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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와 편지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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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혜원 작성일2018.01.31 조회3,6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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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29방면 선무 신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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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관 치성 지나고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었는데

어제 왔다 갔었다고 …….

연락소 갔었을 때 군자역 근처에 있었는데 …

오늘도 보기 힘들겠네.

마음 낸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거 알아요.

지금 신선무가 겪는 것, 우리가 겪는 것,

모두가 다 가는 과정이고 가는 과정에서는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을 겪을 수 있는 거예요.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돼요.

도는 변함이 없어요. 사람의 마음이 변할 뿐이지 …….

내가 너무 부족해서 신선무가 힘든 거라고 생각해요.

내 부족한 면을 신선무가 채워주길 바래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조금씩 정성 들여가 봐요.

1998년 12월 27일 선각이 …….

 

 

방을 정리하다 서랍 속에 나온 선각의 편지다. 17년 전 나는 어린 나이에 시작한 수도생활이 버거워 한동안 연락소에 오지 않았다. 그 뒤 오랜만에 연락소를 다시 찾았고 우연히 선각의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에는 선각이 나를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안타까움이 짙게 묻어 있었다. 선각의 안타까움이 나에게 전해진 탓일까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에 나는 다시 힘을 내어 수도생활을 했다. 그 편지를 17년이 지난 지금 우연히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지금도 선각을 처음 만났던 기억이 생생하다.

 

선각을 만나던 당시 나는 18살이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유년기를 보내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그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암울한 시기였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이별해야만 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학대가 시작되었고 아버지가 데리고 온 처음 본 여자를 ‘엄마’라고 불러야 했다. 하지만 그 ‘엄마’마저도 새로운 여자로 계속 바뀌었다. 나는 그저 살기 위해 먹었고 살기 위해 눈치 보며 맞추어 갈 수 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의 무차별 폭력으로 온몸이 멍든 채 살기 위해 집을 뛰쳐나왔다. 이곳저곳 헤매다가 이대로 죽을순 없다는 생각에 아는 분의 소개로 가내수공업 공장에 취직했다. 꼭두새벽부터 자정이 넘도록 일하는 고된 생활이었지만 맞지 않고 산다는 것이 정말 좋았다.

 

남의 집 일을 하며 살기 위해 눈치 보고 먹고 사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던 나에게 따뜻한 가정이란 사치였다. 엄마의 사랑이란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원망하는 마음만 키워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난 자식을 낳아도 당신들처럼 안 살 거야!”라고 절규하며 살아갔다.

 

그래서 입도치성을 드리며 가장 큰 소원 3가지를 빌라고 했었을 때 내가 빌었던 소원 중 한가지가 ‘식구들이 많은 집에 시집가고 싶습니다.’ 였다. 나는 항상 화목한 가정을 꿈꿔왔고 또 내 부모처럼 살지 않으리란 생각에 자신도 있었기 때문이다.

 

연락소 식구들의 관심과 친절함이 좋았던 나는 더욱더 관심받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실상 수도의 단계에서 내 안의 장애를 만날 때마다 너무 힘이 들고 지쳐만 갔었다. 그런 내 마음을 몰라주는 선각이 보기 싫었고 나도 모르게 도에서 그리고 선각에게서도 멀어지게 되었다.

 

한참 꿈많고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철없는 나이에 사회에 나와서 도를 잊는다고 멋도 내고 취업도 하며 ‘도’와는 다른 세상의 즐거움만을 쫓아갔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늘 내 생각, 내 방식만을 주장했다.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냉정한 말투로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도 많이 주었다. 이 세상에 사람이 따뜻한 생각을 하고 따뜻한 말을 하고 따뜻한 마음이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살고 있던 나를 묵묵히 다 받아주는 지금의 신랑을 만나게 되었고 일사천리로 결혼하게 되었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신랑의 시댁은 평상시 내가 빌었던 화목한 대가족이었다. 드디어 내 인생에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한번 찾아온 행운은 계속되었다. 우연히 이사를 하게 된 동네에서 잊고 지내던 방면의 한 선무분을 알게 되었고 그 선무를 통해서 다시 선각을 만난 것이다. 그 뒤로 선각과 선무분을 꾸준히 만나면서 교화를 듣게 되었다. 그러던 중 월성에 대한 교화도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월성의 중요성도 모른 채 “선무 밥은 비싼 거 사드리지만 월성은 모시기 싫은데요.” 싫으면 싫다고 직설적으로 말하며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내가 그러던지 말든지 선각은 요지부동이었다. 정성의 중요성을 계속 말했고 나중에야 월성은 ‘조상님 목숨줄이고 정말 큰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 꾸준히 모셔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무렵 신랑이 절친에게 사기를 당하고 말았다. 전 재산을 날리고 당장 이동할 차비조차 없는 어려움에 빠졌다.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고 임신 중이었던 나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태반조기박리라는 진단을 받았다. 내 배 속에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생사를 오가는 수술을 받고 8개월 만에 미숙아로 세상에 나왔다. 출산하자마자 아이는 신생아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죽을지 살지 모르는 기약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내 자식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게 되니 지금껏 살아온 내 인생이 후회스럽고 죄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아이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호적도 올리지 말라 하시며 애를 낳아도 딸인데 돈 들어가게 생겼다고 거친 말씀을 하셨다. 내가 소원하던 식구들이 많은 집이었는데 현실은 평상시 기대와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상대방 생각은 안 하고 막말과 욕설을 마구 하시는 시아버지, 이런 시아버지와 함께 사시는 여린 감성의 시어머니는 매일 죽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거기에 시누이와 시동생 시할머니까지 거들었다. 식구들이 많아서 마냥 좋을 것이라는 생각은 나의 오산이었다. 엄청난 시집살이와 미숙아 아이, 신랑의 사기사건까지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회관에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정성을 드리고 반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댁을 더욱 원망하기에 바빴고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까?’ ‘왜 나만 참고 살아야 할까?’라며 푸념만 늘어놓았다. 논리적으로 잘 잘못만 따지고 위로받기를 바라는 마음만 가득했다.

 

선각이 시키는 대로 해보면 일단 3일은 버틸 수 있었다. 그것도 잠시 정성의 의미도 모른 체 ‘선각이 하라고 하니까’라는 늘 상대를 원망할 준비만 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자성 자각이 없이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5년이 지나고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 첫아이 임신 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싫어서 태교에 힘쓰고 100일 기도를 시작했다. 오로지 아이를 위해서 정성을 드렸다. 입도한지 10년이 넘어서야 마음에서 정성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첫아이 제왕절개 때문에 둘째는 자연분만을 할 수 없다는 의사들의 말, 위험하다며 엄청난 반대를 하는 가족들, 하지만 나는 상제님 임의에 모든 걸 맡기고 정성을 드리기로 결심했다. 내 부모처럼 아이에게 고통을 주는 게 아닌 ‘엄마는 너를 사랑해 네가 때가 되면 건강하게 나올 수 있지?’하는 생각에 자연분만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처음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 후에 수소문 끝에 찾아간 조산원에서 3.6kg 건강한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아이는 자연의 이치에 맞게 아무런 약도 강제적인 조치 없이 12시간 진통 후 온 가족의 축복 속에 자연분만을 했다. 아이를 내 가슴에 올려두자 눈도 못 뜨는 아이가 알려주지도 않은 젖을 찾아 정신없이 빨기 시작하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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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감사라는 단어를 모르고 살던 나는 둘째 아이를 출산하면서 부모에게 받지 못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상제님 덕화를 통해 알게 되었고 ‘척을 짓지말라.’는 훈회처럼 그동안 자기애 없이 살아온 세월이 죄스럽기만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이것이 집안의 겁액이구나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을 이겨내자.’고 굳게 다짐했다. 그래도 워낙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원망과 바라는 마음에서 완전히 벗어 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선각이 정성 들이는 외수가 있는데 그 외수 후각 가게에서 늘 선각만이 기도를 모셔주었다. 선각이 상황이 안 되어서 신경 써줄 사람이 필요했고 나는 ‘처음으로 부족하지만 선각을 도와드리자, 나라도 보탬이 돼보자.’ 생각하며 외수 가게에 기도를 모셔주러 갔다. 늘 나만을 생각하던 이기적인 마음에서 벗어나 ‘남을 잘되게 하라.’라는 마음으로 실천하니까 그동안 했던 선각의 말이 차츰 들려오기 시작했다. 늘 어둠 속에 있었고 이 세상에 밝음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차에 자신이 이렇게 변할 수 있고 이렇게 안심안신이 되는구나! 이렇게 인공을 드리는데 신명이 복을 줄 수밖에 없구나! 안될 수가 없겠다. 확신이 들기 시작했고 선각도 나의 도움이 힘이 되어주어서 고맙다고 하시니 더욱 뜻을 같이하고 싶었다.

 

그리고 신랑에게도 ‘상제님 덕화를 알려주자’고 마음먹고 열심히 정성을 드렸다. 결국 그 해 가을 신랑도 시운치성을 모셨다. 내가 결심한 것을 부족하지만 상제님을 받들고 상제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도에서는 반드시 복마의 발동이 있어 어려움이 함께 드러나는 법이다.

 

시어머니께서 유방암 2기 반으로 판명이 되고 집안은 난리가 났다. 신랑은 오히려 치성을 해서 그렇다며 거친 말로 내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 내가 전에 ‘이기적인 마음과 냉정한 말투로 준 상처를 다시 받는구나’라는 마음으로 반성하며 ‘다 풀어내자!’고 생각했다. 우리 도가 신도이며 화복임을 다시 설명하고 이런 어려움을 잘 넘기자고 그나마 더 늦기 전에 발견된 것이 정말 감사하고 다행인 일이 아니냐고 말하며 신랑을 이해시키고 시어머니 치료에 신경을 썼다. 다행히 중기라 암절제 수술이 성공적으로 되고 오랜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로 암 전이 없이 현재 완치 판정 후 자기관리 하시면서 건강에 힘쓰고 계신다.

 

집안 신경 쓰고 시댁 챙기고 가게 일까지 …. 내 몸이 더 피곤해졌지만 내 마음은 더 도에 가까워졌다. 어렸을 때 자라온 환경 때문에 습관적으로 시부모님 원망을 많이 했다. 하지만 나는 도에서 처음 인간의 진심과 정성이란 걸 배웠고 점점 나 자신이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선각을 진심으로 대하고 따르며 그 마음으로 시부모님을 받들고 따르면서 점점 기운이 달라지고 시부모님에 대한 서운함보다는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커져갔다.

 

함께 있을 땐 서로가 고맙고 감사한 것 없이 매사가 당연했는데 지금은 시부모님께서 저에게 “고맙다. 애썼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시집살이 12년 동안 듣지 못했던 말을 요즘은 한꺼번에 듣고 있다. 작년에 시댁에서 분가하면서 시부모님이 너무 서운해 하시고 우리도 죄송했지만 오히려 떨어져 있으니 시부모님을 더 챙겨드리고 부모님께 잘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면서 지금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다.

 

지금 나는 오래된 고목나무에 새 기운을 돌리며 꽃을 피우고 있다. 오랜 기간 움츠린 만큼 선각과 뜻을 맞추어 사업을 해보니 오랜 시간 말 안 듣는 후각들을 내내 기다리기만 했던 선각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끼고 후각들 신경 쓰는 모습을 보며 내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마음으로 항상 나를 지켜주시고 심고드리고 기다려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 열심히 하게 된다.

 

냉정함과 분노, 원망, 미움이 가득한 내 마음을 어쩌지 못할 때 선각의 도움으로 감사일기를 쓰며 마음의 부정을 빼고 긍정으로 채우기 시작해서 이제는 감사가 몸에 배서 어떠한 부정적인 것이 와도 긍정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겨 내 주변까지도 밝은 긍정의 힘을 나눠주게 되었다.

 

이제 갓 입도한 수반들은 지금의 나를 보면 늘 밝았던 거 같다며 “정말 변할 수 있을까요?” 반문한다. 난 언제나 “당연하죠. 진실한 마음으로 정성을 드려보세요.”라고 당당히 말해준다. 그리고 방면 선감께서 매일 수의를 해주실 때 “인간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아라. 신명에게 인정받고 밖에서 성공하려고 애쓰지 말아라. 도 안에서 성공해라. 그것이 운수다.”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선감 말씀을 새기며 도에 대한 확고한 뜻이 생기고 성공하고 싶고 이렇게 좋은 도와 상제님 덕화를 사랑하는 내 주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생각뿐이다.

 

마음을 못 내는 후각이 나에게 묻는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리 신경을 쓰냐고….” 나는 17년 동안 나를 지켜준 선각이 고맙고 감사하다. 내가 받았으니 갚는 건 당연하다 생각하고 보은을 행하고 있다.

 

지금 나는 너무나 행복하다. 집에서 기도 모시는걸 간절히 바랐더니 나는 매일 밤 한 시 기도를 집에서 모시며 법수를 만들어 후각 한 명 한 명에게 주고 상제님의 수도법방과 선각의 마음을 전하고 그 마음을 받아 고마워하고 감사해 하는 후각을 보면 너무 즐겁고 신이 난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니 주변에 있는 사람이 모두 대상자이며 내가 바라지 않고 비우며 하나 하나씩 도를 알리려고 마음을 써나가고 있다. 후각이나 대상자로 인한 어려움이 올 때는 나만 겪는 것이 아닌 선각도 같이 힘들어 한다는것을 처음 알게 되면서 ‘지금 내가 이렇게 힘들면 선각도 힘드실거야 그럼 나도 이겨내야지.’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후각의 문제점이 보이면 나부터 반성하고 더욱더 정성을 내어서 진심으로 대하려고 한다. 비록 어려움이 와도 원망이 아닌 일이 되기 위한 과정을 주시는구나! 라고 생각하니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 심고 드리면 어두운 기운이 걷힌다. 매일 나는 “선사요 정말 신기해요. 우리 도가 신도 맞나봐요. 마음을 쓰면 쓰는 대로 다되요. 이렇게 일이 되는데 어떻게 딴생각을 해요.”라고 말한다. 내가 방심하면 기운을 감당하지 못해 후각이 마음을 못 여는 걸 보는 순간 너무 죄스러워 다시는 방심할 수 없게 되고 정성에 정성을 더하게 된다.

 

이제 시작이지만 세세하고 작은 것 하나까지도 마음의 분란을 일일이 선각과 상의하고 막히지 않도록 기운을 돌리고 선무가 마음먹고 추진하면 안되는 게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은 후각 2명을 만나고 와서 밤 한 시 기도를 모셨다. 좀처럼 마음을 못 내는 대상자를 위해 심고드린다. ‘상제님. 후각, 대상자 조상님들 이 사람들 운수마당 가는 끝까지 도인 만들어 데리고 가겠습니다. 부족하지만 믿고 붙여주시고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준비가 돼 있습니다. 제발도와주십시오.’라며 기도했더니 갑자기 굵은 눈물이 흘렀다. 간절함이 밀려오고 조상님들이 매달리는 게 느껴지며 우리 선각도 이런 마음으로 17년 동안 나를 기다리고 믿고 지켜주셨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 고맙고 감사할뿐이었다.

 

『전경』에 “일심을 가진 자에게는 지체없이 베풀어주리라.”는 구절처럼 포기하지 않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함을 잃지 않고 받아들이겠다는 정성 어린 마음으로 매일매일 하루를 보낸다. 지금부터 시작이며 어렵고 힘든 일도 많겠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늘 고맙고 감사함으로 모든 것은 마음에 있고 포기하지 않는 일심에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며 가을이 깊어가는 이 새벽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져본다.

 

선각요……. 16년 전 주셨던 편지가 그때 저에게는 하찮았던 종이였는데 지금에서야 그 내용이 이해가 됩니다. 행해야지만 알 수 있는 내용이란 걸……. 부모도 버린 저를 선각께서 오랫동안 마음으로 품어주고 믿어주신 덕에 상제님의 천지대도를 알게 되었으니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대순회보 1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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