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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 임의에 맡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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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정업 작성일2018.11.21 조회1,3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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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1 방면 보정 박정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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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어느 날, 평소 버스를 잘 이용하지 않던 저였지만 이날따라 버스 탈 일이 생겨 막 버스를 타던 중이었습니다. 저를 보지 못한 기사분께서 문을 닫는 바람에 손가락이 끼었고, 이에 화들짝 놀란 기사분께서 엉겁결에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바람에 손가락이 부러졌습니다. 타인들이 안타까워할 이 상황을 저는 오히려 상제님의 무한한 덕화라고 생각했으며, 이 사고로 입은 덕화와 과거 남편과 아들이 입은 덕화를 수기로 써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스물다섯 살이던 1986년 12월, 결혼식을 마치고 솜사탕처럼 달기만 할 것 같은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여행지를 걷고 있는데 노상에서 관상과 사주를 봐주시는 어떤 할아버지께서 “젊은이들, 이리와 앉아보게.” 하시더니 남편에게 “새신랑이 40살을 넘기기 힘들겠어.”라고 말했습니다. 행복이라는 울타리로 보금자리를 꿈꾸는 신혼부부에게 이 말은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았습니다. 황당하기도 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남편이 “이 영감이 지금 뭐라는 거야?”라고 소리를 지르며 제 손을 이끌어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일 년 뒤, 우린 아들을 얻었고 또 일 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막 돌 지난 아들을 업고 동네를 돌고 있는데 한 여자분이 아들을 보더니 아기가 명이 짧다고 했습니다. 갓 돌 지났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 아연(啞然)했습니다. 그러던 중 전도인을 만나게 되었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아들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를 하며 “혹 명을 늘릴 방법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세상에 문제가 있으면 답도 있다고 대답하시는 전도인께 그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여 입도치성을 모셨습니다.
  이후 5년 동안 전도인께서는 저희 집에 드나드시면서 저를 사회인 대하듯 놀다가 밥 먹고, 성금만 받아가셨을 뿐, 도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도에 대해 제대로 알 길이 없었습니다. 5년 뒤에 겨우 포덕을 시작했지만 단명할 운을 지닌 아들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 도에 대한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선각으로부터 공부 들어가라는 권유를 받고 공부 들어갈 날짜를 기다리다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에 큰 나무가 있었는데 단풍이 들어 가을바람에 휘익 날리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으로 인해 교화로만 들었던 가을 세상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진정한 상제님의 일꾼이 되고자 연락소를 오가며 포덕 사업에 전념했습니다.
  처음에 반대했던 남편도 제 이야기를 들으며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좋으면 당신이나 열심히 닦고 다른 식구들에게는 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정적이던 남편의 생각이 조금씩 완화되어 감사한 마음이었으나 이렇게 좋은 것을 식구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급하게 날을 받아 친정집에서 친정식구들을 위한 입도치성을 모셔주었습니다.
  치성을 마치고 음복을 준비하고 있는데 남편으로부터 출장 마치고 온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너무 놀라 순간 거짓말을 할까 생각도 했지만, 입도치성을 위해 친정집에 와 있노라고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불같이 화를 낼 것 같았던 남편이 웬일인지 순순히 알았다며 친정집으로 데리러 오겠다고 했습니다. 몇 시간 뒤 남편이 친정집에 왔고 신발을 벗기가 무섭게 혼절했다가 한두 시간 뒤에 깨어났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함께 출장 갔던 직원을 태우고 돌아오다가 밤길에, 작은 다리가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해 차가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는데 그 와중에 남편은 직원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왔다고 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상제님의 덕화와 조상님의 보살핌으로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해 주었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남편 또한 수긍하는 눈치였습니다.
  얼마 뒤 남편은 전기 일을 하다가 감전돼 2층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또 당했는데 이때 역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쩡했습니다. 남편이 40살을 넘기기 어렵다던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이런 위험한 사고를 당했을 때의 남편 나이는 38살이었습니다. 남편의 두 분 형님 모두 단명하셨는데 큰형님은 제대 한 달 남겨두고 돌아가셨고, 둘째 형님은 40대 초반에 객사하셨기에 남편도 그런 위기에 처한 것이었을 텐데 상제님의 덕화로 단명의 운을 극복했다는 생각이 들자 상제님에 대한 믿음이 공고해지고 도의 일에 더욱 정성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수도의 세월이 흘러 교령이 되었고, 2005년이 저물고 2006년이 밝아오던 섣달그믐 날은 제가 시법공부 드는 날이었습니다. 이날 새벽 6시, 친정어머니께서 별세하셨습니다. 갑작스러운 친정어머니의 주검 앞에 슬픔이 물밀 듯이 밀려왔지만, 공부에 대한 걱정이 앞서기도 했습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상제님 일을 해야 한다는 마음이었고 공부 들어가는 것이 궁극적으로 어머니의 명복을 빌어드리는 최상의 길이라 여겼기에 공부는 꼭 들어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중간임원 때였고 가화하던 중이라 가족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이었습니다. 염을 마치고 난 뒤, 가족들에게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하고서 공부를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명복을 빌면서 공부를 마치고 나와 오일장을 치렀습니다.
  이 해는 아들의 나이가 20세 되던 해이기도 했습니다. 슬픔을 겨우 삼킬 만한 시간이 지나 6월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6시경, 수반 집에서 포덕교화를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그 시간에 전화할 일이 없는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상황이 얼마나 급했던지 남편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고 아들이 다 죽어가고 있으니 빨리 오라고 했습니다. 교화를 마무리하고 병원으로 가는 내내 남편으로부터 2, 3분 간격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저도 놀랄 정도로 제 자신이 태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데 하물며 남이 죽을 때 잘 살자는 것이 상제님 일일진대 분명 아들을 살릴 길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골수 깊은 곳, 가슴 저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심을 가진 자에게 지체 없이 복록을 베풀어준다고 하셨고 급박한 상황에서 상제님을 부르면 살 길이 열린다고 하셨으니…. 어느새 저는 일심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3일 앞으로 다가온 시법공부에 꼭 들어가리라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도착해, 남편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달려오는 버스 앞문에 머리를 부딪쳤다고 했습니다. 당시 대학교 1학년이었던 아들은 오토바이로 아르바이트하고 있었는데 신호 대기 중에, 과속으로 달려오던 버스가 아들을 들이받은 것이었습니다. 쿵후 4단인 아들이 순간 본능적으로 낙법을 사용했으나 헬멧을 쓰지 않았기에 머리가 세로로 길게 찢어져 벌어져 있었고 또 한 군데는 패여서 골이 보였는데 의사 말이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참담함이 누가 봐도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없을 거 같았는데 이게 문제가 아니라니…. “그럼 뭐가 문제인가요?” 조심스럽게 숨죽여 물었습니다. 의사는 등갈비 뼈가 여러 개 부러지면서 폐를 찔러 폐가 터졌고, 따라서 가망이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소릴 듣는 순간 온몸에 힘이 쫙 빠지면서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댈 곳을 찾아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으니 최선을 다해달라고 사정하며 매달린 결과 의사가 구급차를 불러 강남에 있는 큰 병원으로 우리를 이송시켜줬습니다. 하지만 그 병원에서도 역시 3일이 고비인데 힘들 것 같으니 가족, 친지들에게 미리 알리고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일심만 먹으면 아들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알았으니 최선을 다해달라고 의사에게 간곡히 청했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단장(斷腸)의 심정으로 10분 간격으로 애가 깨어났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주치의는 온데간데없고 젊은 인턴들만 있었습니다. 의식불명의 아들을 남겨둔 채 퇴근하여 주말에도 나타나지 않는 의사가 어찌 그리 무정하고 황당하게 여겨지던지…. 선생님 나오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매달렸으나 허공에 손짓하기였습니다. 그렇게 가슴 졸이며 애태우던 3일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자 의사가 나타났습니다. 우리 애 깨어나겠느냐고 물었더니 변동이 없다고 했습니다.
  공부는 들어가야 하는데 남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별일 아니란 듯이 말을 꺼냈습니다. “저 공부 다녀올게요.” 남편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며 대꾸했습니다. “당신이 장모님 돌아가셨을 때도 공부 들어갔는데 자식 죽는다고 안 들어가겠어? 어차피 의사도 포기했으니 당신 상제님께 잘 빌어서 우리 아들만 살려내. 그러면 수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줄게.” “알았어요. 제가 상제님께 우리 아들 꼭 살려달라고 빌고 올게요.” 라고 남편을 다독이며 공부를 들어갔습니다.
  칼날 위를 걷는 심정으로 공부를 마치고 나왔는데 아들의 상태는 변동이 없었습니다. 깨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아들을 보면서, 지금 이 상황이, 힘들고 매우 급할수록 상제님 일꾼으로서 더욱 일심(一心)을 지니라는 신명계의 가르침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게으름 피울 때가 아니며 상제님 일을 쉬지 않고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이틀 뒤 방면성을 모시기 위해 속초에 갔습니다.
  성을 모시고 난 뒤, 남편에게 전화해 아들의 생사를 물었더니 좀 전, 저희가 성 모시는 시간에 깨어났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6일 만에 깨어났던 것인데, 아들을 낳았을 때보다 더 기뻤습니다. 저희 사정을 잘 알고 계신 선각 분들께서 빨리 가보라고 하셔서 한걸음에 병원으로 와 아들을 보았지만 기쁨도 잠시 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에서 기억이 멈추었고 혀가 짧은 소리를 내었습니다. 순간 아들이 지적장애아가 되어 죽느니만 못한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도의 일을 잠시 미루고 아들 간호에만 전력할까 싶었지만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일주일 지났을 때, 기억도 조금씩 호전되었고 인공호흡기 착용으로 부자유스러웠던 발음도 정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터진 폐를 수술하기 위해 날짜를 정했는데, 의사가 오더니 일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또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폐가 회복되어 수술하지 않아도 된다며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얼마 뒤 수술을 하기로 했던 머리도 회복되어 수술하지 않았고 찢어진 것만 꿰매는 데 그쳤습니다. 한 달 안에 모든 기억을 회복한 아들은 2013년 12월 결혼해서 아들 낳고 잘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들도 상제님의 덕화로 재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년 말, 제가 혈압은 없었지만 저혈압 쇼크로 인해 쓰러진 적이 있었는데 의사가 위험하니 혼자 다니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후로 제 몸에서 피가 줄어들어 부족하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손써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6월 사고를 당했고 손가락 수술을 위한 기초검사를 받았습니다. 그중 피검사가 있었는데 검사결과, 제 피의 양이 정상인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상태로는 수술할 수가 없어서 부득이하게 수혈을 받고 수술을 했습니다. 이 사고의 충격인지 한 달 뒤 생리 현상이 중단되었고 제 몸에서 피가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수도하면서 차량으로 인해 많은 덕화를 경험한 저로서는 이 사고 또한 저의 건강을 살펴주시려는 상제님의 크나크신 덕화라 여겨 감읍(感泣)하고 또 감읍했고 상제님의 무량하신 덕화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단명(短命)이라는 아들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시작한 수도였지만 상제님의 일꾼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무량하신 덕화를 내려주신 상제님 전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보은(報恩)하기엔 한없이 부족한 정성이지만 저의 모든 것을 상제님 임의(任意)에 맡기고 성·경·신을 다하여 수도하고자 다짐해봅니다.

 

<대순회보>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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