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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사람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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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희원 작성일2018.11.21 조회3,9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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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1-16 방면 평도인 김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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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원아, 네 뒤엔 천사가 있어.” 스물다섯 살, 나는 천사를 불렀다. 만일 하늘이 사람을 도울 마음이 있다면 나에게 천사 한 명 쯤은 보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다시 세상을 살 이유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한 장의 종이를 통해 그동안의 나의 인생을 정리해본다.
  당시 나와 결혼을 약속한 남자는 다른 여자와 갑작스런 결혼을 발표한 후 나를 떠나갔다. 여자로서 정말 끔찍한 경험을 한 것이다. 배신감과 죄책감은 날로 커져만 갔다. 이 와중에 친구로부터 다단계 사기를 당해 그 빚을 다 떠안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하루하루 연옥을 사는 기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린 시절부터 의지할 곳 없던 저를 살붙이로 여겨 의지할 곳을 열어주신 할머니마저 운명을 달리 하셨다. 할머니는 부모의 사랑을 받을 길 없었던 나를 남몰래 챙겨주신 유일한 분이셨다. 그 모진 알츠하이머병에 걸렸을 때에도 유독 나를 알아보시던 할머니. 나는 극심한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려 의사도 어찌할 수 없는 상태까지 경험했다. 이 때문에 남들처럼 직장도 다닐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체중은 42kg까지 빠졌다. 스물다섯 살 되던 해의 봄. 나는 완벽하게 모든 것을 잃었다.
  그 뒤로 사람의 운명이란 말이 늘 귀에 거슬렸다. 나는 애당초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가?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태어나자마자 영국으로 입양 보내질 아이였다. 어떤 이유로 그렇게 된 것인지 그 사연은 알 길이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해외로 입양되지 않고 한국에 남겨졌다. 한국에 남겨진 후 나의 운명은 가난한 한 농가에 입양되어 4남매의 장녀로 살았다.
  대신 부모로부터의 사랑은 부재된 채였다. 동생들과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던 나는 스스로도 무언가 집안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린 시절 나는 때때로 밤마다 이상한 소리를 내고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주위에서는 내가 무엇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다고들 했다. 그래서인지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그 모든 것이 내 죄로 돌아왔다. 동생이 한 짓을 오해하여 빗자루가 뜯겨 나가도록 맞은 기억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는 견딜만한 것, 나는 농사일이며 집안일을 하면서 최대한 짐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삶을 나의 할머니는 묵묵히 지켜봐 주셨다. 빈대떡을 굽는 날이면 얼른 내게 한 입 넣어주셨고, 제가 학교에서 상을 타오기라도 하면 있는 힘껏 나를 끌어안아 주셨다. 누군가의 품에 안긴다는 기분이 어떠한 것인지, 나는 어린 날의 기억으로만 짐작한다.
  어른들이 입방아처럼 쏘아대던 말과 여러 가지 힘든 경험을 직접 경험해 보니 이따금씩 스스로도 무당 팔자라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아마도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은 그것을 태중에서 알았던 듯하다. 그래서 나를 먼 나라로 보내려 하셨을까? 나는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도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는 내 삶의 응어리였지만 어디 속 시원히 물어보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만의 비밀로만 남겨두었다. 그러던 중 얼마 전에야 부모님께 나의 속내를 내 비추었다. 어린 시절 정말 나에게 그러한 일이 있었느냐고?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면 무슨 소리냐고 잡아뗄 것인데, 아버지는 말없이 잠잠히 돌아앉아 먼 허공만 본다.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다 일어섰다. 나는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의 운명은 이것으로 설명된다고.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점집에 불려 다닌 것, 그것이 내가 가진 운명이었다. 나는 멋모르고 갔다가 내림굿을 받으라는 권유까지 받았다. 그 때마다 나는 번번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저 사람 밑으로 들어갈 팔자가 아니다.’ 바람귀가 들렸다. 신 내림을 받자면 얼마든지 하고 남았을 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매일 달고 산 어지러움이며 구토증, 한여름에도 겹옷을 입어야 하는 오한, 쇠꼬챙이로 뜯어내는 듯한 근육통, 얼굴이 타들어가는 듯한 피로 등 별 알 수도 없는 증상에 시달렸다. 애꿎은 병원비만 날렸으니 부모 입장에서는 얼마나 속이 상했겠는가.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집을 나왔고 이때부터 갖은 일을 하며 살았다. 길에서 밤새우거나 교회에서 쪽잠을 자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십 대에는 고시원과 지하단칸방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러다 모든 것을 잃었다. 이후 나는 서울로 향했다. 무작정 서울로 가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삶도 녹록치 않았다. 온갖 생활고와 빚 독촉에 시달리며 또 한 번의 연옥을 경험했다. 그때 내게 다가왔던 이가 있었으니 서울에 와서 아르바이트하며 만난 바로 나의 선각이시다.
  당시 선무가 나를 포덕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교화를 할 때 나는 이미 알아보았다. 아! 하늘이 나를 살리시려는구나. 그 힘든 시절 내 뒤에 있어달라고 한 천사를 여기서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나는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입도식을 올렸다. 입도식을 올릴 때 나의 머릿 속은 온통 하늘나라로 먼저 가신 할머니와 내 스스로 떠나보낸 아이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이런 저런 표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갈 때 나는 다짐했다. 이제 나를 포함해 이 두 사람을 위하는 마음으로 올바른 정신으로 바르게 살아야겠다고.
  그러나 입도식 후 수도인으로서의 삶도 녹록치가 않았다. 선각자로부터 교화를 들을 때에도 남들과는 달리 심신이 힘들뿐만 아니라 어떨 때는 알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도 있어 선각자분들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한동안 ‘이 모든 것이 내 탓이요’ 하면서 일부러 선각을 멀리하며 지내기도 했다. 당시는 그것이 선각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알 수 없는 갖가지 고통과 증세는 나날이 심해졌고 병원에서는 약을 처방해줄 뿐 이렇다할 차도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 앞을 떠나지 않는 알 수 없는 영상들은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이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뿐더러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 나에게만 생겨나는 독특한 현상이었다. 이런 경험을 혼자 떠안고 가기에는 무척이나 힘들고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선각에게 연락하여 수도에 매진했고, 정성으로 수도에 임할 때면 여느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며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병들고 가난하고 기고한 팔자를 가진 내가 기댈 곳이라고는 상제님의 진리밖에 없었다.
  그러던 지난 해, 나는 암 진단을 받았다. 난소암이었다. 비록 말기는 아니었으나 대학 의료진들도 접해보지 못한 희귀한 케이스라고 했다. 소위 ‘열어봐야 안다’는 소리까지 들었으니 나는 이것으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천형은 다 받았다고 생각되었다. ‘나뭇가지 한 번만 꺾어도 일곱 생을 간다.’고 하는 불가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전생에 얼마나 죄를 짓고 살았던 겐가. 그간 내가 겪은 병력만 보아도 이미 뇌수막염에 혈액종양에 정신착란증에 더 이상 물질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몸이었다. 이러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나는 살려달라고 빌지도 않았다. 몰래 유서를 썼다.
  그러나 나는 살았다. 의료진들도 천행이라고 했다. 눈을 뜨던 날, 극심한 어지러움 중에서도 똑똑한 생각 하나가 들었다. ‘나는 나 혼자만의 몸이 아니다.’ 60년 공을 들여서 자손 하나를 낸다고 하던 『전경』 성구가 나의 뇌를 스치며 휘감았다. 나는 천하의 변변치 못한 자손이 아니라 귀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비록 남다른 경험으로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보다 더 큰 세상을 위해서 태어난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스스로의 마음이 위로가 되며  마음이 개운해졌다. 여느 보통 사람들과 달리 말 못할 고생을 많이 하여 심신이 힘들었지만 이 또한 받아들이고 도문소자의 길을 찾기 위한 험준한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니 나를 보는 관점이 긍정적으로 변화되었다.
  이후 나는 암 진단 및 수술비 명목으로 받은 보험금으로 빚도 청산하고 동생 전세자금에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 또한, 그간에 사람들한테서 돌려받지 못하고 잊고 있었던 돈도 돌려받게 되었다. 그때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수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였지만 일심으로 수도하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태생적으로 같은 환경에서 태어나지 않고 각기 다른 경험을 하며 인생의 굴곡 속에 살아간다. 그렇지만 그것을 스스로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겨내는가는 자신의 몫이다. 물론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지만 자신의 환경과 모든 것을 이해하고 정성을 다해 일심으로 수도하여 성격과 체질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노력 여하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몇 번이나 죽을 목숨에서도 끝끝내 살아나 이렇게 하늘의 은혜와 덕화를 받고 있는 이 몸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나는 오히려 삶의 고비를 넘긴 후 일상이 순탄해졌다. 도저히 청산할 수 없는 빚더미에서 해방된 것도 그렇지만, 다른 무엇보다 가족들과의 관계가 좋아졌다. 동생들은 내가 수술대에 누운 뒤로 나를 살갑게 대했고 예전처럼 나를 무시하거나 따돌리지도 않았다. 부모님은 또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큰 딸의 몸부터 살폈다. 나를 두고 고아팔자라고 하던 점쟁이들의 말은 모두 틀렸다. 나에게도 핏줄은 있었다. 밥은 먹었냐? 비는 안 맞았냐? 사소한 일상을 나눌 가족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엄마를 ‘엄마’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감격스럽다. 내 몸 일부를 잃고 난 후에야 허락된 ‘엄마’라는 호칭. 나는 늘 거리감이 있던 어머니를 이제야 ‘엄마’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 심정을 누가 알까?
  아마 지금의 선각을 통해 입도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천사여, 내 뒤에 있어다오.” 그 어린 날의 그 간절함이 얼마나 통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모든 것을 상제님께서는 하늘에서 지켜봐 주셨다. 무엇보다도 나를 타국에 내보내지 않도록 힘써준 조상님들과 신명님들의 공덕이 크다 하겠다. 그 첫 단추가 틀어졌다면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 수도, 이 땅의 가치도 모를 터이다. 이제 나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도의 일이라.’고 한 상제님의 말씀처럼 포덕을 통해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것이 내가 갚아나가야 할 마음의 빚이라고 생각된다. 마음속에는 늘 후천이 열릴 때를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좀 더 분명해진다.
  요즘 들어 미역국이 그렇게나 생각나는 것도 그러한 이유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입도한 후 처음으로 포덕소에 모셨던 것이 미역이었다. 아마 내 몸에 잠시 살았던 아이에게 미안해서, 그리고 고깃국 한 번 넉넉히 끓여드리지 못한 할머니께 죄스러워 나는 그것을 이따금씩 모셨나 보다. 후천이 열리면 나는 두 사람 곁에 있겠지. 그리고 손수 솥을 걸고 불을 지필 것이다. 참기름을 둘러 소고기를 볶고 불린 미역도 살살 흩뜨릴 것이다. 그래서 한소끔 끓여내겠지. 그리고는 호호 불어 사랑하는 이들에게 한 숟갈씩 떠넘겨주겠지. 다른 거창한 소원보다도 나는 이 따스한 장면 하나를 위해서 지금도 바르게 수도하며 후천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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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회보> 1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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