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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화(家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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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훈 작성일2018.01.12 조회3,9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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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방면 선무 김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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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도 후 13년이 지난 지금, 과거를 돌아보며 정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써 봅니다. 저는 고추로 유명한 경북 영양에서 5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이 고추와 담배농사를 업으로 우리 5형제를 고등학교까지 보내셨습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아옹다옹하면서 별 탈 없이 저희 형제들을 키우신걸 보면 부모님께서도 보통 분들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상수도 댐 공사로 논밭이 수몰되면서 새로이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보상받은 돈으로 20년 농사짓고 자식 키우시면서 진 빚을 청산하고 단칸방 하나 얻어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고3이었던 것 같습니다. 때려 죽여도 농사는 안 짓겠다고 공부해서 다른 것을 해서라도 뭐든 성공해 보겠다고 다짐했던 사춘기 시절이었습니다. 위로 세 형님들은 부산과 창원으로 객지 생활을 시작했고, 저는 동생과 함께 안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집에는 부모님 두 분 만이 살고 계셨고요. 그냥 보편적인 가정생활이었죠. 얼마 지나지 않아 큰형이 직장생활 중에 IMF가 터지고 학벌에 밀려서 자진 사퇴하면서 저와 동생을 꼭 대학에 보내야 된다고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덕에 지방의 국립대학을 가게 되었고, 이곳에서 선각(先覺)분을 만나 도(道)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 집안에는 큰 불행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한 집안의 가정사를 말씀드리는 것은 한 가족이 ‘가화’를 하면서 가족 개개인간에 생성된 포원(抱)의 시작이 어디였는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큰형은 퇴사 후, 어떻게 하든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 보려는 마음에 다단계 사업에 뛰어 들었습니다. 다단계 사업이라는 것이 여러 사람을 끌어들여야 하는 사업이기에 큰형 역시 아래 두 형제까지 대동합니다. 당연히 결과는 그나마 있던 재산까지 모두 날리고 빚까지 떠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먹는 것조차 힘겨워진 우리 가족은 형제간의 우애마저 돈 때문에 금이 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입도 후 3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도(道)의 일에 점점 더 회의까지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큰형은 부득이 아버지의 평생의 재산이었던 밭 900평을 처분해 빚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많이 서운해 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큰형 사이에 원의 씨종자가 생겨났나 봅니다. 그리고 술 드시는 횟수가 많아진 아버지는 어머니께 화풀이 했고, 살림을 부수고 손찌검까지 하시며 어머니를 괴롭게 하셨지요.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로서는 고스란히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셨습니다. 결국 두 분 다 마음속에 신의가 깨어지기 시작했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형제들은 얼마간 각자 서로가 부모님을 모시겠다며 의견을 내 놓았습니다. 그러나 5형제 중 유일하게 결혼을 했던 둘째 형 집에 계실 때 사돈댁으로부터 온 전화를 직접 받게 된 아버지는 가슴에 못이 박히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든데 거기서 입 두 개가 더하면 어떻게 하냐고”라고 실상 손자를 봐주시면 둘이서 맞벌이 하겠다고 올라오시라 한 것인데, 이 전화 한 통화로 아버지와 형수 그리고 어머니, 둘째 형 사돈댁까지 원한이 맺혀지게 되었습니다. 그 길로 보따리를 꾸려서 창원의 큰형 집으로 내려온 아버지는 결국 청송으로 혈혈단신 가시게 되었고 어머니는 둘째 형이 있던 홍천으로 그리고 큰형은 창원, 셋째 형은 부산으로 동생은 경기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가난했지만, 순수하고 소박한 가정이 물질과 언덕을 잘 못씀으로써 가족 한사람 한사람까지 서로 원한을 맺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정은 좀 의외네요. 당시 제가 많이 부족했었음을 깊이 반성해 봅니다. 저는 이때에 학교와 군대 문제로 방황 중이었고, 전국을 떠돌며 노동을 하면서 잠적된 삶을 살다가 얼마 후 군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가정불화가 왜 일어났는지 짐작하시겠죠. 군대생활하면서 집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선각분들께서 부대로 면회도 오셨습니다. 전역하면 ‘불고가사’ 일꾼 된 삶을 살아야지 하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또 사심에 빠진 저는 먼저 할 일을 까먹고 돈을 벌어서 가화를 시켜야겠다는 판단을 하고서 전역 후 직장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선각분들의 가슴에 또 한 번의 믿음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럴진대 돈이 벌리겠습니까? 3년 고생하다가 추석 때쯤에 형제지간에 칼부림이 나고 맺힌 골은 점점 더 깊어지자 아버지는 홀로 6여 년을 지내시면서 술병으로 폐인이 되어가셨습니다. 저도 별게 있겠습니까? 늘어나는 것은 술과 근심 그리고 짜증스러운 일상들의 반복이었죠. 마음속에서는 ‘도 닦으면 잘 되겠는데, 선각분들을 찾아야지. 결론은 수도밖에 없다’라는 내면의 외침이 있었으나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죠. 척신의 구렁텅이에 빠져있는데, 자력으로는 빠져나오기가 힘들더군요. 용기도 안 나고. ‘도냐 사회냐’라는 이중적인 마음상태로는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아시잖아요. 이러다가 한 세상 덧없이 가는게 아닌가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태을주’를 속으로 읽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후 느닷없이 선각분의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였지만 뭔지 모를 뭉클함이 내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더라고요. 그래서 약속을 잡고 만나 뵈었습니다. 선각께서 “네가 어린나이에 도에 들어와서 천지분간도 못하고 고생했다. 내가 부족해서 너를 잘 이끌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하시면서 “이제 때가 되었으니 그만 방황하고 다시 시작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의 고마움을 무엇으로 표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뻥 뚫린 고속도로를 가시는게 빠를까요? 아니면 구불구불 고갯길을 돌아 그것도 모자라 덜컹덜컹 비포장 길을 가는게 빠를까요? 늦게나마 깨닫게 되어 다행이기는 하나 지난 세월이 후회막급인 것은 어쩔 수 없네요.

 

여기까지가 변변치 않은 제 과거사입니다. 작년 추석 때 5박 6일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에 연수를 다녀왔고 10월에는 시학공부를 들어갔었습니다. 직장은 그만두고 지금은 어머니와 포덕소에서 수도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典經』에 “天將降大任於斯人也 必先勞其心志 苦其筋骨 餓其體膚 窮乏其行 拂亂其所爲 是故 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행록 3장 50절)이라는 말씀과 같이 큰 일을 감내하기 위해선 반드시 고진이 있어야죠. 맨입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다시 ‘가화’의 과정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대순지침』에 “가화(家和)가 안된 도인은 가정화목을 먼저 이룩해 놓아야 한다”, “가화(家和)가 있는 곳에서 공(功)을 거둘 수 있으니 가정화합에 대한 교화를 먼저하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집안 식구들이 서로서로 척을 맺고 뒤틀려 있었습니다. 제 자신 하나 추스르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내가 바로 서야지 바로 볼 수 있더군요. 머리를 긁으면 몸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우선 우리 가족의 원한의 시발점이 어디인가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 두 분이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복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라 했고, 논두렁에 물길을 위에서 돌려놓으면 그 논의 벼가 잘 자랄 수 없는 이치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입도시키고, ‘해원상생’의 이치를 깨달으시도록 해서 아버지와 화해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가화의 시작점을 잡았습니다. 며칠 후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가 계신 진보로 내려갔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걱정이 태산 같았으나, 믿는 연고가 있잖습니까? 아버지는 6여 년간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원망이 한이 되어 그것을 달랠 길 없어 하루하루를 술에 의지해 지내셨더군요. 복수가 차고 간이 상해 정신뿐 아니라 육체마저 병들어 있었습니다. 보일러도 안 되고 곰팡이 냄새나는 방에서 전기장판 하나에 의지해서 살아온 감옥 같은 생활을 생각하니 자식으로서 가슴이 미어지더군요. 이 세상이 ‘무도’해서 병이 들었다고 하셨는데, 수도인이란 사람이 제 아버지 제대로 못 모시면서 무슨 도를 닦고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받든다고 했었는지. 조상 선령신들이 얼마나 괘씸하게 여겼을 것이며, 천지신명들이 얼마나 비웃었을까를 생각하니 얼굴을 들 수가 없네요.

 

순임금도 자식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음으로써 요임금으로부터 천하를 물려받지 않았습니까? 작은 가정사의 문제지만 우리 수도인들은 중요성을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네요. 한 맺힌 아버지의 속내를 1박 2일 듣고 소주 한잔과 따뜻한 조반으로 눈 녹듯이 부부간에 또 부자간의 원한이 풀어지더군요. “인망을 얻어야 신망에 오르고 내 밥을 먹는 자라야 내 일을 하여 주느니라.”(교법 1장25절)는 말씀처럼 도인이 손수 지은 밥을 드심으로써, 아버지가 더 빨리 풀어지시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머리가 해결됐으니 이제 형제들도 바른 기운을 받을 것이므로, 다음 일들은 수월하게 해결되었습니다. 큰형과 둘째형 내외를 모시고 아버지를 찾아뵙고, 자식 된 도리를 못한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사돈댁과의 원한도 형수와 아버지가 풂으로써 잘 해결되더군요. 점심 식사를 하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화목했던 옛 시절로 돌아간 듯해서 참 기뻤습니다. 아버지가 웃으시고 형제들도 화기애애하니 이것이 가족의 행복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이번 일을 경험하면서 쌓인 원한은 풀어야 되고, 풀림으로써 서로 화합이 되고 단결이 됨을 몸소 체득하였고, 수도라는 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생활 속에 녹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해원 보은 상생의 양대진리를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무척 잘 산다”라는 말씀처럼 개인간의 원한이 풀리고 가정이 화목하게 됨으로써 사회가 건강해지고, 나라와 나라가 편안하게 되면, 그것이 진정한 포덕천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즉 각 가정의 화목이 우리들이 바라는 지상천국건설의 시발점이 된다는 것이죠.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수도란 우리 삶 속에서 훈회와 수칙을 생활화하여 몸소 체득함으로써 나 자신이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을 만나고 기도를 모시고 성을 모시는 것, 선후각 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과 밥 먹고 빨래하는 것 등등.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상생활 속에 충실하는 것이죠. 도가 크고 무량하여 언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실질적인 수도를 한다는 것이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서요. 여하튼, 이번 일을 교훈 삼아 참 용기를 가진 참 수도인이 되고자 다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도인들 각자가 각 가정의 해결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천명을 받고 내려온 금싸라기 같은 후천의 씨종자 말입니다.

 

후천 선경을 건설하는 상제님의 일꾼으로서, 혹 모자라서 도통을 못 받는다 해도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하겠는가’하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더 맑고 더 밝은 마음으로 우일신하며 새롭게 태어나고자 합니다. 만수도인 여러분의 건성을 기원합니다. 끝으로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영천 팔공 3방면 선, 교감과 여러 수도인들에게 고개 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보은상생’의 진리로써 평생 보답하고 받들 것을 약속드립니다.

 

 

<대순회보 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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