교단의 해인에 대한 믿음과 달리 해인의 의미를 물건이 아닌 조화 능력으로 해석한 도주님의 창조적 해석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차선근의 선행 고찰을 전제로 하여 신물이 아닌 장중이라는 독특한 해석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을 1장에서 확인하기로 한다. 이어 2장에서는 도주님께서 여타 교단의 전통적 해석과 대별되는 입장이 도주님만의 독창적인 종교체험과 그것에 기반을 둔 상제님의 신격(神格) 이해로 생겨났다는 점을 착안하여 접근하기로 한다. 나아가 신물이 아닌 장중으로서의 해인은 상제님에 의해 주어지게 되고, 해인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바르고 진실 된 일심 수도에 임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으로 연결하여 대순사상의 독특한 해인관을 제시해 볼 것이다.


  해인신앙의 유래에 대해 고찰하고 해인에 대한 신앙이 어떠한 경로로 전개되어 왔으며, 그 의미가 변용되는 일련의 양상을 추적하는 작업은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을 비롯하여 신종교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주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도주님에 의해 주창된 해인에 대한 창조적 해석은 여타의 증산교단과 대별되는 대순사상의 특질에 다가서는 초석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Ⅱ. 해인신앙의 전개와 양상 


  
  한국 종교사에서 해인신앙은 면면히 이어져 왔다. 『화엄경』이 한역(漢譯)되면서 해인이라는 용어가 조합된 이후, 해인은 대승불교의 중요한 사상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후 해인은 성물로 인식되는 오랜 신앙적 변용의 과정을 거치면서 『임진록』에서는 우리민족을 왜적으로부터 구원해줄 민중 의식으로 표출되었다. 더욱이 조선조 후기에 태동한 한국 신종교의 교리체계에서는 말대에 발생할 엄청난 병겁을 구원해 줄 성물로 믿어지며 중심적인 신앙의 하나로 자리매김 하였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화엄경』에 보이는 해인의 의미와 해인신앙의 발생을 살펴보고, 이어서 한국 신종교에 수용된 해인신앙의 양상을 고찰하기로 한다. 

 


1. 한국불교의 해인신앙


  해인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바탕으로 믿어져 온 성배(聖杯)나 모든 소원이나 소망을 뜻대로 이루어지게 해준다는 여의주처럼 오랫동안 믿어지고 전해져 오는 한국의 대표적인 보물 가운데 하나이다. 해인에 대한 믿음은 비교적 일관된 맥락을 가지고,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전승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동일한 내용을 갖는 설화가 광범위한 지역에서 채록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는 곧 해인신앙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진 보편적인 이야기의 하나였음을 의미한다.07


  김탁은 해인과 관련된 일련의 설화군을 분석하여 해인설화의 기본내용을 유형화 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원래는 바다 속에 있었던 보물로서 모든 일을 마음대로 행할 수 있는 해인에 대한 이야기”08 로 정의하였다. 그는 특히 해인설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화소들이 해인사(海印寺)라는 불교적 건축물과 관련되어 이야기됨에 주목하여 한국불교와의 일정한 관계성을 지적하였으며, 이를 착안하여 해인의 전거(典據)를 불교의 『화엄경(華嚴經)』에서 찾았다.


  해인은 본래 『화엄경』에서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해인은 해인삼매(海印三昧)·해인정(海印定)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하실 때 드신 경지를 지칭한다. 부연하면, 해인삼매는 바다(海)에 온갖 사물이 남김없이 찍힐(印) 정도로 높은 경지의 삼매(三昧)로 해석될 수 있으며, 해인정은 “바다(海)에 모든 삼라만상이 비치는 것 같이(印), 번뇌가 끊어진 부처님의 정심(定) 가운데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법이 명랑(明朗)하게 나타남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토대로 해인은 일체의 사물이 거울 가운데 비춰진 색상과도 같이 부처님의 심중에 남김없이 현현하였다는 깊은 선정의 경지를, 넓은 바다(海)가 모든 사물을 인현(印顯) 하듯이 비춰내는 일에 비유한 것이다.09 


  그런데 한반도에 불교가 유입되면서 『화엄경』이 유포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해인에 대한 독특한 인식과 믿음이 발생한다. 불교적 용어인 해인이 불타(佛陀)의 정법(正法)을 상징하는 개념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물건으로 상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결정적인 사건은 신라의 의상(義湘, 625-702)이 『화엄경』의 요체를 독창적인 도상으로 그려 「법계도(法界圖)」를 작성한 일이다.10 일명 「해인도(海印圖)」라고도 하는 「법계도」는 그가 당(唐)에 유학하여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의 지엄법사(智儼法師)의 강석(講席)에서 화엄경을 연구할 때, 지엄법사가 해인 72개를 그려서 제자들에게 보여준 것을 의상이 그것을 보고 총괄적으로 한 개의 해인을 따로 만들어 지엄법사에게 바친 것이다.11 이 도상은 전체적으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중심의 ‘법(法)’자에서 시작하여 역시 같은 중심의 ‘불(佛)’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54개의 각을 이루면서 210자가 한 줄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불법의 영원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상징을 통하여 깊은 뜻을 간추리고 간결하게 표현하기를 선호하는 한국적인 전통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의상의 법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통성을 보장받기 위해 그에게 법계도인(法界圖印)을 받았다는 주장이 와전되면서, 점차 해인이 특별한 물건 또는 보물로 믿어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9세기 초에 이르러 의상의 법맥을 이은 순응(順應)에 의해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사찰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해인사(海印寺)가 창건되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은 일반인에게도 친근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성스러운 종교 건축물과 연관된 해인은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의 교리적인 개념보다는 그 신비한 조화력이 더욱 부각되었고, 결국은 일반인의 상상력과 결부되면서 후대에 이르러 구체적인 실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해인사에는 해인이라는 성스러운 보물이 보관되어 있다고 믿어졌으며, 삼매의 경지를 수식하는 형용사에서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조화력을 지닌 물건으로 점차 알려진다.


  실제로 해인이 실물로 주조되어 해인사에 보관되었던 적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석문의범(釋門儀範)』에 기록되어 있다.12 이 기록을 통해 최소한 1931년 이전의 어느 시점에 해인사에는 주물로 만든 해인이 엄연히 존재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석문의범』의 편집자인 안진호는 해인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했으며, 최기남이라는 불교신자가 해인사에 해인이 없다는 사실을 아쉽게 여겨 자신이 직접 해인을 만들어 해인사에 봉안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해인은 “바람과 비를 부르고, 산을 옮기고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술법이 내재한 신기한 보물”이었던 것이다.


  이제까지의 고찰을 통해 『화엄경』에서 유래한 불교용어로서 해인이 그 진수를 파악하여 독창적인 도인(圖印)으로 형상화시킨 의상의 「법계도」를 통해 하나의 신앙으로 출발하였고, 의상의 제자들에 의해 종맥(宗脈)을 상징하는 구체적인 실물의 형태로 믿어졌으며, 해인사가 창건된 일에 연유하여 점차 일반인들에게까지도 매력적인 보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어서 다음 장에서는 민간 전승과정을 추적하여 해인신앙이 보다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보물로 자리매김 되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2. 민간 전승의 해인신앙


   해인이 신묘한 보물이라는 구체적인 이야기로 정착된 것은 『임진록(壬辰錄)』의 여러 이본 가운데 하나인 『흑뇽일긔(黑龍日記)』이다.13 『흑뇽일긔』에서 해인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휴정(休靜; 西山, 1520-1604)대사가 묘향산에 공부에 진력하다가, 그 산에서 나는 옥석을 구해 “천지조화와 음양오행과 일월도수(日月度數)와 강산정기(江山精氣)와 둔갑장신(遁甲藏身)하는 법을 모아 새긴 물건”으로 묘사된다. 


 『흑뇽일긔』에서 휴정대사는 왜국에 가서 항복을 받고 조공을 받아오라는 임금의 명을 받아, 팔만대장경 책판 속에 감추어두었던 ‘해인’과 ‘대탈’을 가지고 혼자서 왜국으로 건너간다. 휴정대사는 왜국으로 가면서 천지와 음양의 이치에 응해 자신의 이름을 사명당(四溟堂)으로 고친다.14 묘향산의 옥석으로 만든 ‘해인’과 한라산 정상의 대나무로 만든 고깔인 ‘대탈’을 지닌 사명당은 왜국의 수도인 경도(京都)를 수중(水中)에 함몰시켜 마침내 왜왕 수길(秀吉)의 항복을 받아낸다. 여기서 사명당은 해인의 조화력에 의해 불과 한 달 만에 일본왕의 항복을 받아온 것이다. 이 후 사명당이 일본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신비한 조화력을 발휘한 해인은 훗날 다시 한 번 사용될 날을 기다리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경판 속에 감추어진다.


 『임진록』은 임진왜란이 사실상 우리나라의 참담한 패배로 끝을 맺자, 당시 전란을 체험하였던 일반 민중이나 그 후손들이 민족의 수난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전망을 제시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평가된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해인신앙은 바로 도술이야말로 난국을 해결해 나가는 가장 손쉬운 방편이 될 것이라는 민중의 바람에 부응하여 『임진록』의 소재로 사용되었다. 현실적으로 패배한 패전의 역사를 허구적 전승사(戰勝史)로 꾸며, 처참한 패배에 대한 정신적 보상을 얻으려는 심리가 반영되었던 것이다. 즉 나라를 구할 수 있는 해인과 같은 보물이 있었더라면 임진왜란과 같은 참혹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당시 민중들의 희망이 결집된 원망체(願望體)였다.


  해인신앙은 민간에 면면히 이어져 『정감록』이나 『격암유록』과 같은 민중예언서에서 그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조만간 이 땅에 출현할 민중적 영웅인 진인(眞人)이 가지고 올 보물로 믿어진다.


 『정감록』은 난세에는 풍수설에 따라 지정된 피난처에서만 지복(至福)을 누릴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정씨(鄭氏) 성을 지닌 진인이 출현하면 이씨 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주장을 요체로 하고 있다. 하지만 『정감록』에 해인이라는 용어가 직접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정감록』의 ‘진인출현설’이나 ‘남조선신앙(南朝鮮信仰)’과 관련된 내용의 이면에 해인신앙의 면모가 확인될 뿐이다.15 『정감록』과는 달리 『격암유록』에서는 해인의 용례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특히 남해(南海)에서 진인이 나올 것이라는 『정감록』의 내용이 『격암유록』에서는 남해에서 진인이 해인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는 내용으로 확장된다. 이는 하나의 단편적인 예이지만,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해인신앙이 지속적으로 재창조되고 있음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격암유록』이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전체가 조작된 위서(僞書)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6 설령 『격암유록』이 위서라고 하더라도 나름대로 미래의 일이나 길흉화복을 예언한 서적임은 분명하다. 이는 관점을 달리해 보면, 『격암유록』의 위서논쟁은 차치하더라도 그 속에 해인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적어도 해인을 향한 민중의 대망의식과 시대적 요청에 대한 부응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해인신앙은 오랜 역사를 통해 한국 특유의 민간신앙을 이루면서 한국정신사의 기층을 이루었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사상 가운데 전개된 하나의 문화현상임에 틀림없다. 특히 보국안민(輔國安民)과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축으로 형성된 한국 신종교의 교리체계에서 해인신앙은 이제 한 개인의 기복을 위한 사사로운 보물이 아니라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엄청난 보물로 믿어진다. 온갖 고난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를 해인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 상등국으로 끌어올리고, 아울러 진정한 의미의 지상천국을 이 땅에 세울 것이라는 종교적 교리체계로 이어지는 것이다. 한국 신종교의 이러한 양상을 다음 장에서 열거해 보기로 한다.


  

3. 한국 신종교의 해인


  동포교(同胞敎)의 신자들은 교주 정인용(鄭寅鎔)이 해인을 소유하였다고 믿었다. 정인용은 도장 형태의 나무로 만든 해인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인을 장차 왕으로 등극할 진인이 가지는 특별한 도장이라고 믿었다. 그는 해인을 관직 임명서에 찍어 교도들에게 발급하면서 새 왕조의 관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되었다.17


  단군천조광명도덕보본회(檀君天祖光明道德報本會)는 한얼수도원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정효순(鄭驍橓, 1913-?)이 창교하였다. 그는 해인은 후천개벽에 나타나 민생을 구제한다는 인장(印章)이며, 해(海)는 三 + 八 + 母로 삼인모일인(三人母一印)을 합의한 문구라고 해석했다. 이는 세 사람의 어머니가 합하여 하나에 귀일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세 사람의 어머니는 공자, 예수, 석가의 도이며, 이들은 모두 단군신앙의 삼위일체사상으로 귀일한다고 풀이했다. 결국 그는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에 귀의하여 이화세계인 후천세계 지상천국을 건설한다고 주장했다.18


  단군대황전(檀君大皇殿)을 세운 박노철(朴魯哲, 1922-?)은 26세 때 꿈에 단군신명이 나타나 칼을 공중에 던지자 칼이 수만 조각이 되어 흩어졌는데, 그 파편이 땅에 떨어지자 다시 거두어 삼각(三角) 도장을 만들고 그의 손에 날인하면서 “이것이 해인이다. 나를 믿고 정성을 드리면 구제창생의 힘을 주겠노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19 


  용화대도(龍華大道) 지상천국건설원은 구원의 상징물로 해인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교주 임청림(林靑林)은 대전 근처의 식장산에서 50일 기도를 행한 끝에 인류구원을 뜻하는 물건인 해인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 교단에서의 해인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印)’을 뜻하며, 신분증과 같이 개인의 인격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뱃지 형태의 외해인(外海印)과 신분증 형식의 내해인(內海印)을 만들어 해인은 말세에 인류를 구원하는 상징적 물건으로서 이를 얻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20


  갱정유도회(更定儒道會)는 원래 일심교(一心敎)라고 불렸으며, 강대성(姜大成, 1890-1954)이 세운 교단이다. 그는 ‘해인경(海印經)’이라는 주문을 제시하고, 이 주문을 외우면 도통이 되어 조화를 임의로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갱정유도회의 신도들은 ‘해인경’을 하느님이 주신 신어(神語) 또는 천문(天文)으로서 여기에 온갖 조화와 진리가 들어 있다고 신봉하고 있다.21


  천지대안교(天地大安敎)의 교주 부경순(夫景順, 1900-1965)은 1949년부터 천령(天靈)께서 주신 해월선(海月仙)이라는 도호를 사용하였다. 해월선은 미륵불의 영체이자 용왕신이며 미륵불운(彌勒佛運) 5만년을 주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도참설에 정도령이 가지고 나온다는 해인이 다름 아닌 해월선의 ‘바다 해’자의 도술조화라고 설명하며, ‘해’자를 파자(破字)하면 삼인모(三人母)가 되는데 천지인의 삼재와 유불선의 삼교가 해자운(海字運)에 의하여 합일된다고 풀이했다.22


  승리제단(勝利祭壇)은 조희성(曺熙星, 1931-2004)에 의해 세워진 그리스도교 신종교로 박태선(1917-190)의 전도관에서 분파되었다. 승리제단에서는 『격암유록』의 십승지인(十勝之人) 정도령과 조희성이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며, 그 징표로서 감로해인(甘露海印)을 통해 밝히고 있다. 그들은 조희성이 행하는 수많은 설교에서 감로해인인 이슬성신이 내린다고 믿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야말로 진짜 정도령이라는 것이다. 또한 정도령인 조희성이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여 젊어지게 하고 죽지 않게 하는 기적들이 현재적 사건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선전하기도 한다.23 


  이 외에도 김창하(金昌河), 포산스님(尹飽山, 1901-1958), 야산(也山) 이달(李達, 1889-1958)과 그의 제자 대산(大山) 김석진(金碩鎭, 1928-현재) 등은 도장과 같은 실물로서 인식하고 자신들이 해인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거나 곧 등장할 것으로 예언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한국 신종교들은 해인이라는 보물을 가진 초월적 존재가 이 땅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믿음을 토대로 세상살이가 아무리 험난하게 전개되더라도 구원의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진인이 출현하여 혼란과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복락이 넘치는 사회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은 현실을 견딜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특히 증산교단에서는 말세에 발생할 병겁에 대비하는 신비로운 보물로서 해인에 대한 신앙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그 결과 다양하고 색다른 이견이 주창되고 있다. 따라서 증산교단의 면모를 살펴보는 것은 해인신앙의 일단을 이해하는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증산교단의 일반적인 견해와 차별화되는 해인에 대한 대순사상만의 창조적 해석과 비교해 봄으로써 증산사상과 대별되는 대순사상의 특질과 위상에 접근하고자 한다.

  


Ⅲ. 해인에 대한 대순사상의 해석 


  증산교단의 일반적인 해인에 대한 믿음과 달리 도주님께서는 해인의 의미를 물건이 아닌 자신의 장중(掌中)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셨다. 그 결과 실물로서 해인을 수수하거나 매수하는 형태의 해인신앙은 대순진리회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상제님을 친견하며 모신 친자종도(親炙宗徒)들과는 사뭇 다른 신앙형태를 정립한 종통계승자다운 면모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해인에 대한 도주님의 혜안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신물(神物)이 아닌 장중(掌中)의 해인


  차경석(車京石)이 창립한 보천교에서는 교인의 집에 녹표라는 것을 붙이게 했는데 이 녹표는 벼락 맞은 대추나무를 지폐만한 크기로 깎아 가운데에는 태을주를 새기고 사방에는 궁(弓)자를 이어 새기고 위쪽 양 귀퉁이에는 궁자를, 아래 두 귀퉁이에는 태극을 새기어 종이에 찍은 것이다 보천교에서는 이 녹표를 문 위에 붙이면 천지신명이 가가호호(家家戶戶)를 조사할 때 도가(道家)라 하여 보호해 준다고 하였다.24 


  안내성(安乃成)이 세운 선도(仙道)에서는 경면주사로 태을주를 쓴 다음, 이것을 의통이라 하여 쓴 지 3년이 지나면 효력이 없어지기 때문에 3년마다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5 


  한편 용화미륵불교의 교주 서승영(徐承永)은 상제님께서 괴질을 면하는 약장공사로 단주수명을 교인들에게 전했는데, 그것이 자신에게 전해졌다고 역설하였다. 아울러 그는 앞으로 괴질이 발생하여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될 때에 죽은 사람의 이마에 도장을 찍으면 소생하게 된다고 믿는 의통인패는 환인(桓因)이 환웅(桓雄)에게 준 천부삼인(天符三印)이라 주장하였다.26


  이처럼 대부분의 증산교단에서는 상제님께서 병겁이 온 세상을 뒤엎어 누리에게 참상을 입힐 때 구해낼 방책으로 강조하신 ‘의통’을 해인과 동일한 범주로 믿고 있으며, 해인이 의통에 포함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의통인패의 조작법은 각 교파에서 매우 신비하게 이야기되며 비밀리에 전수되고 있다. 왜냐하면 의통에 대한 이해와 실물로서의 제시는 은연중에 종교적 정통성을 계승하였다는 증거로 인식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례로 동화교(東華敎)의 개교과정을 볼 수 있다. 『대순전경(大巡典經)』에는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기 바로 전날 밤에 박공우(朴公又)를 은밀히 불러 의통인패에 대하여 그 제작법을 전하였고, 그것을 무진(1928)년 동지에 기두(起頭)하여 묻는 자에게 전하라고 기록하고 있다.27 이 기록과 관련하여 실제로 무진년 동지에 이상호(李祥昊)는 용화동에서 동화교를 개교하면서 종도 수십 인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하지만 박공우만이 참석하였고, 박공우는 수일 후에 다시 와서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기 전날 밤에 용화동에서 기두하는 자에게 전하라고 부탁하셨다는 전말을 남기고 이 때 인패(印牌) 한 벌을 전수하였다고 한다.28 이상호는 『대순전경』의 의통인패와 관련된 이러한 사실의 전말을 훗날 밝힌다.29 즉 상제님께서 박공우에게 전한 의통은 1928년 동짓날 동화교를 창립한 이상호에게 전해졌고, 이상호는 그 비밀을 간직하다가 1945년 10월에 공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진년 동지에 기두하여 묻는 자가 결국 이상호 본인이라는 주장을 자신의 저서인 『대순전경』을 통해 한 것이다. 우선 증산이 박공우에게 화천하시기 전날 밤에 남몰래 의통을 전수하였다는 주장 자체가 아무 증인이 없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혼자만의 주장일 뿐이며, 더욱이 상제님께서 무진년 동지에 이상호에게 전하라고 하였다는 주장은 의문점을 남긴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상호가 상제님의 종교적 정통성을 계승하였다는 유력한 증거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바로 공개하지 않고 1940년 박공우가 세상을 떠난 지 수년이 지난 1945년에 공개를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상호가 1945년에 그 사실을 발표했을 때 그것을 증명해 줄 유일한 증인인 박공우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결국 상식적으로 인패 전수의 사실성 여부와 그것을 이상호에게 전하라고 했다는 상제님의 전언 자체가 신뢰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 당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유포되었다. 이상호는 당시 박공우에게 의통을 전수받을 때 두벌을 만들어 각기 한 벌씩 나누었는데 이렇게 제작된 인패는 호신부(護身符)와 호부(戶符)로 대별된다. 호신부는 가운데 태을주를 찍은 지폐 크기의 한지에 왼편 위에는 태극 모양 안에 마테오리치의 자(字)인 ‘시헌(時憲)’을 새긴 인(印)을 찍고, 오른편 위에는 태극 모양 안에 상제님의 함자인 ‘일순(一淳)’을 새긴 인을 찍은 것이다. 그리고 호부는 호신부와 같은 크기의 한지에 가운데는 태을주를 찍고, 왼쪽 위에는 ‘무사태평(無事泰平)’을 찍고, 오른쪽 아래에는 ‘신장공우(神將公又)’를 찍은 것이다. 교인들은 호부는 집 방문위에 붙이고, 호신부는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30


  대다수 증산교단의 의통과 해인에 대한 믿음과 달리 도주님께서는 “상제께서 해인을 인패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여 어떤 물체로 생각함은 그릇된 생각이니라”고 하여 해인을 인패로서 이해하는 사람들의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이와 관련된 『전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주께서 해인사에서 돌아오신 다음날에 여러 종도들을 모아 놓고 “상제께서 해인을 인패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여 어떤 물체로 생각함은 그릇된 생각이니라. 해인은 먼 데 있지 않고 자기 장중(掌中)에 있느니라. 우주 삼라 만상의 모든 이치의 근원이 바다에 있으므로 해인이요, 해도 진인(海島眞人)이란 말이 있느니라. 바닷물을 보라. 전부 전기이니라. 물은 흘러 내려가나 오르는 성품을 갖고 있느니라. 삼라 만상의 근원이 수기를 흡수하여 생장하느니라. 하늘은 삼십육천(三十六天)이 있어 상제께서 통솔하시며 전기를 맡으셔서 천지 만물을 지배 자양하시니 뇌성 보화 천존 상제(雷聲普化天尊上帝)이시니라. 천상의 전기가 바닷물에 있었으니 바닷물의 전기로써 만물을 포장하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31 

 


  위의 구절에서 도주님께서는 해인을 인패라고 믿는 증산교단의 주장을 바로잡고, 다시 우주 만물의 이치라고 해석하였다. 결국 도주님께서는 인(印)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풀이했으며, 이러한 입장에서 만물의 근원은 바다에 있는 수기(水氣)이며 이를 구체화한 것이 바로 전기라는 독특한 주장을 전개하였다.


  도주님의 독창적 견해는 여타의 증산교단이 해인을 신물(神物)로 규정하였던 것과는 달리 해인은 먼데 있지 않고 바로 자기 자신의 장중에 있다는 독자적 해석으로 이어진다. 이는 해인이 도깨비 방망이나 여의주 같은 구체적인 어떤 물건이 아니라 자기의 손바닥 안에 있는 무형(無形)의 것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따라서 도주님께서는 해인을 보물이라고 생각하여 찾으러 다닐 것이 아니라, 수도를 바르게 잘하면 도통을 받아 해인의 조화를 부릴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천명하셨다. 즉 해인은 어떤 물건이 아니라 오로지 도통을 통해서 받는 조화 능력이라고 단언하신 것이다.32 


 
2. 해인의 주재자로서 구천상제


  도주님께서 전통적 해인신앙의 입장 및 여타 교단의 설명과 대별되는 입장을 취한 것은 도주님만의 독창적인 종교체험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풍운조화를 임의로 행하였고 일정한 의술에 의존함이 없이 인류의 소병(小病)에서부터 천하의 대병(大病)에 이르기까지 치료하였으며, 인간의 생사까지 판단하셨다. 상제님의 정연한 언설과 신이한 능력을 체험한 종도들은 상제님을 외경(畏敬)하게 되었으며, 천지공사가 단지 상징적 행위가 아닌 실제적 역사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즉 후천의 도래가 근자에 이루어질 것임을 일호의 의심도 없이 자신하였다.


  하지만 6월 24일 상제님의 갑작스러운 화천은 상제님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한 종도들에게 절망과 함께 상제님께서 언급하셨던 삼천과 대두목에 주목하게 하였다. 다시 말하면 상제님의 화천은 종통(宗統) 계승의 자각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 무수한 교단을 난립하게 하였다. 증산교단의 창교주들은 상징으로 일관되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해원상생의 이념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연하고도 쉬운 교리체계로 확립해야 하는 하나의 과제를 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천지공사를 수종(隨從)하며 동일한 종교경험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친자 종도들에 의해 성립된 종단에서 제창하고 있는 교리는 저마다 상이하게 나타난다.33 


  고수부(高首婦, 1879-1935)의 선도교(仙道敎),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의 보천교(普天敎), 김형렬(金亨烈, 1862-1931)의 미륵불교, 안내성(安乃成, 1867-1949)의 선도(仙道), 박공우의 태을교, 문공신(文公信, 1879-1954)의 문영삼 교단과 같은 친자 종도에 의해 만들어진 당시의 대표적 교단들은 미비하지만 저마다의 교리체계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제각기 증산을 수종하며 수학하고 수도한 바에 바탕을 둔 종교적 신념으로 교인들을 이끌어 간 경향이 강하였다.


  이에 반해 도주님께서는 앞서 언급한 교단의 교조들이 증산을 친견한 것과는 달리 상제님을 실제로 문견(聞見)하거나 그의 교설을 간접적으로 전하여 받지는 않았다. 따라서 도주님께서 봉천명(奉天命, 1909)하여 상제님의 삼계대순의 진리를 감오(感悟, 1917)하고 계시에 의해 종통을 계승한 것은 친자 종도들에 비해 이례적이었다.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의 대순한 진리가 현실화되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을축(1925)년 무극도(无極道)를 창도하고 신앙적 법제를 갖추었다. 또한 상제님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上帝)로 봉안하고 종지(宗旨) 및 신조(信條)·목적(目的)을 제정하셨다. 특히 도주님께서 봉안하신 상제님의 신격위는 타종단의 이해와는 확연한 차이점을 나타낸다.


  상제님의 신격위와 관련된 도주님의 이해는 대원사 공부를 해석하는 관점으로 접근해 볼 수 있다.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단행하기 이전에 행한 대원사 공부는 그 구체적인 내용과 목적이 정확히 전하지는 않고 않다. 단지 대원사 공부의 내용에 대해 여타 증산교단에서는 “삼계대권을 주재할 권능을 갖지 못한 상제님이 삼계대권을 주재할 권능을 갖기 위하여 실행한 것”이 대원사 공부라는 것에 이해를 같이 하고 있다. 이에 반해 도주님은 대원사 공부의 내용을 “상제님께서 선천의 우주 운행을 맡았던 신명과 선천 세상에 관련된 모든 신명을 불러서 49일 동안 심판한 것”34이라고 밝혔으며,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이어받은 도전님께서는 1974년에『전경』을 감수하면서 대원사 공부의 결과를 ‘오룡허풍(五龍噓風)의 천지대도를 대각(大覺)’하신 것이 아니라 “오룡허풍에 천지대도를 열었다”35로 기록하셨다. 


  이 같은 내용상의 차이는 상제님이 삼계의 대권을 주재하여 비겁에 쌓인 신명과 창생을 구제할 권능이 대원사 공부 이전부터 본유(本有)한 것인지 아니면 대원사 공부를 통한 습득(習得)된 것인지에 따른 견해 차이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상제님의 인격에 대한 상이한 이해는 바로 상제님의 신격에 대한 견해 차이로 드러난 것이다. 즉 여타의 종단은 상제님의 신격을 대부분 ‘옥황상제’ 등으로 이해하고, 도주님은 무극도에서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로 천명하게 되신 것이다.36 이러한 도주님의 상제관(上帝觀)이 해인의 해석에 일정 부분 반영되었다. 그와 관련해 『대순진리회 요람』에서는 상제님의 신격위 가운데 뇌성의 함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뇌성(雷聲)이라 함은 천령(天令)이며 인성(仁聲)인 것이다. 뇌(雷)는 음양 이기(二氣)의 결합으로써 성뢰(成雷)된다. 뇌는 성(聲)의 체(體)요, 성은 뇌의 용(用)으로서 천지를 나누고 동정진퇴(動靜進退)의 변화로 천기(天氣)와 지기(地氣)를 승강(乘降)케 하며 만물을 생장하게 하고 생성변화 지배자양(支配滋養)함을 뜻함이며,37 

 


  뇌(雷)는 천둥을 뜻하고 천둥은 번개가 칠 때 나는 소리이다. 번개는 전기가 방전하는 현상이므로 곧 뇌성의 전기 현상이다. 『대순진리회 요람』에서는 음과 양의 기(氣)가 결합함으로써 뇌성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곧 전기의 실체는 음과 양의 이기(二氣)이고, 이 이기가 결합하면 번개와 뇌성의 전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상제님께서 전기를 맡았다는 표현은 단순히 하늘에서 내리치는 번개 그 자체만을 맡았다고 볼 것이 아니라, 전기의 실체 즉 ‘음양의 이기’를 맡으셨다고 볼 수 있다.38 


  이러한 논의를 종합해보면, 도주님께서 봉안한 상제님의 신격위는 여타의 증산교단과는 대별되는 독창적인 면모가 보이며, 이는 도주님의 천부적 종통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해인을 설명할 때 부연되는 ‘뇌성보화천존’의 뇌성은 상제님께서 해인을 주재하는 최고신 상제로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해인에 대한 도주님의 설명처럼 해인의 조화는 장중에 있다. 이는 해인의 조화를 얻기 위해서는 신물로서의 징표를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바르고 진실하게 일심으로 수도에 임해야만 하는 당부이다. 따라서 다음 장에서는 해인을 획득하기 위한 수도에 대한 고찰을 하기로 한다.

 


3. 일심수도를 통한 해인의 성취


  상제님께서는 우주 질서의 새로운 전개와 함께 인간의 의식구조를 개혁하고 인식을 변화시켜야 함을 주창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상제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천존과 지존보다 인존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라. 마음을 부지런히 하라.39

  

 

  선천에서는 모사재인(謀事在人)하고 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 하였으되 이제는 모사재천하고 성사재인 이니라.40

 

  
  이것은 인간이 전체구조 속에서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우주가 곧 인간과 직결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상제님이 천명하신 인존(人尊)은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 등에서 보이는 인간 지상주의적 관점에서 더욱 발전하여 심신의 균형, 신인의 조화를 견지하여 인간과 외계사물의 동체주의적 내용을 구명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마음은 천지보다 크다고 하는 창조적 표현은 삶의 현장에서 긍정적 사고를 유지하게 하여 주체적 자발성과 사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41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의 전인적 변화는 어떤 방법으로 탄생될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 자신이 지닌 기질적인 변화와 본연의 양심을 회복하는 과정으로서의 인간개조에 의해서 가능하다. 인간개조는 지상신선실현을 위한 전제조건이면서 선결과제이다. 대순진리의 목적에서 제시된 무자기·정신개벽은 바로 이러한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의 논리를 지닌다. 마음을 속이지 않는 실천을 통해 정신개벽을 이루고 그렇게 개벽된 정신에 의해 자신의 몸을 다스려 나갈 때 기질적인 변화까지도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 과정을 하나의 인생관적 단어로 표현한 것이 곧 ‘수도(修道)’이다. 자신의 체험적 진리를 신앙하고 그것을 신념화하여 자신의 전 생활영역에 적용해 나갈 때 하나의 삶으로서의 수도가 빛이 나게 된다. 상제님께서는 이러한 수도를 ‘공부’라는 말로써 비유하여 그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천지의 조화로 풍우를 일으키려면 무한한 공력이 드니 모든 일에 공부하지 않고 아는 법은 없느니라. 정 북창(鄭北窓) 같은 재주로도 입산 三일 후에야 천하사를 알았다 하느니라.42 

 


  내가 부안지방 신명을 불러도 응하지 않으므로 사정을 알고자 부득이 그 지방에 가서 보니 원일이 공부할 때에 그 지방신(地方神)들이 호위하여 떠나지 못하였던 까닭이니라. 이런 일을 볼진대 공부함을 어찌 등한히 하겠느냐.43 


  

  공부는 비단 책을 읽어 학문적인 지식만을 일삼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위의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지의 조화로 풍우(風雨)를 일으키는 노력도 공부에 해당하며, 신명과의 합일(合一)을 위한 수련과정도 공부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바라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그 목적달성에 동원된 모든 과정은 공부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수도의 공효(功效)에 대해서는 상제님께서 “도를 닦은 자는 그 정혼이 굳게 뭉치기에 죽어도 흩어지지 않고 천상에 오르려니와 그렇지 못한 자는 그 정혼이 희미하여 연기와 물거품이 삭듯 하리라.”44고 한데서 개인의 정혼을 굳게 뭉치게 해주며,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니라. 남이 잘 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되나니 전 명숙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느니라.”45고 한데서 남을 잘 되게 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행위의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인간됨을 개조하는 것에 있지만 그 과정에서는 자기뿐만이 아닌 남을 두루 잘 되게 해주는 것으로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가치실현에 초점이 놓여있다. 이처럼 인간개조는 지상신선실현을 위한 선결과제이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 되는 것으로 수도(修道)를 그 방법론으로 삼고 있다.


  삼계의 운행은 시운을 따르는 것으로 시기적으로 기존 질서와 다른 새로운 질서체계가 삼계에 열리고 있다. 이를테면 선천에는 모사(謀事)는 재인(在人)하고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었다면, 후천은 모사는 재천하고 성사는 재인하는 새로운 구조로 세상이 운행되는 것이다. 이는 선천에 신이 일을 이루던 상황에서 인간이 일을 이루는 상태로 변화됨으로써 성사의 주체가 인간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후천은 인간이 일을 성공시키는 지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며, 이러한 운영의 주체가 바로 도통군자이다. 수도인은 일심에 의한 수도를 통해서만이 후천선경에 동참하여 도통의 경지에 오를 수 있으며, 그 결과 상제님께서 언약한 해인을 획득하게 된다.

  


Ⅳ. 결론 

 

  한국 사회에 있어 조선조 후기 신종교의 발흥은 기성가치체계에 대한 반발로 조선조 후기의 사회적 풍조가 야기한 문화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종래의 사회적 관습과 기성종교에 대한 반성과 개혁의지는 동학을 필두로 하여 전개되는 한국 신종교의 황금기를 여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조 후기 종교운동의 분화는 유교주의라는 특정 가치를 통치의 이념으로 삼으면서 그 밖의 종교적 가치들을 엄격히 통제해 온 지배계급의 정책이 사회변동에 따라 설득력과 정당성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나타난 결과였다.


  해인신앙은 이러한 한국 신종교의 주요한 축으로 자리매김하여 다양한 형태의 신앙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그 연원을 소급해 보면 해인신앙의 첫 실마리가 된 의상스님의 법계도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만큼 오랜 기간 동안 한국인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온 원초적 종교 심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원한 갈망의 역사를 간직한 만큼 해인신앙은 민중의 믿음이 결집된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다. 새로운 이상세계가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구현될 것이며, 그 실증이 바로 우리나라에 해인이라는 보물이 있고 멀지 않은 장래에 해인을 소유한 구세주가 출현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나라가 상등국이 될 것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하여 현실을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신앙을 토대로 해인의 실체를 확신하고 실물(實物)을 찾으려는 노력이 지금도 상당수 이어지고 있다. 즉 해인에 대한 믿음은 지나간 옛일이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며 생동하는 신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해인신앙의 확산과정에서 해인이 주는 지나친 기대심리는 시한부적인 종말론이나 온갖 난제의 일시적 해결을 기대하는 모험주의로 연결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해인신앙을 향한 지나친 맹신은 한 개인의 인물 중심이 되기 쉬어 합리적인 종교관을 정립하는 데 악영향을 끼칠 우려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해인신앙은 신묘한 보물이나 해인의 소유자인 진인에 대해 지나치게 의존할 때 도리어 현실사회를 인식하고 대처해나갈 수 있는 분별력과 능력을 상실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해인의 의미를 물건이 아닌 장중에 있다는 도주님의 새로운 해석은 미신과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말세론으로 흐를 위험성을 예방하고, 수동적인 신앙형태에서 벗어나 보다 능동적으로 수도에 진력하는 자세를 갖게 하는데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꿈꾸기가 중단되지 않는 한 지금은 예측도 못하는 새로운 형태의 해인신앙이 앞으로도 계속 전개될 것이며,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는 근거와 주장을 제시하면서 끊임없이 재창조될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해인신앙의 형태를 인지하여 올바른 신앙관을 정립하고 해인에 대한 도주님의 유지를 견지할 때, 난법난도의 시기에 허령을 극복하여 운수마당까지 정진 수도해 나갈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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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해인에 대한 연구는 김탁의 연구 성과 이외에는 전무한 실정이다. 그의 저서로는 「해인설화의 내용과 의미 」, 『한국민속학보』 5 (한국민속학회, 1995); 「한국불교와 해인신앙 」, 『한국사상사학』 7 (한국사상사학회, 1995); 「해인신앙의 전개과정과 종교적 의의 」, 『한국종교』 30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2006); 『한국의 보물, 해인』 (서울: 북코리아, 2009) 등이 있다.
04 차선근, 「해인에 대한 고찰」, 『상생의 길』 2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04)
05 대순사상에서 해인에 대한 연구는 의통(안종운, 「의통에 관한 연구(一部)」, 『대순사상논총』 2, 대순사상학술원, 1997, pp.665-667; 조태룡, 「신인조화를 통해 본 수도의 의미」, 『대순사상논총』 3, 1997, pp.284-286)·신조(김정태, 「대순진리의 종지에 나타난 신에 관한 이해」, 『대순사상논총』 11, pp.476-478)·종통(고남식, 「대순사상에 나타난 동학의 위상과 증산의 참동학 전개」, 『대순사상논총』 16, 2003, p.19) 등의 각론에 부연되는 수준에 그치고 있으며, 해인에 대한 총론은 아직 미진하다 할 수 있다.
06 『전경』 「교운」 1장 62절.1장 62절 (대순진리회 교무부,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0)
07 김탁, 「해인설화의 내용과 의미」 『한국민속학보』 5, 한국민속학회, 1995, p.15 참조.
08 김탁, 「한국불교와 해인신앙」, 『한국사상사학』 7 (한국사상사학회, 1995), pp.117-118.
09 같은 글, pp.120-123 참조
10 같은 글, pp.126-137 참조.
11 『三國遺事』 4卷 「意解」 5 義湘傳敎.
12 안진호 편집, 『석문의범』(하), 법륜사, 1931, p.156.
13 같은 글, p.145.
14 『흑뇽일긔』에는 임금의 명을 받은 서산대사(休靜, 1520-1604)가 사명당(惟政, 1544-1610)으로 이름을 개명한 동일 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서산대사와 사명당은 사제지간으로서 다른 인물이었으며, 임금의 명을 받은 것도 서산대사가 아닌 사명당이었다. 선조 37년(1604) 2월 오대산에 머물던 사명당이 스승인 서산대사의 부음(訃音)을 듣고 묘향산으로 가던 도중에,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使臣)으로 임명받았던 것이다. 그해 7월에 사명당은 국왕의 친서를 가지고 왜로 건너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는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고, 이듬해 5월에 귀국하였다. 따라서 『흑뇽일긔』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소의 차이가 있다.
15 양은용, 「정감록 신앙의 재조명」 『전통사상의 현대적 의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p.57.
16 김하원, 『위대한 가짜 예언서 격암유록』 (서울: 만다라, 1995); 최중현, 「격암유록 이용세본의 저본들에 관한 소고」, 『신종교연구』 10 (한국신종교학회, 2004); 최중현, 「저본들과의 비교에서 드러나는 격암유록 편집내역」, 『신종교연구』 19 (한국신종교학회, 2008)  
17 김탁, .『한국의 보물, 해인』, (서울: 북코리아, 2009), pp.238-241 참조.
18 김탁, 「해인신앙의 전개과정과 종교적 의의」, 『한국종교』 30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2006), pp.159-160 참조.
19 같은 글, p.160 참조.
20 같은 글, 160-161 참조.
21 같은 글, 162-163 참조.
22 같은 글, 166 참조.
23 같은 글, 166-168 참조.
24 안종운, 「의통에 관한 연구(一部)」, 『대순사상논총』 2 (대순사상학술원, 1997), p.666 참조.
25 같은 글, 
26 김탁, 앞의 책, p.231 참조.
27 이날 밤에 공우를 침실로 불러들여 일러 가라사대 네 입술에 곤륜산을 달라 무진(戊辰) 동지(冬至)에 기두(起頭)하여 묻는 자가 있으리니 의통인패 한벌을 전하라 좋고 나머지가 너희들의 차지가 되리라. (『대순전경』 9장 29절)
28 홍범초, 『범증산교사』, 한누리, 1988, p.226 참조.
29 이정립, 『대순철학』 
(대법사편집국, 1947),
p.221 참조.
30 안종운, 앞의 글, 
pp.666-667 참조.
31 『전경』 「교운」 2장 55절
32 차선근,「해인에 대한 고찰」, 『상생의 길』 2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04), p.192.
33 나권수, 「대순진리회의 정신개벽론 연구」, 『신종교연구』 25 (한국신종교학회, 2011), p.214.
34 『전경』 「교운」 2장 21절.
35 『전경』 「행록」 2장 12절.
36 박용철, 「대원사(大院寺) 공부의 이해에 나타난 종통(宗統)의 천부성(天賦性)에 대한 고찰」 『대순회보』 68, 대순진리회출판부, 2007. 
37 『대순진리회요람』, p.7.
38 차선근, 앞의 글, pp.173-174.
39 『전경』 「교법」 2장 56절.
40 『전경』 「교법」 3장 35절.
41 윤재근, 「대순사상의 인간형성이론」, 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1, pp.135-138 참조.
42 『전경』 「교운」 1장 35절.
43 『전경』 「교운」 1장 63절.
44 『전경』 「교법」 2장 22절.
45 『전경』 「교법」 1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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