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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화의 모델이 되기까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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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귀순 작성일2018.02.14 조회3,5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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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딸과 수도생활 3년

 

빚만 안겨 놓고 남편은 고성제생병원 공사를 떠났습니다. 어린 딸을 데리고 먹고 살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 당시 선사였기 때문에 수반들 챙기고, 선감 모시고 수도인 집에 매일 같이 기도 모시러 다니면서 회관에 출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시간을 만들어 돈도 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3살 된 어린 딸을 데리고 할 수 있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습니다. 광고 다 찾아보고 여러 곳에 연락했는데도 시간이 안 맞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일자리를 하나 구했습니다. 길바닥에서 옷을 파는 일이었습니다.

 

   

부모 형제가 다 살고 있는 고향 땅에서, 오며 가며 형제들이나 친구들이 보면 어떻게 하지? 그래도 창피함을 뒤로 하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일밖에 없었으니까요. 천 원짜리 하나 없어도 부모형제,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달라, 도와 달라, 한 번도 부탁한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욕하는 것은 괜찮은데, 대순진리회를 욕하니까. 내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수입은 판매량의 20%입니다. 하나도 못 팔면, 그날은 밥도 굶어야 했습니다. 또 가까이에 식당이 없어서 굶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친구들이 나를 보고 놀라서 말을 못하였습니다.

 

“친구야,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저는 능청스럽게

“내 처음 보나? 옷 장사하잖아, 옷이나 사 가라!”

 

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당당하게~(언젠가는 너보다 내가 더 멋진 삶을 살 테니까). 저는 기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이 더 심하게 했습니다. 부모형제 창피 준다고 포항 땅을 떠나라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무시하면서 욕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눈물을 머금고 상제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공부는 물 한 그릇이라도 연고 없이 남의 힘을 빌리지 못하는 공부이니 비록 부자와 형제간이라도 함부로 의지하지 말지어다.”(교법 1장 7절)

 

 

 

친척들이 아무리 잘 살아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욕이나 안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욕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도, 터지지도 않더라고요. 그렇게 견디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는데 더욱더 어려운 시기가 찾아 왔습니다. 남편은 사회생활만 하다가 공사현장에 바로 참여했기 때문에 적응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몸무게가 97kg에서 67kg까지 빠져 버렸습니다. 갑자기 30kg이나 빠졌으니 몸이 남아나질 않는 것입니다. 이빨이 쑥쑥 빠지고, 현장에서 몇 번이나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고성제생병원 현장에 다녀오시는 방면임원 분마다 제 남편을 보고 가슴 아파 눈물지었습니다. 얼마나 남편의 몰골이 망가졌으면 그랬을까 짐작은 갔습니다. 그 당시 그런 소식을 들어도 독하게 마음먹고 내려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끝까지 참아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눈이 많이 오면 일을 못해 내려오는 하사금이 작아서 생활이 더 어려워졌습니다. 게다가 치아가 다 망가져서 치과를 다녀야 했습니다. 이빨 치료를 해야 밥을 먹고 살 수가 있으니, 치료가 급했습니다. 더군다나 노점에서 하루하루 버는 수입만으로는 생계를 이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다른 일자리를 찾았는데, 횟집에 한 달 동안 숙식하면서 일을 하면 보수를 더 준다고 했습니다. 솔깃해서 한번 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딸을 수반선무 집에 부탁하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모든 생활은 알아서 다하겠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으니,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우리 셋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남편은 강원도 고성에 제생병원 현장에서 일하고, 3살 된 딸은 포항 송도 바닷가 박 선무 집에 있고, 저는 관광지 바닷가 횟집에서 일했습니다. 저는 태어나고 그때 처음 식당일을 했습니다. 오직 도심으로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식당은 주로 단체손님이 많았습니다. 하루에 관광버스 1대, 2대가 아닌 20대, 30대. 예약손님이 끝도 없이 왔습니다. 주차장에는 관광버스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창밖에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보였습니다. 파도를 타며 즐겁게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습니다. 쉼 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는 우리 가족의 아픔을 달래 주는 것 같았습니다.

 

식탁 위에는 도자기로 된 반찬 그릇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한바탕 부산 자갈치 시장처럼 시끌벅적 인간시장이 됩니다. 그 손님들이 가고, 빈 그릇을 다 옮기고 나면 진이 다 빠졌습니다. 설거지할 그릇들은 산더미 같았습니다. 옛날 어르신들께서 허리가 휘도록 일을 했다는 말씀을 하실 때, 전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제대로 체험을 했습니다. 도자기로 된 반찬 그릇을 옮길 때는 다리가 휘청휘청하면서 허리가 휘어지는 걸 실감했습니다. 식당일이 그렇게 힘이 들 줄 몰랐습니다.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무조건 약속은 지켜야 했습니다. 여름 한철은 종업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합니다. 계약했으니 어금니 꽉 물고 참고 일하는 동안 우리 세 식구는 서로 통화만 하면 울었습니다.

 

3살 된 딸은 아빠·엄마가 그리워 흐느껴 울며 빨리 오라고 합니다. 우리는 각자 너무 힘들어서 소리죽여 울었습니다. 통화음성에 울고 있는 모습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서로 힘들어 우는 거 알면 가슴 아플 것 같아서요. 아마 우리 세 식구에게 그때가 최고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가 우리 가족의 삶 중에 가장 높은 산을 넘고 있었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딸을 만났는데 새까맣게 타서 시골 촌뜨기로 변해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아무리 어려워도 같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골탈태하다

 

어느 날 휴가가 나와서 집에 올 수 있다고 남편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아빠 만난다고 무척 좋아하는 딸을 데리고 터미널에 마중을 나갔습니다. 저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면서 가방을 메고 걸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오는데 남편이구나 생각하고 얼굴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아난존자 같은 모습을 잠깐 스치듯이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모습을 하고 내 앞에 떡하니 서서

“잘 있었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본 그 얼굴. 잘 닦아내면 그 모습이 나타나리라 믿었던 그 모습. 나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울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되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죽음을 오가며 닦인 모습이리라. 가슴이 아려 왔습니다. 그 고통을 참아준 남편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살이 빠져 몸무게는 많이 줄었지만, 단단해진 모습이 훨씬 더 멋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휴가를 몇 번 다녀갔는데,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병원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하산하라는 명을 받고 지방으로 내려왔습니다. 집에 와서 생활하는데, 친구들이 못 알아보는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만나는 분들마다 물어봅니다.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생겼나요? 신수가 훤합니다. 좋은 거 있으면 우리도 알려주세요.” 보는 사람마다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넸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정말 더 감사한 건 남편이 대순진리회의 진리를 깨닫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함께 수도하면서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받들고 싶었던 소망도 이루어졌습니다. 모습, 마음 모두 다 변하고 바뀌어 돌아왔으니, 온 가족이 고생한 보람인 것 같아 행복했습니다.

 

 

조상님께서 주신 직장

 

남편은 집에 돌아온 후 안정적인 직장을 얻지 못했습니다. 시학공부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니까, 고향 형님 회사에 일용직으로 다녔습니다. 어느 날 남편은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학공부를 그만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식 공부도 시켜야 하고 수도하는 당신 뒷바라지도 하고요. 고민하다가 의논하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공부는 계속해야 합니다.”

“그렇게만 말하지 말고 생각을 좀 해봐요. 우리 생활도 힘들고, 당신이 나 때문에 고생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 안 되겠어요. 가정이 안정되어야 수도하면서 먼 길을 갈 수 있어요. 고정수입이 들어와야 합니다.”

남편은 자신이 일하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시학공부를 못하면 후회하지 않겠어요?”

“후회하지 않아요. 부부가 한 사람은 열심히 상제님 뜻을 받들고, 한 사람은 일해야지 가정이 원활하게 돌아갑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도 따르겠습니다. 훗날 원망하시면 안 됩니다.”

“네.”

 

남편은 그때부터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사십 대 중반인지라 좋은 직장은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맥을 동원해 다 찾아보았습니다. 몇 군데 연락해 두고 기다리고 있을 때, 도장에서 대진요양병원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갑자기 도장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남편은 임시로 다니고 있던 회사를 그만두고, 대진요양병원공사에 참여하려고 집을 떠났습니다. 저는 딸이랑 살면서 1년 반 동안 닥치는 대로 이런저런 일을 하였습니다. 몸은 자꾸 아파오고 힘들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을 만나 편하게 수도하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인가? 내 업보가 얼마나 많은 걸까? 고생이 너무 되니까 여러 생각들이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달랬습니다. ‘남편과 수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소망이잖아. 그런데 무슨 이런 약한 생각을. 앞만 보고 가는 거야.’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참았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상제님 앞에서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어느 날은 울면서 심고 드리다가 잠들어 촛불이 다 타서 범벅되어 있는 날도 있었습니다. 날이 밝은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적도 있었습니다. 남몰래 울었던 시간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상제님만은 아실 것입니다.

 

사실 저는 8남매의 막내였기에 호강하며 자랐습니다. 친정집이 나름 부유하다 보니 고생을 하지 않았고, 궁핍한 생활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혼자 수도할 때도 이렇게 힘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돈이 제 주머니에서 떨어져 본 일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남편을 만나면서 힘들고 어려운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생활을 안 했더라면, 아마도 돈에 대한 해탈까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어린 딸 때문에 돈의 고비를 넘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식을 굶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먹고 싶다, 갖고 싶다, 우는 어린 딸아이에게 돈이 한 푼도 없어 못 해주는 엄마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저는 너무 힘이 들 때면 항상 상제님을 뵈러 도장에 갔습니다. 어느 날은 방면 수반들과 어린 딸을 데리고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에 참배 가서 잠이 들었습니다. 꿈에 친정 아버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저의 손을 꼭 잡고,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미안하다.”

“아버지께서 제게 미안할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러세요?”

“미안하구나. 내가 너를 한 씨 가문에 팔았다. 내 전생에 한 씨 가문에 노름빚이 있었다. 그래서 너를 그 집에 팔았다.”

 

저는 꿈인데도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신혼 초에 그렇게 남편이 싫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에 손만 닿아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당시 제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남편은 다른 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참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내가 고생을 하는 것이며, 남편과 어떤 인연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조상님의 빚을 갚고 있었던 것입니다. 힘이 들어도 우리 아버지 빚을 갚고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면서 더 참고 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진요양병원에 공사하러 간 남편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의논도 않고 집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남편은 직장 부탁한 것이 될 것 같아서 집에 왔다고 합니다. 직장이 되면 연락받고 내려와도 되는데 ….

 

저는 앞으로의 생활이 걱정되었습니다. 한 달, 두 달 시간은 가고, 생활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매달 지출은 있는데, 수입이 없으니 빚은 늘어만 갔습니다. 저는 더는 돈벌이를 하지 않았습니다. 의논도 않고 무작정 내려왔으니, 본인이 한 행동에 책임을 지게 했습니다. 이 역경을 이겨낼 수 있을까? 없을까?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심고 드리고, 정성 드리고, 겨우겨우 이겨 내고 있을 때입니다. 당시 저는 건강상태가 너무 안 좋아 지탱하기도 힘이 들었습니다.

 

 

“당신 혼자 이 가정을 책임지세요. 저는 앞으로 더는 돈을 벌거나 당신을 도와주지 못할 것 같아요. 당신이 천지공사를 잘 받들면, 우리의 업이 닦기고 희망도 생기니까, 몸이 다 망가지도록 일을 했습니다. 나와 뜻을 같이하지 않고, 혼자 결정하고 이 가정을 끌고 간다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더 이상 앞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확고한 뜻을 전했습니다.

3개월, 5개월이 흘러가도 기다리던 직장은 소식도 안 오고,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잔소리를 했습니다.

“나랑 의논만 하고 왔으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텐데. 앞으로 지금보다 더 힘들어지면 셋이 다 같이 하늘나라로 갑시다.”

나는 압박 아닌 압박을 했습니다. 남편은 미안해서인지 공사현장의 위험한 일을 택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포항에서 가는 교통편도 불편한, 충남 당진에 있는 현대제철 공사 현장이었습니다. 먼 길 떠나는 남편에게 저는 잔소리를 또 했습니다.

“도장에서 공사하고 있으면 되는데, 무슨 생각으로 내려와서 고생을 자초하는지 모르겠네요. 도장에 있으면 딸이라도 볼 수 있지만, 이제 더 멀리 떨어져 볼 수도 없네요.”

떠나는 남편 가슴을 더 아프게 했습니다. 혼자 결정해서 이런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전 너무 독한 사람 같았습니다. 한순간 잘못 생각해서 우리 가족 모두가 고생하고 있다고 생각한 남편은 마음을 모두 비우고 후회하면서 집을 떠났습니다.

 

저는 딸이랑 또 현실과 부딪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5개월을 수입 없이 비워버린 우리 가정은 회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혼자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울면서 또 상제님을 찾아 도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내정 뒤쪽에 있는 4초소에서 수호를 서면서 도전님께 ‘이 고비를 잘 넘길 수 있게 도와주세요. 간청하는 심고를 드렸습니다. 이틀째 4초소에서 수호를 서고 있을 때였습니다. 도련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형수, 형님이 전화를 안 받습니다. 형님 어디 계신가요?”

“형님은 지금 당진에 일하러 갔습니다.”

“그러시면 지금 형님께 연락해서 빨리 내려오시라고 하세요.”

“무슨 일이 있나요?”

“내일 아침에 서류를 회사에 내셔야 합니다. 내일 꼭 해야 합니다.”

“형수가 책임지고 연락하셔야 합니다.”

 

저는 급하게 남편에게 연락했습니다. 교통이 불편한 당진은 차편이 일찍 종료되어서 내려올 길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들어가고 싶었던 회사였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 무슨 방법을 찾아서라도 내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방법을 찾아보시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같이 일하는 책임자분에게 부탁했더니, 대전역까지 태워주어서 덕분에 대구역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대구에 있는 회관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첫차를 타고 포항에 도착해서 동사무소, 공공기관을 다니며 모든 서류를 준비해서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튿날부터 출근했습니다. 1년 반 세월을 기다렸던 일이, 하룻밤 사이에 되었습니다. 꿈같은 직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편안하게 사무실에서 하는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회사에 입사하려면 최소한 3년은 기다려야 합니다. 취업하기 어려운 시기라 명문대 졸업자도 줄을 서는 곳입니다. 입사하고 싶은 서류들이 쌓여 있어도 퇴직하는 사람이 소수라서 입사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첫 월급이 높아서 서로 입사하고 싶어합니다. 모두 경사 났다고, 축하하면서 같이 기뻐해 주었습니다. 시댁, 친정에서는 “대순진리회에서 수도한다고 고생하면서 돌아다니더니, 잘 되긴 잘 되는구나,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다.” 하시면서 우리가 수도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믿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수도인들은 잘됐다고 다들 우리 마음같이 기뻐해 주었습니다.

 

“두 부부가 고생하면서 진실로 하더니, 복을 받는구나.”

먼저 양위 상제님, 도전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님께 무릎 꿇고 감사드렸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셨지만, 믿고 돌아가셨습니다. 남편이 직장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인연은, 시어머님 돌아가셨을 때 문상 오신 분을 만나 인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순회보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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