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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관 도배 공사를 마치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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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혜연 작성일2018.11.15 조회3,8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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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방면 교무 이혜연 
 

  우리 삶에는 많은 만남이 있다. 그 만남을 우연이라 부를지 필연이라 부를지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전경』에 김형렬 종도가 우연히 들어선 좁은 골목길에서 상제님을 뵈옵고 반기면서 “이 길에 들어서 오지 않았더라면 뵈옵지 못하였겠나이다.”고 여쭈니 상제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동서로 멀리 나누어 있을지라도 반드시 서로 만나리라.”(교운 1장 7절)는 말씀이 있다. 그리고 한번은 상급임원들이 모여 도전님 납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도전님께서 오셔서는 “지금 여러분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여. 오늘 우리가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서로 만나게 된 것은 이미 수백 년, 수천 년 전에 정해져 있던 것이여.” 하시며 우리가 함께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필연적 만남에 의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 생에 우연한 만남은 없다. 필연임을 인식하지 못해서 그저 우연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우린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결과들 속에서 때로는 방황하고 때론 상처받으며,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루한 장마를 예고하던 지난 6월 중순부터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 하순까지 나는 대순진리회 3대 중요사업 중 사회복지사업의 결정체인 대순진리회복지재단의 여주군 강천면 가야리 소재 노인요양시설과 노인전문병원, 노인주간보호시설 건물의 도배공사에 작업 지원을 했다. 육체노동 경험이라곤 전혀 없던 내가 사십여 일이란 기간의 공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내 전생, 혹은 그 너머 전생 어딘가에서 반드시 해야 할 사명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도배 기술자 7명과 각 방면에서 지원 나온 10명의 내수들이 함께 어울려 공사를 모시게 된 것도 이를 통해 상제님의 덕화를 체험하고 깨달은 상생의 진리를 고백하도록 이미 계획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작업 첫날, 초배를 했다. 도배는 초배와 정배로 나뉘는데, 초배는 벽지를 바르기 전에 창호지 등의 종이로 벽면 상태가 매끄럽지 않은 곳에 ‘봉투 바름’ 하는 것을 말한다. ‘봉투 바름’이란 벽이나 천장을 석고보드나 합판으로 마감한 뒤, 그 위에 도배를 하면 이음매의 흔적이나 패인 구멍, 못 자국 등이 그대로 드러나 보기 안 좋게 된다. 그래서 먼저 이것의 가장자리는 풀칠을 하고 가운데는 풀칠이 안 된 두 겹의 종이를 발라서 그 틈새 부위가 벽지에 직접 붙지 않고 벽에서 떠있는 상태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처럼 정배를 했을 때 아무 표시가 나지 않도록 깔끔하게 처리하는 작업을 ‘봉투바름’이라 한다. 이 기초 작업을 잘 해야 정배가 깔끔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곳이라고 초배를 대충하면 정배를 했을 때 벽의 결점은 물론 초배의 잘못된 흔적마저 드러나고 만다. 


  수도를 하면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겪는다. 말은 마음의 외침이고 행실은 마음의 자취(교법 1장 11절)라는 『전경』 말씀처럼 사심으로 가득 찬 마음은 사심을 말하고, 사심의 행동을 하도록 한다. 마음을 속이고 그럴듯한 포장으로 외면수습을 한다 해도 그 위선은 오래지 않아 여과 없이 드러나고 만다. 잘못 박은 못을 뽑아 낸 후의 보기 흉한 구멍처럼 나만을 고집하는 아집 때문에 생긴 타인과의 틈이나 나 외의 것에 대한 불평과 불만 때문에 울퉁불퉁해진 마음 등, 서로 주고받은 상처로 인해 생긴 흉터를 ‘마음을 속이지 않는’ 초배를 통해 제대로 보완하지 않고 외면 수습하거나, 그대로 묵인해 버린다면 결국엔 나만을 위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 수도를 못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외면 수습은 타인의 시선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은 속일 수 없다. 그래서 훈회는 “마음을 속이지 말라.”고 가르친다. 사심을 버리고 마음을 온전히 도심으로 채우는 것, 그리고 수도를 통해서 편편하고 반듯한 말과 행실을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수도자의 기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실크벽지로 정배를 했다. 종이벽지는 양쪽 벽지의 이음매를 조금 겹쳐 바르면 되지만 실크벽지는 양끝이 맞도록 발라 준 후 두 벽지의 이음매를 롤러로 살짝 문질러 그 틈을 없애고 고정시켜야 한다. 실크벽지에 롤링을 하면서, 내 실수와 아집 때문에 생긴 인간관계의 틈에도 이 롤러처럼 밀어서 그 틈을 채울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자존과 아집 때문에 남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해 이리저리 생긴 빈틈에 상생이란 롤러를 지니고 있다면 누구든지 그 뜻을 맞춰 줄 수 있을 것이고,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 줄 수 있는 아량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기술자 분은 “실크벽지는 얼마나 잘 늘어나는지 B동에서 늘리면 A동까지 간다.”고 농담을 하시곤 했다. 실크벽지는 이리저리 잘 늘어나기도 하고 늘어난 실크벽지를 탁탁 두드리면 줄어들면서 주름이 펴지기도 하는데, 이렇게 늘었다 줄었다가 자유자재로 되는 실크벽지처럼 나를 타인에게 맞출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수도인이 지녀야 하는 바른 마음 자세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서로 어울리지 못해 생긴 인생의 어긋난 틈을 아픈 상처를 지닌 채 살진 않을 것 같다. 이제는 그 틈과 여백을 눈물이나 후회가 아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함으로 채워 가고 싶다. 


  정배를 한 후에는 여분의 벽지를 헤라와 칼을 사용해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그런데 칼질이란 것이 쉽지가 않다. 칼날을 조금 길게 뺀 후, 헤라에 칼을 밀착시켜 칼과 헤라를 동시에 움직여야 곧고 일정한 간격의 선이 나오게 하는 작업인데, 이것이 이론처럼 쉽지가 않았다. 더구나 한번 잘못된 칼질은 여러 번 보수를 해도 여간해선 깔끔해지지 않았다. 차라리 그런 하자는 모두 잘라내고 그 자리에 실리콘으로 보수를 하는 것이 더 나았다. 실리콘은 수정테이프처럼 칼 선을 깔끔하게 보완해 주었다. 


  수도를 하다 보면 버려야 할 단점을 지적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중에 고치면 되겠지, 혹은 차차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내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오물이라면 나중에 버려야지 하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오물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바로 버렸을 것이다. 상제님께서도 “사람이 옳은 말은 듣고 실행치 않는 것은 바위에 물주기와 같으니라.”(교법 1장 22절)고 말씀하셨다.


  더러운 찌꺼기가 가라앉은 우물물은 그 위가 아무리 맑은 물이라 해도 먹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바가지가 물에 닿는 그 순간 가라앉은 찌꺼기가 떠올라 우물물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힘이 들더라도 그 고인 물을 밑바닥까지 모두 퍼내고 그 찌꺼기를 남김없이 걷어 낸 후에야 비로소 맑은 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버려야 할 단점은 우물 바닥을 청소 하듯이 그 원인부터,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빨리 버리고 고쳐나가는 것이 수도하는 사람의 기본자세라 생각된다.


  나는 내 마음 속의 우물을 들여다본다. ‘수도인’이라는 허울을 쓰고 시기와 질투, 편협과 분노의 감정을 그 우물 밑바닥에 던져 놓고 말간 거짓 얼굴로 살아오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또 나와는 다른 타인의 삶의 방식을 내 방식대로 변화시키려고 하다가 막상 변화를 거부당하면 상대를 무시하고 외면해 버리는 독선의 생활은 아니었는지…. 오늘 나는 나의 우물을 청소한다. 어떤 오욕의 찌꺼기도 남기지 말자. 어떤 일렁임에도 맑은 물을 내어 줄 수 있도록 내 안의 우물을 조금 더 자주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작업을 하던 어느 날, 한번은 천장 도배를 하다가 우마에서 떨어졌다. 다행히 다리에 작은 상처가 났을 뿐이었지만, 약한 멍 자국을 남기는 신고식을 치렀다. 천장 도배를 한다고 발밑은 보지 않고 걸어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괜찮으냐고 걱정해 주는 이와 떨어진 나보다 더 놀란 이, 무안해 할까봐 자리를 피해주는 이, 그리고 오히려 실수를 농담 삼아 웃는 이가 있었다.


  하나의 일이라도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다 제 각각이었다. 여기서 또 하나의 깨달음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어떤 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세상은 흑백논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흑과 백뿐만 아니라 형형색색의 무지개가 있고, 그 아름다움은 제각각 자기 색을 고집해서가 아니라 서로 어울려 조화를 통해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나 혼자만의 개성 있는 색을 고집하여 다른 새기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색을 인정하면서 나로 인하여 그가 빛이 나면 더 좋듯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너와 나의 색이 아니라 우리의 색을 만들어 서로 더불어 잘 사는 것. 이런 어울림이 상생이 아닐까? 


  그리고 같은 팀의 기술자 한 분이 지방에 가신 날이었다. 나에게 병원동의 병실 하나를 맡아서 실크벽지로 정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기술자의 조수가 아니라 내가 책임자가 되어서 다른 내수 한 명과 짝을 이루어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잘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앞섰지만, 걱정 되는 마음을 추스르고 창문 쪽 벽부터 정배를 시작했다. 막상 나에게 정배 지시를 내리긴 했어도 제대로 해낼까 하는 걱정이 앞섰는지 다름 팀 기술자들이 쉴 새 없이 점검을 하러 왔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긴 이렇게…”


  “아니 그거 아니라니까.”


  “아니 아니야.”


  “그러면 안 된다니까.”


  급기야 눈앞에서 도배지 한 폭이 뜯겨 나갔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충고를 듣느라 배는 산으로 가고 있었다. “사공이 너무 많아요.” 하며 푸념을 했다. 사공이 많다 보니 당최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내가 보고 배운 방식대로 일을 진행시켜 정배를 마칠 수 있었다.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일하는 것과 내가 누군가를 이끌어 가며 일을 하는 것은 정말 많은 차이가 있었다. ‘진정한 리더란 어떤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더란 그저 지시를 내리는 것에서 그 책임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시 받는 사람이 그 일을 제대로 해 내는지 주의 깊게 살피고, 그의 실수를 보완해 주어 그의 능력이 향상 될 수 있도록 적당한 선의 일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며, 그러면서도 그가 제대로 따라 오도록 격려 해주고, 버거워 보일 때는 소리 없이 도와주는 세심한 배려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도를 권유하고, 참배를 주선하고, 치성 참석을 시키고, 금강산 연수를 보내고, 도장에 수호를 보내는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도인을 기르는 일꾼이 이런 심성을 소유한다면 우리 포덕사업은 사회적 인정을 받으며 더욱 성장하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이틀은 하자 보수작업을 했다. 이음새가 뜬 곳은 없는지, 천장 마감 부분과 하단 걸레받이 마감 부분이 일정한 간격으로 칼질이 잘 되어 있는지, 창틀 좌우, 또 콘센트 둘레 칼질 상태, 벽지가 뜬 곳은 없는지 살피고, 풀이나 얼룩이 묻은 곳은 젖은 걸레로 닦아냈다. 완벽하게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한 방도 다시 들어가 보면 눈에 띄는 작은 하자들이 있었다. 걸레받이 라인을 다시 잘라내고, 문틀 측면을 다시 손보고, 튀어 나온 못은 망치로 박고, 작은 틈을 실리콘으로 메우고, 얼룩과 풀을 닦아내고, 하루 종일 B동에서 A동으로, 다시 기숙사동으로 종종 걸음을 쳤다. 그런 중에도 마음이 울컥하곤 했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결승선을 그냥 지나친 기분이랄까? 사십여 일 이란 시간을 함께 한 곳이다. 이음매 처리용 초배지를 처음 붙인 곳, 실크벽지에 처음으로 칼질을 한 곳, “칼질은 정말 잘 한다.”고 칭찬을 받던 곳, 우마에서 떨어진 곳, 그리고 때때로 지친 몸을 기대었던 벽들, 제자는 안 키우지만 수제자는 키운다며 최고의 칭찬을 받은 곳. 복지관이 완공되어 개관하게 되면, 그래서 그 곳에 내가 다시 서게 된다면 그 병실 혹은 요양실, 공용 홀, 복도에서 내게 추억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복지관 공사는 이제껏 내가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게 하고,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작업을 하다 보니 사소한 볼일은 자연히 같은 방면의 내수들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사소한 부탁이긴 해도 매번 들어주기는 귀찮을 법한데 모두들 기꺼운 마음으로 나의 손발이 되어 주었다. 내가 무언가를 해 주어야 반대급부로 돌아오는 친절이 아니었다. 평소 나는 왜 타인을 향해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지, 내가 먼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많은 일들 속에서 항상 웃어야 하고, 늘 활기차고 씩씩해야만 하는지, ‘나는 항상, 늘’이란 수식어 앞에서 왠지 모를 서운함, 원인 모를 섭섭함의 감정들과 뭔가 손해 보는 것 같은 막연한 피해의식 속에 살아왔다. 이런 삶의 버거움을 내색조차 하지 못했던 나에게 주위의 끊임없는 배려와 새롭게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은 커다란 위안으로 다가왔고 지금껏 내가 살아온 방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나에게 있어 복지관 공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식 없는 어울림이 얼마나 소중한지. 상대를 위한 작은 친절이 내게는 더 큰 배려로 다가 온다는 것을, 그리고 열심히 살아 낸 오늘 하루가 내일을 위한 도약의 발판이 된다는 불변의 진리를 깨닫게 해 준 상제님께서 주신 덕화 그 자체였다.
<대순회보> 1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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